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우크라이나 전쟁과 고려인>우크라, 골로도모르를 제노사이드로 설정 정치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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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전쟁과 고려인
[전남일보]우크라이나 전쟁과 고려인>우크라, 골로도모르를 제노사이드로 설정 정치화
(24)우크라이나의 골로도모르(대기근)
민족국가 건설과정 민족 정체성
형성 위한 수단으로 사용 의도
우크라 민족주의자들 기반 강화
심리적 반러시아 압력 수위 높여
정체성 정치 큰 틀 속서 이뤄져
러시아와의 공동 과거 존재 지워
  • 입력 : 2023. 12.14(목) 14:47
소련 당국이 우크라이나 마을에서 곡물을 조달하는 모습.사진 출처: 블라디미르 민케비치
소련 해체 후 우크라이나는 민족국가 건설과정에서 자신의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이 과정에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우크라이나 사회에서 러시아 세계에 대한 적대감을 불러일으키는 심리적 반러시아 압력의 수위를 더욱 높이고 있고, 단기간에 독립된 우크라이나의 친러시아적 사회적 기반은 완전히 침식되었다. 현재 우크라이나 세대에게 러시아와의 공동 과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특히 우크라이나의 러시아 혐오는 새로운 현상이 아니고 우크라이나 전쟁 이전부터 매우 심각한 상태다. 러시아 혐오로 대표적인 것으로 1932~1933년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한 골로도모르 사건을 들 수 있다.

골라도모르(голодомор)는 기아 또는 기근과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으며 이 개념 속에는 우크라이나인들의 기아 대학살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이 사건은 소련 지도자들의 지시로 우크라이나 당 지도부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우크라이나를 비롯하여 소련의 구성 국가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가져다주었다. 우크라이나 인구학 연구소는 기아의 희생 사망자가 3백 50만 명이 된다는 내용을 발표했다.

골라도모르가 시작되기 전 1929~1930년에 소련에서 강제 농업 집단화가 진행되었다. 이로 인해 농촌에서는 불만이 상승하였고 이러한 현상은 전국에서 관찰되었다. 농민들은 집단 농장에서 일하는 것을 거부하였고, 지역 당국은 농민을 처벌하였다.

1930~1932년 집단화 시기 동안 반콜호즈 봉기 진압과 억압의 결과로 10만 명 이상이 사망하였다. 1930~1940년에 특별이주로 인한 사망자가 180만 명~210만 명이 사망하였다. 여기에는 당국의 특별이주지역에서 반문명의 삶의 조건, 노역의 결과와 도망가다가 사망한 숫자가 포함되었다. 1930~1933년 동안 반혁명 범죄 혐의로 35,734명이 총살형을 당하였다.

전 영국 총리의 자문관 가레트 존스는 1933년 봄의 대기아 주요 원인으로 농업의 집단화를 들었다. 이로 인해 농민 2/3 이상이 토지를 압수당하면서 그들의 노동에 대한 동기들이 박탈되었다. 이외에도 1932년 농민들은 사실상 수확물 전체를 강제로 압수당하였다. 희망이 없어지자 농민들은 콜호즈(집단 농장)의 가축들을 대량 도살되었고, 사료의 부족으로 많은 말들이 죽었고 전염병, 추위와 먹이 부족으로 모든 지역의 가축 수는 크게 감소되었다. 쿨락(부농 계층)과의 투쟁 과정에서 6~7백만 명의 질 좋은 노동자들이 쿨락의 토지에서 내쫓게 되었으며 이것은 국가의 잠재 노동에 타격을 주게 되었다. 세계 주요 수출 품목(목재, 곡물, 석유 식용유 등) 가격의 하락하였지만 곡물 수출은 증가하게 되었다. 소련은 집단화 시기 초기에 농업 위기를 가져왔으며 1932~1933년 기아를 가져오는 상황에 영향을 주었다.

특히 소련에서는 강제 농업 집단화로 곡물 등 농업 생산이 많이 감소하였으나 곡물 조달 계획은 증가하였다. 1930년에 우크라이나는 주로 국가의 곡물 수출을 담당하였으며 7백 70만 톤을 수출하였다. 우크라이나는 1931년에 다시 계획이 7백 70만 톤이 되었지만, 이 당시 곡식의 수확이 5백만 톤까지 감소되었다.

