서석대>팩트를 보는 눈
  • 페이스북
  • 유튜브
  • 네이버
  • 인스타그램
  • 카카오플러스
검색 입력폼
서석대
서석대>팩트를 보는 눈
오지현 취재1부 기자
  • 입력 : 2025. 05.21(수) 16:37
고대 아테네에는 비합법적인 수단으로 지배자가 될 수 있는 위험이 있는 정치인을 추방하는 ‘도편추방제’가 있었다. 시민들은 해마다 투표를 통해 도편추방제를 실시할 것임을 정했으며, 추방이 결정되면 깨진 도자기 조각에 해당 정치인의 이름을 적어 그를 10년간 도시 밖으로 내쫓았다.

누구보다 ‘공정한 사람’으로 불렸던 아리스테이데스도 이를 피할 수는 없었다. 어느 날 길을 걷던 아리스테이데스에게 한 시골 사람이 도자기 조각을 내밀어 이름을 적어 달라고 부탁했다. 누구 이름을 적어야 할지 묻는 아르스테이데스에게 시골 사람은 ‘아리스테이데스’라고 말했고, 자신의 이름을 도자기에 적어 넣은 그는 시골 사람에게 왜 그 사람의 이름을 적었는지 물었다. 그러자 시골 사람은 이렇게 답했다. “나쁜 짓을 해서는 아니고, 만나는 사람마다 아리스테이데스가 공정하다고 하니 지겨워서 그렇습니다.” 그렇게 아테네에서 추방당한 아리스테이데스는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가 침략하자 다시 시민들의 부름을 받고 돌아와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 일화는 시골 사람과 같은 정치적 문해력이 결여된 다수의 판단이 민주주의를 어떻게 왜곡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다양한 정보와 목소리가 넘쳐나는 시대에 살고 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진실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정치인들은 근거 없는 말을 쏟아내고, 언론은 이를 그대로 옮기며, 유권자는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구분할 시간도, 여유도 없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자신의 저서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이렇게 경고했다. “사실(facts)이 부정될 때, 사람들은 현실을 인식하는 능력을 잃는다. 그렇게 되면 어떤 주장도 사실 여부로 평가되지 않고, 누가 말했느냐에 따라 받아들여진다.” 그녀는 이러한 상태가 민주주의의 파괴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사실 없는 정치에선 책임도, 판단도, 회복도 어렵다. 정치인이 말한 내용이 사실인지조차 따지지 않는 사회는, 도편추방제에서 아리스테이데스를 쫓아낸 시골 사람처럼 ‘지겹다’는 이유로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대가는 결국 우리 모두가 치르게 된다.

민주주의는 다수의 의견을 따르는 제도지만, 그 다수가 반드시 옳은 판단을 한다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역사는 다수가 진실을 놓쳤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여러 번 증명해왔다.

정치도 그렇다. 비상계엄 이후 치러지는 조기 대선인 만큼, 우리는 대선 후보들의 말이 사실 위에 있는지 검증하는 정치적 문해력을 갖춰야 한다. 단순한 감정과 갈라치기에 휩쓸려 객관적인 시각을 잃게 된다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또 다시 허공 위에 표류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