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도철 국장 |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 등 이른바 삼사(三司)라 불리는 상설 기관을 조정에 두어 임금의 국정운영이나 정책에 대해 간쟁과 감찰, 자문을 했으며, 사대부들은 공론을 살펴 국정에 알리는 상소(上疏)를 무시로 올렸다.
학자들에 따르면 조선왕조 500년간 관료와 학자, 유생들이 올린 상소가 수만 건에 이른다고 하니 나름 언로가 트여 민소(民訴)제도가 활발했던 것이 분명하다.
상소는 국민들이 언론이나 국민동의청원 등 여러 수단으로 국가 정책에 민의를 알리는 지금의 제도처럼, 조선시대에 국책과 운영에 대한 의견을 임금에게 개진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로 기능했다.
조선의 지배계층은 하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정치라 생각했다. 하늘의 뜻 ‘천심’은 대중들의 마음이 모인 것이라 여겼고, 대중들의 마음이 모여 형성된 ‘공론’을 살펴 정치에 반영하는 것은 임금의 기본적인 책무였다.
하여 상소는 집권층이 공론을 듣는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생각했고, 임금도 가전상언과 격쟁, 상소에 귀 기울여 국정에 반영하려 애를 썼다.
상소는 관리들이 올리는 보고서인 장계(狀啓)와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도록 밀봉해 올리는 봉장(封章), 여러 사람이 연명해 올리는 만인소(萬人疏) 등이 있었다.
게중 가장 강력한 상소는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결의로 올리는 지부상소(持斧上疏)다. 도끼를 들고 대궐 문밖에 나가 임금에게 올리는 상소를 말한다.
우리 역사에 ‘내 말이 틀리다면 내 목을 쳐 죽여 달라’는 뜻으로 올리는 지부상소가 몇 차례 있었다.
1591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나라를 칠 테니 길을 빌려달라고 요구하자, 대궐 밖에서 사흘 동안 엎드려 일본 사신의 목을 베라고 청했던 조헌(趙憲)의 ‘지부상소’, 병자수호조약 체결을 죽음으로 반대한다는 최익현(崔益鉉)의 ‘병자지부상소’가 대표적이다.
세상을 살리는 곧은 목소리, 상소는 그 특성상 임금에 대한 충고와 정책에 대한 비판이 담기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그 내용을 문제삼아 상소자를 처벌하는 것은 자제했다. 상소를 통한 사회문제 제기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나라 꼴이 갈수록 험하다. 권력의 최상층부와 그 주변을 둘러싼 그치지 않은 온갖 잡음으로 소란하기 그지없다. 국정지지도 17%의 초라한 성적표가 웅변하듯 정치는 오간 데 없고 정부는 신뢰를 잃었다.
지부(持斧)까지는 아닐지라도 나라를 위해 직을 걸고 극간하는 사람들이 그렇게도 없었을까. 직언을 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전제왕조도 아닌 법치국가인데 말이다. 음울한 먹구름이 언제나 걷힐는지 안타깝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