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환 논설실장 |
입추가 가을의 문턱이라면, 처서(處暑)는 가을의 시작이다. ‘농가월령가’ 중 처서가 낀 ‘7월령’도 성큼 다가온 가을의 분위기가 멋지고 실감 난다. “칠월이라 맹추되니 입추 처서 절기로다/화성은 서쪽으로 흐르고 미성은 중천이라/늦더위 있다 한들 계절을 속일 소냐/빗소리도 가볍고 바람 끝도 다르도다.” 앞으로 더위가 있다 한들 가을을 시샘하는 잔서일 뿐,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고, 이슬이 내리고, 쓰르라미가 울어 대는 가을이 이미 시작됐다는 선인들의 여유로움이 싱그럽다.
소설가 정비석은 처서부터 시작되는 가을을 ‘서글픈 계절’이라고 했다. 수필 ‘들국화’에서는 “가을빛과 가을 소리치고 어느 하나 서글프고 애달프지 아니한 것이 없다.”고 했다. 흔히 ‘열매의 계절’이니 ‘수확의 계절’이니 하지만 가을은 역시 서글프고 애달픈 계절이라는 것이 작가의 설명이다. ‘깊은 밤 귀뚜라미 소리에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것이 불현듯 그리워지고, 가을 볕이 포근히 내리비치는 신작로만 바라보아도, 정처 없는 먼 길을 떠나 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되는 것도 역시 가을이 주는 외롭고 서글픈 때문’이라는 글귀에도 무한한 그의 가을 사랑이 담겨있다.
22일은 가을이 시작된다는 처서였다. 아직은 열대야에 삼복 더위가 기승이고 불볕이나 가마솥도 부족해 ‘역대급’이나 ‘살인적’ 같은 수식어가 일상이 된 날씨지만 , 그래도 선인들의 말처럼 ‘입추는 배신해도 처서는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정비석은 ‘들국화’에서 “봄은 사람의 기분을 방탕에 흐르게 하고, 여름은 사람의 활동을 게으르게 하고, 겨울은 사람의 마음을 음침하게 하건만, 가을만은 사람의 생각을 깨끗하게 한다.”고 했다. 이미 우리 곁에 다가온 가을, 오곡백과를 영글게 하는 마지막 햇볕과 아침 저녁 제법 선선해진 가을 바람을 맞으며 깨끗한 생각으로 가을을 준비할 때다.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