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이돈삼의 마을이야기> 조선수군 재건 나선 이순신, 불에 탄 부유창에 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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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돈삼의 마을이야기
[전남일보]이돈삼의 마을이야기> 조선수군 재건 나선 이순신, 불에 탄 부유창에 탄식
●순천 창촌마을
수군통제사로 재임용된 이순신
순천 창촌 부유창에 들렀지만
이미 불에 타 군량미 확보 못해
‘조선수군 재건로’ 표지판과
옛 현령 기리는 비석 세워
마을은 순천·보성과 국도로 연결
땅속에 파묻혀 있는 석불도 눈길
  • 입력 : 2023. 08.17(목) 17:02
고만고만한 산으로 둘러싸인 창촌마을. 앞으로는 벼논이 펼쳐진다.
석불입상을 만나러 가는 길. 석불이 숲속에 자리하고 있다.
창촌마을 노거수와 정자. 마을주민과 길손들의 쉼터로 이용되고 있다.
대황강변 석곡에서 하룻밤을 보낸 이순신은 보성강을 건넌다. 아직도 어두운 이른 새벽, 강변의 새벽바람은 차가웠다. 계절은 초가을이지만, 강바람은 초겨울이었다. 사방이 어두운 탓에, 어디가 강이고 땅인지 분간할 수 없을 지경이다. 횃불을 밝힐 수도 없는 처지다. 언제 어디에서 일본군의 정탐꾼이 엿보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대곡나루에서 배를 타고 대황강을 건넌 이순신은 어둠 속을 달렸다. 목적지는 창촌에 있는 부유창(富有倉)이었다. 이순신은 정찰을 다녀온 군관 이형립을 통해 이복남의 부대가 부유창으로 이동한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발걸음을 재촉했다. 1597년 8월 8일(양력 9월 18일)의 일이다.

이순신은 곡성 석곡에서 순천 주암 방면으로 달렸다. 길은 산과 산 사이를 휘돌고 들을 가로질렀다.

당시 부유창은 후방의 병참 창고였다. 1598년 가을 조·명 연합군과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가 이끄는 일본군의 임진왜란 7년의 마지막 전투가 된 순천 왜교성(왜성) 전투 때에도 후방기지 역할을 했다.

창촌에는 관아와 환곡 창고인 부유창이 있었다. 하지만 이순신은 여기에서 군량미와 군수물자를 손에 넣지 못했다. 이복남의 부대보다 한발 늦은 탓이었다. 남원성 사수 명령을 받고 철군하던 이복남이 부유창에 불을 놓은 뒤였다.

조정에서는 차선의 방어책으로 청야책(淸野策)을 내린 터였다. 퇴각할 때는 관군의 군기고와 식량창고를 모두 불태우는 전술이었다. 청야책에 따라 백성들은 가재도구와 곡식을 가까운 산성으로 옮겼다. 옮길 수 없는 물건은 깊은 산중에 단단히 묻어 일본군들이 활용하지 못하게 했다.

이순신은 불에 타버려 재만 남은 부유창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참담했다. 이복남이 조금만 더 시간을 끌어줬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았다. 자신이 더 서둘러 한나절만 빨리 왔더라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때늦은 후회였다.

이순신은 다시 길을 재촉했다. 접치와 구치를 넘고 학구를 거쳐 순천부로 향했다. 학구는 승주와 순천, 구례가 만나는 지점이었다. 관리들이 쉬어가는 객관이 마을에 있었다.

이순신이 들른 부유창의 터는 창촌마을회관 부근에 있다. 주암면 소재지에서 창촌초등학교를 지나서 만나는 마을이다. 옛 모습 그대로의 돌담이 줄지어 선 마을의 한복판이다. 일제 강점기엔 여기에 주암면사무소가 있었다. 10여 년 전까지 마을회관이 있던 곳이다.

옛 부유창 자리에 ‘이순신 조선수군 재건로’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그날의 상황을 묘사한 이순신의 일기와 함께 불에 타는 군량미, 조선 군사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옛 현령을 기리는 비석도 한쪽에 덩그러니 서 있다. 비석의 높이가 150㎝ 안팎에 이른다.

“자부심이지. 우리 마을에 이순신 장군이 다녀갔고, 또 우리 마을이 그만큼 중요한 곳이었다는데.” 보행보조기를 밀고 돌담길을 따라가던 한 어르신의 말이다.

창촌마을은 전라남도 순천시 주암면에 속한다. 조선시대에 사창이 있었다고 ‘창촌(倉村)’이다. 사창은 조선시대에 고을의 환곡(還穀)을 저장해 두던 곳이다. 환곡은 나라에서 식량을 비축해 뒀다가 춘궁기 때 빌려주고 추수한 다음 되돌려 받는 곡물을 일컫는다. 이른바 보릿고개를 넘기 위한 식량창고다.

창고가 있는 마을이라고 한때 ‘창몰’로도 불렸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창촌’으로 바뀌었다. 창촌은 창촌과 천평·부곡·덕림마을을 아우르는 이름이다. 1949년 순천시와 승주군이 나뉘면서 승주군에 속했다. 1995년 도·농통합 때 순천와 승주가 합해지면서 순천시에 포함됐다.

창촌마을은 아미산(587m)과 유치산(532m), 형제산(429m), 등학산(589m), 등계산(648m), 옥녀산(401m) 등 고만고만한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지형이 작은 분지를 이룬다. 북쪽으로 오산·요곡마을, 동쪽으로 갈마마을, 남쪽으로 행정마을, 서남쪽으로 복다마을과 접하고 있다.

마을 앞 주암면 소재지로 순천과 화순을 연결하는 국도가 지난다. 보성과 구례를 연결하는 국도도 교차한다. 창촌초등학교와 주암중학교가 마을에 자리하고 있다. 보건진료소도 있다.

마을에는 20여 가구 30여 명이 사이좋게 살고 있다. 주민들은 대부분 벼농사를 짓는다. 마을 앞으로 펼쳐진 논에선 벼 이삭이 하나씩 나오고 있다. 논 가운데에 우뚝 선 노거수와 정자도 멋스럽다. 주민과 마을을 오가는 사람들의 쉼터로 쓰인다.

문화재로 지정된 석불입상도 마을의 보석이다. 석불은 높이 150㎝, 어깨너비 50㎝ 남짓 된다. 고려 후기에 조각한 것으로 추정한다. 옛 문헌(사탑고적고·寺塔古蹟攷)에 ‘고려시대의 사지’라고 적힌 것으로 미뤄, 인근에 절집이 있었다가 사라진 것으로 짐작한다.

석불의 이목구비가 뚜렷하다. 무릎 아래는 땅속에 파묻혀 있다. 석불 앞에 넓은 돌판도 놓여 있다. 전문가들은 보호각의 받침으로 보고 있다. 석불 옆에 남근석처럼 생긴 돌도 함께 세워져 있다. 석불이 토속적인 불교의식과 민간신앙의 대상물로 쓰였다는 반증이다.

옛날에 호랑이가 마을에 자주 나타났다. 호랑이는 마을사람을 한 명씩 잡아갔다. 풍수지리에 밝은 도인의 말에 따라 마을에 미륵불을 세웠다. 그날 이후 호랑이가 나타나지 않았다. 이후 해마다 음력 보름에 주민들의 안녕과 마을의 평화를 비는 제사를 지냈다고 전한다.

지금은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간혹 기도하고, 소원을 비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길손도 잠시 발길을 멈추고, 작은 소망 하나를 마음속으로 빌어본다.

이돈삼 여행전문 시민기자·전라남도 대변인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