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손학규 민주통합당 대표, 고 조영래 변호사와 함께 ‘서울대 운동권 3총사’로 불렸다. 1971년 서울대 내란 음모 사건, 1974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수배됐고 1983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초대 의장을 역임했다. 전두환 정권이 민청련을 이적단체로 규정하면서 김 상임고문은 1985년 9월 안기부 남영동 분실로 끌려간다. 그곳에서 그는 ‘고문 기술자’ 이근안 전 경감에게 23일 동안 전기고문과 물고문 등을 당했다. 매일 5시간 동안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한 그는 말과 행동이 어눌해지는 파킨슨병을 앓게 됐다.
회복할 수 없는 병을 얻었지만 민주화를 위한 그의 투쟁은 멈추지 않았다. 2008년 미국 쇠고기 완전수입 반대,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사태 등을 해결하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정치권에 입문한 그는 노무현 정부 시절 주택 분양원가 공개 방침을 번복한 노 대통령에게 “계급장을 떼고 제대로 논쟁하자”고 요구했고, 2007년 한미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해서도 “FTA를 통과시키려면 나를 밟고 가라”고 반발하기도 했다. 그는 2011년 12월 30일 고문의 후유증을 이겨내지 못하고 타계했다. 향년 64세. 그는 전태일 열사, 문익환 목사, 박종철 열사 등 민주화·노동운동가들이 묻힌 모란공원에 잠들어 있다.
영면에 들어간 그가 대한민국이 혼란에 빠진 2024년 소환됐다. 그를 정치적 스승으로 모신 우원식 국회의장이 김 전 상임고문의 유품인 ‘연두색 넥타이’를 착용하면서다. 12·3 비상계엄 사태 당시 우 의장은 다음 날 새벽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 표결, 14일 탄핵안 표결을 이끌어 냈다. 그는 양일 모두 연두색 넥타이를 맸다. 우 의장은 SNS에 “이 넥타이는 제가 큰 결정을 해야 할 때 꼭 매던 것”이라고 했다. 고문을 이겨내며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지켜나갔던 민주주의자인 김근태는 잠들었다. 2024년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후퇴하려는 순간, “선배”라 부르며 그를 따랐던 후배 정치인들이 이제 그를 대신해 민주주의를 지켜나가고 있어 천만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