소련에서는 산업화의 관계로 농산물 수출을 해야 했다. 당시 소련 지도부는 어떠한 방법이라도 도시에서 곡물과 노동력의 공급을 안전하게 보장하고 산업의 발전을 가속화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930년대 우크라이나에는 강력한 산업을 이루려고 노력하였다. 정부는 필요한 장비와 기술도입에 필요한 업계의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외국 통화가 필요하였는데 주요 외화 수입의 원천은 곡물이었다. 서구에서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초반의 대공황은 가격 붕괴를 가져왔으며, 기존 수준의 외국 통화를 위해서는 경제 위기 이전에 수출하는 것보다 최소한 두 배나 많은 곡물 수출이 필요했다. 이것은 농민에게는 고통이었으며 사회적 계급적 대립을 가져왔다.

우크라이나 마을에서는 정부의 조달 계획에 따라 모든 곡물이 압수당하였다. 마을은 곡물 조달에 사보타지로 응답하였다. 농민들은 곡물을 계산하여 적시에 구덩이에 감추었다. 그러나 당국은 그들의 구덩이를 강제로 열게 했으며, 압수된 곡물은 배고픔에 고통 받고 있는 도시로 보내졌다. 이처럼 공급의 실패는 가장 심각한 방식에 의해 징벌 되었다. 그것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시행된 강제 조치였다.

모든 식품이 압수당하여 그 어디에도 전혀 곡물이 없게 되었다. 그리고 집단화 이전에 이미 가축의 대학살로 육류 계획은 10~12%만 달성하였다. 육류는 중앙의 큰 지역으로 보내졌고 농촌 지역에는 육류 제품이 없게 되었다. 식량의 부족으로 농민 가족들은 새 수확기까지 살 수 없게 되었다. 1932년 초에 기근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남부 쿠반의 전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우크라이나 공산당의 지도자들은 스탈린에게 곡물 계획을 그만두라는 요청을 거듭 호소했다지만 그는 양보하지 않았다.

식량 문제가 어려워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볼셰비키들은 농촌 정책을 변경하지 않았다. 1932년 우크라이나의 곡물 조달은 검색, 벌금, 억압으로 이루어졌다. 결과적으로 이미 10월에 공화국에 기아가 시작되었으며 1933년 말까지 맹위를 떨치는 기아가 계속되었다.

1933년 6월 27일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비서 하타예비치는 스탈린에게 전보를 보내 곡식 지원을 요청했지만, 결과는 곡식 도움을 받지 못하였다. 그리고 1932년 8월에 집단 농장 재산의 절도에 대한 ‘5개의 쇠막대기 법’이라고 불리는 사형 법을 도입했다. 1933년 초 약 5개월 동안 이 법률에 따라 54,645명이 유죄를 선고받았으며, 이중에 2,110명이 사형을 선고받았다.

기아로 인한 대규모 죽음은 1933년 3월 초에 발생하였다. 골라도모르는 우크라이나에서 기근이 농민의 어린이들 세대를 살상하고 육체적?정신적인 불구로 만들었다. 어린이들은 주민 중에서 보다 잘 보호되지 못하고 가장 많은 상처를 받았다. 아이들은 굶주림, 질병으로 죽어갔고 인육의 희생자가 되었다. 소련 합동 국가보안부가 1933년 4월 15일까지 집계한 바에 의하면, 인육을 먹는 경우도 2천 5백 명이나 되었다고 하였다. 폴타바 지역에 모인 약 550명의 증인은 어린이 인육을 먹었던 경우에 대해 말하였다. 크레멘축과 폴타바 시장에서는 인육을 팔기도 하였다. 기아가 이러한 인간들의 광기를 초래한 것이었다.

인육을 먹는 경우의 광기는 여러 형태로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자신의 아이를 먹여 살리지 못한 이성을 잃은 여성, 자신을 보호할 힘이 없었던 가장 어리고 약한 이웃 어린이가 희생되었다. 이러한 광기는 종종 집 주위에서 먹을 것을 찾고 있는 어린이 고아가 대상이 되기도 했다. 기아에 굶주린 사람들은 가끔 사체를 파내어 먹기도 하였다. 가장 무서운 것은 사람을 사냥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현상은 특히 어린이들에게 인간적인 깊은 상처를 남겼다. 살아남은 어린이들은 영구히 정신적으로 불구가 되기도 했다. 1932~1933년 우크라이나에서 희생자 전체 숫자의 약 40% 정도가 어린이인데, 폴타바의 어린이의 사망률 수준은 66%였다.

기아는 1934년 초에야 해결될 수 있었다. 1933년 3월에 기근의 발생에 대한 범인으로 토지 인민위원들을 상대로 법적 절차가 있었다. ‘계획된 살인’의 진짜 범인들로 지목된 사람들은 처벌되지 않았다.

