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푸치니 박물관 앞에 설치된 푸치니 동상. |
길을 걷다 보면 이탈리아 오페라 작곡가 푸치니나 그가 쓴 작품의 이름의 간판을 볼 수 있다. 주로 유명 레스토랑이나 음악 학원, 또는 고급스러움을 상징하는 간판으로 자주 쓰이는데 그러기에 푸치니는 다른 작곡가들 보다 우리에게 더욱 친근하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작품들이 유난히 후대까지 사랑받는 이유는 높은 완성도의 대본과 수려하고 완벽하다 할 수 있는 음악 구조를 그 이유라 들 수 있다. 그래서인지 지금까지 관객들에게 특별한 사랑을 받는 주요 작품들은 뮤지컬로도 제작되어 새로운 모습으로 세상을 호령하기까지 한다. 푸치니의 오페라는 20세기에 제작된 가장 화려하고 흥미진진한 대형 공연예술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푸치니는 평소 자동차를 좋아했다. 자동차를 타고 포즈를 취한 푸치니. 출처 이탈리아 푸치니 페스티벌 공식 홈페이지 |
2024년 가장 주목받는 음악가로서 올해 서거 100주년을 맞이하는 푸치니(Giacomo Puccini, 1858-1924)에 관한 다양한 공연이 세계 곳곳에서 열릴 것으로 예상된다. 20세기 최고의 오페라 작곡가로 추앙받는 그는 66년간의 삶 동안 우리에게 잘 알려진 <라 보엠- La Boheme 1895>, <토스카-Tosca 1896>, <나비부인-Madama Butterfly 1903>을 비롯한 12편의 오페라를 작곡했다. 다른 여타 작곡가보다 많은 작품을 쓰지는 못했지만, 당시 예술계의 최고의 흥행사였던 푸치니는 작품마다 소재를 비롯해 대본, 여타 모든 사항까지 작품의 성공을 위해 꼼꼼히 체크하고 관여하여 매번 최고의 흥행 기록을 기록하는 명작들을 제작하였다. 그의 작품들은 유난히 제작과정에 있어서 높은 완성도를 이루기 위해 많은 대본가들과 제작자와 지휘자들과의 갈등은 많은 뒷이야기를 낳았으며, 당시 슈퍼스타였던 푸치니는 수많은 스캔들의 중심에 서 있기도 했다.
당시 최고의 유행을 선도하는 대스타 푸치니를 기록한 사진에는 그를 멋진 콧수염과 담배나 파이프를 물고 있는 도도한 멋쟁이로 그리고 있다. 특히 미지의 새로운 세계와 문명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그는 당시 인류가 만든 최고의 발명품인 자동차를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푸치니와 그에게 음악적 영감을 주었던 그의 여인들 또는, 유별나게 푸치니의 행동에 의부증을 표출하며 각종 가십거리를 생산한 푸치니의 아내 엘비라와의 관계는 지금 파파라치들의 가십거리 상대처럼 항상 언론의 조명을 받아왔다. 그의 작품과 스캔들, 그리고 대 히트작을 만들며 그에게 조력과 갈등 관계에 있었던 모든 것들은 영화로 기사나 책으로 만들어져 세계인의 푸치니에 관한 궁금증을 해소하거나 아니면 더 확산시키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푸치니가 거주했던 토레 델 라고 별장 앞의 호수 전경. |
2024년은 푸치니의 해이다. 올 한 해 세계인들은 푸치니의 홍수 속에 살 것으로 예상된다. 그래서 필자는 ‘푸치니의 생애’, ‘푸치니의 여인’, ‘푸치니의 조력자 일리사와 자코사’, ‘푸치니와 토스카니니’, ‘푸치니와 파시즘’, ‘푸치니와 페미니즘’이라는 내용으로 푸치니를 들여다볼 것이다. 그리고 화제 속에 지구촌에서 올려지는 푸치니의 작품 중심으로 올 한해를 이끌어갈 예정이다.
애연가 였던 푸치니의 1908년의 모습. 출처 위키피디아 |
필자는 이탈리아 유학 시절 그의 완성된 마지막 오페라인 <삼부작- Il Trittico>를 보고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이탈리아의 신성 단테의 <신곡>에서 아이디어를 발췌한 이 작품은 나에게 수많은 영감을 주었으며, 훗날 푸치니 연구의 시작하는 촉매제 역할을 하였다. 푸치니를 향한 저자의 애정은 푸치니의 고향인 루까(Lucca)를 방문하고 그의 작품과 여러 자료를 수집하는 계기가 되었다.
