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석대>사카린의 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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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석대>사카린의 반전
이용환 논설실장
  • 입력 : 2025. 04.17(목) 16:35
이용환 논설실장
“인류의 역사를 바꾼 물질이 될 것이다.” 1879년 어느 날,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 화학과 아이라 램슨 교수와 제자 콘스탄틴 팔베르크가 새로운 단맛을 내는 물질에 대한 공동논문을 발표했다. 석유의 불순물인 타르에 포함된 화학물질의 산화 반응을 연구하던 그들은 실험이 끝난 후, 손을 씻지 않고 빵을 먹다 강한 단 맛을 느꼈다. 페인트 등을 만들 때 사용되던 톨루엔에 염소와 황산을 반응시킨 뒤, 암모니아를 더해서 만든 새로운 물질. 인체 유해 여부를 놓고 지금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인공 감미료 사카린의 탄생이었다.

“징역 2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한다.” 1969년 8월 26일, 대법원이 이병철 삼성회장의 둘째 아들 이창희 상무의 유죄를 확정했다. 앞서 삼성은 1966년 5월 울산에 공장을 짓고 있던 한국비료를 통해 사카린 2259 포대를 건설자재로 꾸며 세관 몰래 들여와 판매하려다 들통 났다. 이른바 한국비료 사카린 원료 밀수입 사건이었다. “박정희 대통령과 이병철 회장의 공모로 만든 엄청난 규모의 조직적 밀수였다.”는 게 이 회장의 장남이면서 삼성家 ‘비운의 황태자’로 불렸던 이맹희 전 CJ그룹 명예회장의 회고다. 대법원도 ‘이 상무가 한국비료 건설을 위해 이윤이 높고 시중에 인기가 많은 사카린 원료를 밀수하기 위해 일본 미쓰이 물산을 통해 건설자재인 시멘트를 가장해 도입했다 ’고 판단했다.

삼성이 그룹의 운명을 걸고 밀수까지 감행했을 만큼 70년대 사카린은 기적의 물질이었다. 무엇보다 동일한 중량의 설탕과 비교해 무려 300배의 당도를 가졌지만, 값은 설탕의 10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경쟁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열량이 없는데다 가정은 물론이고 빵이나 과자, 음료수 등 대량으로 제조되는 어떤 제품에도 활용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었다. 반면 유해성 논란도 끊이지 않았다. 독성물질을 활용한 제조 방식 때문이었다. 1977년에는 캐나다에서 쥐에게 사카린을 먹인 결과 방광종양이 발견됐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우리나라도 1990년부터 사카린 사용을 규제했다. ‘공포의 백색가루’라는 별명도 얻었다.

영국 브루넬대 연구팀이 ‘사카린’으로 세균의 항생제에 대한 내성을 해결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사카린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병원균 중 하나인 다제내성균을 억제해 항생제의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연구진의 설명이다. 항생제의 내성으로 인한 직·간접 사망은 전 세계적으로 매년 500여 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페니실린과 마이신 등 항생제에 끄떡하지 않는 세균들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인류의 역사를 바꾼 물질에서 공포의 백색가루로 전락했던 사카린. 그 기구한 운명의 사카린이 세균의 침공에서 인류를 지키는 또 다른 반전의 역사를 쓰고 있다. 이용환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