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뜰날'로 희망을 준 송대관 영결식
  • 페이스북
  • 유튜브
  • 네이버
  • 인스타그램
  • 카카오플러스
검색 입력폼
TV·연예
'해뜰날'로 희망을 준 송대관 영결식
  • 입력 : 2025. 02.09(일) 16:41
  • 뉴시스
9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트로트 가수 고 송대관의 발인식이 엄수되고 있다. 뉴시스 제공
50년 간 남녀노소에게 희망을 준 ‘해뜰날’로 기억되는 트로트 가수 송대관(79)이 영면에 들어갔다.

9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에서 송대관의 영결식이 대한가수협회장으로 거행됐다.

고인과 ‘영원한 라이벌’로 통했던 절친한 트로트 가수 태진아가 추도사를 맡았다.

지난 7일 송대관 별세 이후 밥 대신 술로 배를 채웠다는 그는 “형님이 하늘나라 가시면, 방송하는 것도 큰 재미가 없을 것 같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치매에 걸린 자신의 아내 이옥형 씨에게 송대관이 별세했다고 하니 “어떻게? 왜?”라고 반응했다고 전한 태진아는 “아내를 끌어안고 울었다. 이 형이 우리와 얼마나 가까웠는지 (다른 걸) 기억 못 하는 아내도 형을 기억해 주나”라고 먹먹해했다.

특히 송대관과 라이벌 디너쇼를 계획 중이었던 태진아는 “세트리스트 정리 중이었는데 그 다음 날 돌아가셨다.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태진아는 마지막으로 고인의 영정을 바라보고 손을 흔들었다. “대관이 형 잘 가. 형은 영원한 나의 라이벌”이라고 외쳤다.

대한가수협회장인 가수 이자연은 조사를 통해 “‘해뜰날’은 우리 국민이 너무 가난한 시절에 꿈과 희망을 준 원동력이다. 저 역시 ‘해뜰날’이 되도록 꿈을 키워왔다. 많은 분들이 오래 오래 기억할 것”이라고 애도했다.

송대관 그리고 현철, 태진아와 함께 ‘트로트 4대 천왕’으로 불린 설운도는 고인에 대해 “데뷔했을 때 정말 우러러봤던 선배님이셨다. 같이 활동도 하면서 참 많이 배웠다. 무엇보다 열심히 사셨던 분”이라고 기억했다.

이날 오전은 영하의 날씨였지만 고인의 가요계 선후배, 동료들이 상당수 모였다. 태진아, 설운도를 비롯 이날 강진, 박상철 등이 운구에 함께 하면서 오열했다.

트로트는 송대관의 ‘네 박자’에도 나오는 ‘쿵짝 쿵짝 쿵짜자 쿵짝’이라는 리듬 때문에 ‘뽕짝’이라고도 불린다. 이런 ‘뽕끼’ 때문에 한 때 트로트 음악을 촌스럽게 여기기도 했다. 꺾는 창법만 주가 되는 ‘음악성’과는 거리가 먼 음악으로도 치부됐다.

한국형 팝 발라드가 등장한 1980년대 후반 우리 대중음악에 모던함이 더해지고 랩 댄스 가수들이 힙합 문화를 가져오는 등 1990년대 우리 대중음악계에 황금기가 찾아오면서 트로트는 메인 장르에서 더 멀어지게 됐다.

하지만 송대관을 비롯 현철, 설운도, 송대관, 태진아 등 ‘4대 트로트 천왕’을 선봉으로 한 스타들이 그 명맥을 이어왔다.

1967년 ‘인정 많은 아저씨’로 데뷔한 송대관은 특히 트로트에 인생사를 녹여 수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따라 부르는 ‘유행가’를 냈다.

그런데 고인의 어린 시절은 무척 살림살이가 팍팍했다. 가수 성공을 목표로 상경할 당시에도 표 살 돈이 없어 무임승차를 할 정도였다. 1992년 발표한 ‘차표 한 장’이 크게 히트한 이후 서울역에 차비를 몇 배로 돌려준 사연은 유명하다.

특히 송대관을 스타덤에 올린 ‘해뜰날’은 빈자(貧者)들의 희망가로 통했다. 모두가 어렵던 시절에 이 노래는 위로이자, 앞날을 꿈꾸게 하는 빛나는 등불이었다. ‘한강의 기적’을 일궈낸 경제 개발시대에 주제가처럼 불리며 ‘시대의 응원가’가 됐다.

하지만 송대관의 ‘네박자’를 빌리자면, 인생은 항상 정박자가 아니다. 송대관 삶에서 우여곡절은 이어졌다. ‘해뜰날’로 가수왕까지 됐지만 결혼 이후 그의 삶은 해가 지기 시작했다. 컬러 TV 시대로 접어들면서 주수입원인 공연 시장이 이전까지 않자 송대관은 잠실 등지에서 분식집을 운영하기도 했다.

이후 처가가 있는 미국으로 건너가 1980년대엔 미국에서 살았다. 전두환 정권 시대인 지라, 혹자는 고인이 민주화 운동을 한 것이 아니랴고 추정하기도 했다. 현지에서 어려움을 겪던 송대관은 샌드위치 가게, 슈퍼마켓 등을 운영하며 성공한 사업가가 됐다.

그러다 향수병이 도져 귀국해 ‘차 표 한장’ ‘유행가’ 등의 히트곡을 내며 트로트 4대 천왕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2010년대엔 또 그의 삶에서 해가 졌다. 2013년 아내의 부동산 등의 투자 실패로 사기 혐의에 휩싸인 것이다.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 500억원대 재산이 은행 등에 넘어갔고 280억원 대의 빚을 지기도 했다. 이후 고령의 나이에도 행사장 등을 누비며 변제했다.

독립유공자의 후손이기도 한 송대관은 가수들의 권익과 위상 정립을 위해서도 앞장섰다. 가수 남진에 이어 2008년 대한가수협회 2대 회장에 취임했다.

송대관은 컨디션 난조로 최근 병원을 찾았다가 치료 도중 심장마비로 지난 7일 별세했다. 빈소엔 이날 영결식에 참석한 가수들 뿐 아니라 수많은 이들이 조문을 왔다. 유인촌 문화체육부 장관을 비롯 나훈아, 조용필, 임영웅 등의 스타 가수들과 방송인 김구라 등이 빈소에 조화를 보냈다.

고인은 눈을 김기 직전까지 행사는 물론 방송 출연도 활발히 해왔다. 생전 고인의 마지막 모습이 KBS 1TV ‘전국노래자랑’을 통해 방송된다. 오는 16일 충남 당진시 편, 오는 3월2일 서울 영등포구 편이 공개된다.

고인은 서울추모공원에서 영원히 잠들게 된다.
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