문제는 골라도모르에 대한 시각이 우크라이나, 러시아와 국제사회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1932~1933년 소련에 있었던 골라도모르를 인종 학살로 인식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지도자들은 의식적으로 기아가 ‘우크라이나의 홀로코스트’라고 말하며 기아 희생자의 추모를 정치적 시위로 만들어 가고 있으며 이 모든 것들은 의심할 것도 없이 러시아를 목표로 삼고 있다. 골라도모르는 소련 당국의 냉철한 계획으로 이루어졌다는 가능성 아래 현재 많은 도시에서 기아 희생자 추모비를 건립하고 있다. 골라도모르 희생자 추모 기념의 날은 1998년 11월 마지막 토요일에 쿠치마 대통령에 의해 선포되었으며, 2000년부터 이날은 골라도모르 희생자 추모와 정치적인 탄압의 날이 되었다. 2006년에 ‘우크라이나에서 1932~1933년의 골로도모르에 관한’ 법률은 골로도모르를 우크라이나 민족의 대량 학살로 인정했다. 유셴코 대통령은 골라도모르는 스탈린 정권에 의한 ‘테러행위’와 ‘악마의 행동’이라 부르며 역사적인 기억이 필요하며, 전 세계로부터 이를 대량 학살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부가 발행한 ‘기억의 책’에는 기아에 사망한 1백만 이상의 우크라이나 시민들의 이름이 기재되었다. 우크라이나 학교에서 ‘골라도모르 수업’이 진행된다. 개인적으로 유셴코 대통령이 기아를 대학살로 인정하는 국제적 인정을 받기 위해 자신의 중요한 정치적 프로그램으로 유도했었다.

반면에 러시아는 골라도모르에 대한 우크라이나의 주장하는 인종 학살(제노사이드)이라는 개념에 찬성하지 않고 있다. 러시아는 이 시기의 기아는 국가의 농업 붕괴가 기아를 농민들에게 가져다주었으며, 반인간적인 범죄적인 조치로 확실히 스탈린 정권의 반농민적 정책의 실패 결과라고 보고 있다. 기아는 사전에 계획된 것은 아니며 우크라이나 국민을 대학살 한 적이 없었으며, 당시 소련 지도부의 잘못을 통해서 우크라이나, 러시아와 다른 나라 국민의 공통 비극이었다는 것이다.

러시아 국제위원회는 1932~1933년 우크라이나 골로도모르에 대해 조사에서 목격자, 학자의 의견을 제출한 아카이브 등 모든 서류를 검토한 결과, 소련 정책의 성공을 보장할 목적으로 우크라이나에서 골로도모르를 고의로 계획하고 실행했다는 사실을 확인하지 못한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1930년대 기아에서 살아남은 역사학자 니콜라이 이브니츠키도 골라도모르에 대해 소련 전체 국민에 해당된 행위였지, 우크라이나 민족만을 대학살한 것이 아니었다고 했다. 러시아 콘스탄틴 자툴린은 1930년대 기아는 소련에 진행된 집단화 범죄 정책, 쿨락의 분산화, 카자크의 분산화 등 여러 가지 이유의 결과로 발생한 비극이며 오늘날 기억을 ‘사유화’하려는 노력은 모독이라고 밝혔다. 그는 1930년 이 사건과 같은 시간에 우크라이나의 소비에트에 의해 우크라이나화가 진행되었으며 기아가 있었던 시기에는 우크라이나어가 촉진하고 교육 기관, 우크라이나 과학 아카데미에서는 우크라이나인들이 차지하고 있었기에 우크라이나인이라는 민족으로 인해 박해를 받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국제사회 반응은 조금 달랐다. 유엔은 1932~1933년의 기아가 우크라이나와 구소련 구성 공화국의 비극이었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 2003년 유엔 총회 성명서에서 1930년대 사건은 ‘비극’이라 부르면서도 ‘인종 학살’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캐나다, 미국, 프랑스, 조지아, 폴란드, 유럽의회 등은 우크라이나의 요구에 동정하고 있다.

이처럼 우크라이나에서 골로도모르가 우크라이나의 비극인지 스탈린 정권에 의한 우크라이나인의 인종 학살인지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의 과거사와 관련된 문제는 단순한 역사 해석상의 민족 자존심을 문제를 떠나 양국 관계뿐만 아니라 국제사회, 국가의 안보와 직결되는 국제정치와 관련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결국 우크라이나는 그동안 국내정치뿐만 아니라 나토 가입과 유럽 가입을 위한 대외정책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는데 골로도모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였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구소련 국가에서 일어났던 사건에 대한 소위 정체성 논쟁은 수면 밑으로 사라지고 다시 러시아 혐오로 나타나고 있다.

김영술 <전남대 글로벌디아스포라연구소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