푸치니는 1858년 12월 22일 이탈리아 중부지방인 문화의 중심지 루까(Lucca)에서 150여 년 동안 작곡가, 지휘자 및 오르간 주자로 활동했던 음악가 가계의 5대손으로 태어났다. ‘예술의 도시’(Citta d‘arte)로 알려진 루까는 푸치니 외에도 작곡가 알프레도 카탈라니(Alfredo Catalani, 1854-1593)와 루이지 로돌포 보케리니(Luigi Rodolfo Boccherini, 1743-1805)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피아노 앞의 푸치니 모습. 출처 thetimes.co.uk |
푸치니는 18세 때 베르디(Giuseppe Verdi, 1814-1901)의 오페라〈아이다-Aida, 1871>를 보고 감동하여 오페라 작곡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어머니의 헌신적인 배려로 큰삼촌 체르우(Nicolao Ceru)의 후원과 마르게리타 여왕의 장학금을 수혜하며 1880년 밀라노의 베르디 음악원에 입학하게 되었다. 가난하여 보헤미안적 삶을 살았던 푸치니는 당대 최고의 사실주의 오페라 작곡가 중 한 사람인 폰키엘리(Amilcare Ponchielli 1834-1886)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오페라 작곡가로의 꿈을 키워나갔다. 이후 스승 폰키엘리의 조력으로 올릴 수 있게 된 <요정 빌리, Le Villi, 1884>가 주목을 받으며 당시 음악계에서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리꼬르디 출판사의 준 전속 작곡가가 되었고, 줄리오 리꼬르디(Giulio Ricordi, 1840-1912) 사장은 그의 재능에 깊이 감동하여 이후 후원자 겸 상담자 역할을 하였다. 푸치니는 <에드가르, Edgar, 1889>의 실패를 통해 대본의 중요성을 깨닫고 심기일전하여 만든 후속작인 <마농 레스꼬, Manon Lescaut, 1893> 성공을 통하여 주목받는 이탈리아 오페라 작곡가의 탄생을 알리게 되었다. 이후 우리에게도 너무나 잘 알려진 <라 보엠>, <나비부인>, <토스카>를 연달아 성공하며 베르디 이후 최고의 이탈리아 오페라 작곡가 반열에 오르며, 계속해서 그의 신화를 써 내려갔다. 당시 이국적인 소재였던 오페라 <나비부인> 이후 미국의 서부를 배경으로 하는 <서부의 아가씨, La Fanciulla del West, 1910>, 그의 마지막 완성된 오페라 <삼부작>과 그가 심혈을 기울였던 대작이며, 푸치니의 제자 알파노에 의해 완성된 중국의 전설을 소재로 한 <투란도트, Turandot, 1926>를 마지막으로 그의 전설은 멈추었다. 하지만 푸치니가 만든 12편의 오페라를 통해 우리는 지금도 그의 전설을 만나고 있다. 특별했던 그의 오페라는 수많은 세계인의 가슴속에서 감동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우리에게 카타르시스를 전해주고 있다. 푸치니의 수려한 선율과 함께 우리에게 그를 사랑 할수밖에 없는 그의 오페라는 2024년 올해 서거 100주년을 기념하여 우리를 설레게 할 것이다. 최철 조선대 초빙교수·문화학박사
푸치니가 전성기 시절에 거주하며 작품을 썼던 토레 델 라고 호수. 출처 푸치니 페스티벌 공식 사이트 |
푸치니(Giacomo Puccini) : 이탈리아의 작곡가로 베르디 이후 이탈리아가 낳은 가장 위대한 오페라 작곡가로 평가받는다. 1858년 12월 토스카나 대공국 루카(현재 이탈리아 토스카나 주 루카)에서 태어났으며, 1924년 11월(향년 65세) 벨기에 브뤼셀에서 사망했다. 푸치니는 로시니에서 베르디로 이어지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계보를 잇는 작곡가로서 낭만주의 시대 이탈리아 오페라를 완결하고 현대 이탈리아 오페라로 나아가는 길을 연 음악가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