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 윤여정 나주문화원장 "일제시대 영산포 시대사 조명 자료 확인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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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시
[전남일보] 윤여정 나주문화원장 "일제시대 영산포 시대사 조명 자료 확인 했다"
1916년 발간 영산포발전지 책자 확보
당시 이민 온 일본인 거주자들 많아
  • 입력 : 2024. 01.07(일) 11:58
  • 나주=조대봉·박송엽 기자
1910년 일제가 나주 영산포에 배가 드나들 수 있도록 설치한 ‘개폐식 목교’. 멀리 가야산이 보인다. 윤여정 나주문화원장 제공
윤여정 나주문화원장
107년 전 나주 영산포(榮山浦)는 일본인이 건설한 신도시였고 당시 영산포 거주 인구는 일본인이 조선인보다 많았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확인됐다.

그동안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지던 일제강점기 당시 조성된 영산포라는 도시에 얽힌 구체적인 실체가 드러났다.

영산포 근대사를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책자 자료가 20여년 간 이어진 윤여정 나주문화원장의 추적 끝에 세상에 빛을 보게 되면서다.

윤 원장이 확보한 서적은 일제강점기인 1916년 3월에 발간된 ‘영산포발전지(榮山浦發展誌)’라는 책이다.

추원화산(秋元華山)이 저술하고 추원춘정(秋元春貞)이 편찬해 하야희삼랑(河野喜三郞)이 발행한 영산포와 관련된 모든 정보가 담긴 총서(叢書)로 평가받는다.

그동안 이 책은 우리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당시 비매품으로 발간돼 보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윤 원장은 이 책을 찾게 된 경위를 밝히면서 “참 운이 좋았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7일 나주문화원에 따르면 윤 원장이 ‘영산포발전지’에 대한 추적을 하게 된 사연은 이렇다.

그는 20여 년 전부터 일제강점기 신문자료를 검색하며 나주 관련 기사를 정리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그러던 중 1924년 11월 6일자 조선신문(朝鮮新聞)에 ‘영산포발전지 간행’이라는 기사를 접한 후 이 책에 대한 행방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국내 어느 곳에서도 그 이상의 정보를 얻을 수는 없었다.

윤 원장은 지난 10월 일본 도서 관련 검색창을 활성화하다가 ‘영산포발전지’라는 책을 일본 국립정보학연구소(國立情報學硏究所)에서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

이 책자가 1924년 간행된 ‘영산포발전지’가 아니라 그보다 8년 앞선 1916년 3월 간행된 또 다른 ‘영산포발전지’라는 사실이었다.

윤 원장이 파악한 결과 1924년 간행된 영산포발전지는 그해 11월 조선신문 특파원 출구준야(出口俊也)가 펴낸 책이었다.

20여년 추적 끝에 발견한 영산포발전지는 이보다 앞서 1916년 3월 추원화산(秋元華山)이 저술하고 추원춘정(秋元春貞)이 편찬해 당시 영산포상공회 회장이던 하야희삼랑(河野喜三郞)이 발행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윤 원장이 찾아낸 ‘영산포발전지’는 제1장 연혁(沿革)을 시작으로 제20장 영산포의 취미계까지 총 20장 133면으로 구성돼 있다.

영산포 관련 사진 14장과 인물사진 2장이 실려 있는데 대부분 처음 공개되는 사진이라는 점에서 일제감점기 영산포 시대사를 조명하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윤 원장은 “영산포발전지를 살펴보면 영산포가 일본인이 건설한 신도시였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 많다”고 설명했다.

영산포발전지에 기록된 1915년 12월 말 현재 영산포 호구수는 403호에 내지인(內地人·일본인)은 259호, 조선인은 136호였다.

1949명 거주자 중 일본인이 1095명 조선인은 826명으로 당시 일본인 거주자가 조선인보다 더 많았음을 알 수 있었다.

“이는 영산포가 일본인들에 의해 새롭게 건설된 당시 식민지 신도시였음을 방증한다”고 윤 원장은 분석했다.

이 책에는 당시 조선으로 이민 온 일본인들의 출신지가 고장별로 기록돼 있다.

복강(福岡·후쿠오카) 출신이 209명으로 제일 많았고 다음은 산구(山口·야마구찌), 장기(長崎·나가사끼), 강산(岡山·오까야마) 출신들이 대부분을 차지했음을 알 수 있었다.

학교, 종교시설, 기관단체 소개와 함께 영산포우편소나 영산포상공회는 규약 등을 포함해 설명을 덧붙여 기록했다.

근대화된 통신을 총괄했던 영산포우편소는 1904년 문을 열었고 집배구역은 3개 구역에 전신·전보는 1907년 2월1일, 전화는 1908년 4월 1일에 개통된 사실도 전하고 있다.

일본인 가주자가 많았던 영산포에 이들이 만든 ‘영산포 일본인회’가 1904년 12명으로 협화회(協和會)라는 조직으로 처음 출발한 사실이 실려 있고 이 단체가 1905년 8월 150명으로 늘자 ‘일본인회’라는 명칭으로 출발했다는 사실도 담겨 있다.

윤여정 문화원장은 “비록 표지는 없어졌지만 인쇄본으로 상태가 양호하기 때문에 충분한 검증과 교차 확인 등을 거친 후 번역 작업을 해 당시 영산포 시대 상황을 연구할 수 있는 자료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나주문화원에선 지난 2022년 1945년 이전 남평에서 거주했던 일본인 남평심상소학교 출신들의 기록인 ‘남평시대(南平時代)’를 발굴해 번역 간행했다.

향후 영산포 또 다른 일본인(佐堀伸三) 기록인 ‘영산포에서 일본인 거리 형성’과 ‘영산강 하류지역의 문화’ 1910년 10월 남평군수가 작성한 ‘조선전라남도 남평군 상세일반(朝鮮全羅南道南平郡狀勢一般)’이라는 자료를 연차적으로 번역 간행함으로써 나주 근대역사 빈 공간을 메우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영산포는 전국 유일 내륙항구로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1960년대까지 생선과 젓갈, 소금 등을 실은 각종 선박 왕래가 잦았다. 내륙 항구로 바다와 연결된 영산강 뱃길의 끝이자 시작점인 영산포구는 소금·젓갈 등을 싣고 들어오는 배와 쌀·가마니·면화 등을 싣고 떠나는 배로 호황기를 누렸다.

1897년 목포항이 일제에 의해 개항되면서 영산포는 일본인 진출이 가장 활발한 지역으로 번성했고 전남의 새로운 경제중심지로 성장했다. 영산포에는 식민지 토지수탈을 위해 일제가 만든 동양척식주식회사 영산포 지점을 비롯해 조선식산은행 영산포지점, 당시 최대규모 농지를 소유한 일본인 대지주 구로즈미 이타로(黑住猪太郞)의 저택이 남아 있다.
나주=조대봉·박송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