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문화향기·심명자> 무엇이 참일까?
  • 페이스북
  • 유튜브
  • 네이버
  • 인스타그램
  • 카카오플러스
검색 입력폼
테마칼럼
[전남일보]문화향기·심명자> 무엇이 참일까?
심명자 대한독서문화예술협회 이사장
  • 입력 : 2023. 09.26(화) 12:26
심명자 이사장
인류는 미디어의 변화 속에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선사시대 때 남겨진 바위나 동굴에 새긴 그림, 문자 시대 때 남겨진 수많은 기록과 문헌들은 미디어의 변천을 잘 보여준다. 활자와 인쇄술 발달은 개인용 타자기를 갖게 했고, IT 발달로 이어졌다. 지금은 누구나 컴퓨터나 노트북, 스마트폰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뉴스를 접하기도 하고 생성하기도 한다. 어느 시대나 이 미디어를 활용해 권력을 잡고, 유지하며 더 큰 권력을 위해 많은 뉴스가 만들어졌다. 뉴스는 단숨에 사람들의 의식을 장악하는 엄청난 위력을 지닌다.

예컨대 유럽과 아시아가 격돌하는 십자군 전쟁 때 ‘프레스토 존’이 등장한다. 제2차 십자군을 소집했으나 실패하고 있을 때 인도의 사제왕 요한이 동로마 제국의 황제에게 보냈다고 하는 편지가 유포된다. 5차 때에는 인도의 왕 다윗이 이슬람 세력을 물리치고 바그다드에 입성했다는 소문이 나돈다. 뒤이어 몽골제국의 침공을 받았을 때도 ‘대인도의 기독교도들이 타타르 제국의 침공을 막아냈다’며 가공된 뉴스가 전파된다. 유럽인들은 프레스토 존의 사제왕 요한을 영접하겠다는 일념으로 삼백 년 동안 목숨을 걸고 동양으로 향한다. 15세기 바스코 다 가마가 신항로를 발견하고, 사제 요한의 출현지라고 일컫는 곳에 닿았을 때 ‘프레스토 존’이 한낱 에티오피아의 작은 마을임을 알게 된다. 비로소 사제왕 요한을 찾으려는 서구인들의 갈망이 막을 내린다. 당시 서구인들은 이 프레스토 존의 전설이 진실인지 아닌지 조차도 의심하지 않았다. 이미 수없이 노출된 정보에 의해 자연스럽게 진실이 돼버린 것이다. 동양 쪽의 기독교 왕이 지켜줄 거라는 가짜 정보 덕분에 뱃길을 개발하게 됐고, 바다를 장악해서 지금의 서구가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권력자에 의해 가공된 뉴스가 한 시대의 정서로 자리 잡아 서구 발전을 이루게 했다면, 치명적으로 삶을 뒤흔드는 경우도 있다. 영조는 당쟁의 폐단을 없애려고 탕평책을 실시했다. 하지만 당시 노론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고, 밀려난 소론이 분개하고 있을 때 소론인 윤지의 난이 일어났다. 나주에 유배와 있던 윤지의 학식을 따르는 향리들이 계모임의 형식으로 공동체를 조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영조가 경종을 밀어내고 왕위에 올랐다’는 괘서가 나주목에 붙었다. 이 사건은 재위 내내 ‘경종 독살설’에 시달려오던 영조를 분노하게 했고, 소론과 호남 사람들이 많은 피해를 보게 했다. 노론이 사도세자에게 소론의 경질을 강력히 주장했지만 이를 무시하자 사도세자와 노론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급기야 영조와 사도세자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었다.

그림책 ‘감기걸린 물고기’(박정섭 지음, 2016, 사계절)에서는 아귀가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기 위해 빨강 물고기, 노란 물고기, 파란 물고기 등을 차례로 감기에 걸렸다고 소문을 퍼뜨린다. 이 물고기들을 한꺼번에 다 잡아먹기 어려우니 집단에서 쫓겨나는 대로 조금씩 잡아먹기 위한 전략이다. 물고기들은 처음에는 그럴 리가 없다고 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 말을 믿고 한 무리씩 쫓아낸다. 언젠가는 본인도 그런 대상이 될 수도 있는데 우선 ‘나’부터 살고 보자는 식이다. 거대 권력의 조작된 기획에 작은 존재가 무방비 상태로 끌려간 셈이다.

강력한 메시지를 전하는 현대철학자 비릴리오는 ‘소멸의 미학’에서 전략적 비관주의를 언급했다. 자본과 권력이 자신들이 가진 것을 유지하고 확장하기 위해 과학기술을 철저히 이용해서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없도록 민중들을 조정한다고 했다. 프레스토 존이나 나주괘서 사건처럼 고도의 기술로 기획하고 조작해서 가장 정의로운 얼굴로 파고든다. 현대인들이 무의식적으로 자본만이 유일한 종착점처럼 끌려다니고 있는 점은 곧 기획자들의 사냥감이 된다. 이 일련의 과정들은 더 가지려고 하고, 더 높아지려는 욕망이 작용해서 행복감이나 기쁨을 축소 시키며 비관주의를 수반한다.

하루에도 수많은 정보가 만들어지고 전파된다. 특히 AI 시대의 뉴스는 속도전이다. 보다 빠르게 많이 퍼뜨릴수록 유리하다. 사람들은 참과 거짓을 구분하기 어려우니 더 많이 접한 뉴스에 무의식적으로 기울어진다. 최근 대북 송금과 대장동 개발 특혜 의혹으로 ‘당 대표 체포동의안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한쪽은 중범죄로 몰아가고, 한쪽은 야당 탄압과 검찰 조작이라고 주장한다. 우리 민중들이 무엇이 참인지 명확히 알 수 없게 된 것이 바로 전략적 비관주의의 현상이다. 지금까지의 검찰의 관행으로 미루어 누구는 조작으로 생각하고 누구는 중범죄로 생각하는 쪽으로 갈렸다. 분명한 것은 엄청난 양의 뉴스를 생성하고 뿌리는 보수 언론의 속도 경쟁에서 다른 언론사가 현저하게 밀리고 있다.

비릴리오의 주장처럼 우리는 피크노렙시 능력을 길러야 한다. 권력자가 전략적으로 민중들의 의식을 둔화시키는 것을 변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시간 전쟁, 속도 경쟁의 논리와 권력 구도 속에서 주체적인 개인이 되어야 하며, 그래야만 서로를 존중하는 정서를 지닌 사회공동체가 된다. 피크노렙시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주입식 암기 교육에서 벗어나 사고하고 사유하는 교육 방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