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 광주로 세상 걸어갈 길 찾게 됐다"
  • 페이스북
  • 유튜브
  • 네이버
  • 인스타그램
  • 카카오플러스
검색 입력폼
"오월 광주로 세상 걸어갈 길 찾게 됐다"
[신간]나는 하느님을 보았다
김준태│생명과문학│1만5000원
  • 입력 : 2024. 12.19(목) 18:11
  • 박찬 기자 chan.park@jnilbo.com
김준태 시인이 지난 18일 광주 동구에서 열린 시집 ‘나는 하느님을 보았다’ 발간 기자간담회에서 작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박찬 기자
김준태 시인에게 광주 5·18은 전쟁이었다. 1980년 5월 옛 전남도청에서 계엄군들의 총기에서 발사된 수많은 탄약과 그 탄약에 목숨을 잃어간 이들을 지켜본 건 그가 참전했던 베트남전쟁에서 목격한 참담한 실상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월 광주를 통해 세상을 걸어갈 길을 찾게 됐다. 그 길은 희망이었고 사랑이었다.”

시집 ‘나는 하느님을 보았다’ 복간을 맞아 지난 18일 광주 동구 금남로에서 기자간담회를 가진 그는 5·18이 그에게 어떤 의미냐는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김 시인은 ‘오월시인’으로도 불린다. 1980년 6월2일 당시 전남매일신문 1면에 실린 그의 시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는 동료 교사 부인이었던 임신부 최미애씨의 죽음을 정면으로 다룬다. 계엄군 검열관들은 105행짜리 시를 33행으로 축약했고 제목도 ‘아아, 광주여!’로 줄였다. 이 시는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가 해외에도 오월 광주의 참상을 알리는 데 일조했다.

그는 광주 5·18 이듬해인 1981년 10월 시집 ‘나는 하느님을 보았다’를 펴냈다. 1980년 5월부터 1981년 5월까지 썼던 시들을 묶은 것이다.

다시 펴낸 이번 시집에는 영적 체험과 역사적 체험을 분리하지 않고 내재된 하늘과 일체를 노래하며 민중의 한을 풀어낸 시들이 담겼다. 특히 시와 인간, 세계와 생명을 유기적 관계로 풀어내 문학사적 의미가 큰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시 ‘지리산 여자’는 실제 그가 지리산을 탐방하며 쓴 작품이다. 한국전쟁 당시 한 처녀가 지리산 초동리에 사는 산신령을 만나 수많은 아이를 잉태하는 이야기를 주제로 한다. 이는 당시 희생자들을 위한 위로이며 우리 민족에 대한 희망을 상징한다.

그는 시의 배경을 ‘지리산’이 아닌 ‘무등산’으로 하려고 했지만, ‘무등산’을 넣으면 책이 출간되지 않았던 일종의 불문율 때문에 ‘지리산’을 선택한 것이라고 회고했다.

그의 시집이 복간되는 데 43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김 시인에게 “아, 나는 하느님을 보았다!”라고 다시 말하는 건 두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결국 복간을 결심한 그는 이번 시집이 크리스마스를 목전에 두고 독자들에게 선물이자 국가가 혼란스러운 상황에 건네는 작은 위로가 되길 희망했다.

김 시인은 “인간의 몸속에는 이 세상의 모든 종교가 다 들어있고 수천년의 DNA가 흐른다. 작품 제목에 나온 ‘하느님’이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존재”라며 “‘신은 죽었다’, ‘신은 없다’ 등의 표현은 ‘인간의 잔혹함이 신을 죽였다’, ‘너의 눈에는 신이 안 보이니 신을 보려고 노력하라’는 역설법”이라고 강조했다.

생이지지(生而知之)를 예로 들며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을 배우고 태어난다는 것이 김 시인의 믿음이다.

그러면서 이달 일어날 12·3 내란사태에 대해 “하느님이 지난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난 현실을 현재 서울의 시민들이 목격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라며 “하지만 광주의 오월을 겪었던 우리에게 계엄은 ‘두려움’보단 ‘용기’를 줬다”고 말했다.

김 시인은 1948년 해남에서 태어났다. 1969년 신춘문예에 당선돼 문단에 데뷔했고 이후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군사정권 시절, 저항시를 신문에 게재한 이유로 강제 해직당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전남일보와 광주매일신문에서 데스크를 맡았고 광주대학교, 조선대학교에서 초빙교수를 지낸 뒤 5·18기념재단이사장을 역임했다. 현재는 광주 동구에 자리한 전일빌딩245 3층 디지털 도서관에서 시 쓰기와 번역 작업 등을 활발히 하고 있다.

나는 하느님을 보았다
박찬 기자 chan.park@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