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서석대> 수저의 대물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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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일보]서석대> 수저의 대물림
양가람 사회부 기자
  • 입력 : 2023. 10.05(목) 16:18
  • 양가람 기자
양가람 기자
최근 일본 청년들 사이에 ‘오야가차(親ガチャ)’라는 은어가 자주 오르내린다. 부모를 뜻하는 ‘오야(親)’와 무작위로 장난감 캡슐을 뽑는 게임인 ‘가차 (ガチャ)’가 붙은 말로, 단순히 번역하면 ‘부모뽑기 게임’이다. 좋은 부모를 ‘잘 뽑은’ 소수는 유복한 인생을 살게 되지만, 그저그런 부모를 ‘뽑은’ 대다수는 힘든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뜻이다. 중국에는 부나 빈곤을 대물림 받은 세대를 뜻하는 ‘푸얼따이(富二代)’,‘치웅얼따이(窮二代)’라는 단어가 있다.

한국에서도 ‘수저론’이 번지던 때가 있었다. 흙수저를 쥔 사람들은 제아무리 발버둥치더라도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사람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청년들의 자조였다. 사회의 부조리한 구조 대신에 부모를 먼저 원망하게 만드는, 풍자라기엔 너무 잔인한 단어다.

미디어를 통해 출산은커녕 결혼, 연애도 포기하고 구직조차 나서지 않는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어)’들의 소식이 계속 들려온다. 동시에 ‘부모찬스’로 온갖 특혜를 얻거나 갑질을 저지르는 금수저들의 근황도 이어진다. 같은 공간, 동일한 시대를 사는 청년들이 맞나 싶을만큼 짊어진 삶의 무게가 너무도 다르다. 물려줄 수저조차 없는 ‘이생망’들은 스스로 대(代)를 끊는 걸 선택했고, 금수저들은 ‘수저의 대물림’을 통해 자신들만의 세계를 더욱 공고히 하고 있다.

“우리 집 명예훼손 한 사람 고소 준비 중이야. 엄빠(부모)를 비롯한 지인들 다 훌륭하신 검찰, 판검사분들이여서 잘 풀릴거야.”

지난 2일 교권 침해 학부모들의 개인정보를 폭로하는 사회관계망서비스 계정 ‘촉법나이트’가 공개한 A씨의 게시글이다. 지난 2016년 의정부의 한 초등학교에 다녔던 A씨는 수업시간에 페트병을 자르다 손을 다쳤다. 학교안전공제회로부터 두 차례 치료비를 받았음에도, A씨의 부모는 계속해서 담임교사 측에 보상을 요구했다. 심지어 A씨가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2019년에도 수술비 명목의 보상금을 요구했고, 담임교사는 사비를 털어 총 400만원을 학부모에게 지급했다. 해당 교사는 학부모들의 악성 민원에 시달리다 지난 2021년 12월8일 극단적 선택을 했다.

일명 ‘페트병 사건’의 당사자로 알려진 A씨가 작성한 글이 공개되자 많은 이들이 분노했다. 네티즌들은 교사의 죽음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은커녕 잘난 부모를 내세우는 A씨의 태도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게 금수저가 아니라 뻔뻔한 DNA라는 비아냥 섞인 댓글도 있었다.

A씨 글을 공개했던 ‘촉법나이트’는 놀랍게도 초등학교 5학년 학생이었다. 그는 “우리 엄마는 제게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선생님의 죽음에 물러서지 말고 힘을 다하라고 하셨다”고 말했다. 그의 모친은 자식이 자칫 전과자가 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선한 영향력으로 자리매김하길 바란다’며 응원했다고 한다.

부모와 자식 간 천륜이 한낱 뽑기게임에 비유되는 세상에서 진정한 금수저의 의미를 되새겨보게 만든다. 우리는 미래세대에게 어떤 수저를 물려줄 것인가.
양가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