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희 미주지역 5·18광주민중항쟁동지회장이 최근 고향 나주를 방문해 인터뷰하고 있다. 김혜인 기자 |
이윤희 미주지역 5·18광주민중항쟁동지회장이 43주년 5·18민주화운동을 맞아 광주와 고향 나주를 찾았다.
대한민국에서도 하기 힘든 일을 머나먼 타국에서 꾸준히 펼치고 있는 이 회장은 아직도 43년 전을 떠올리면 무거운 트라우마를 느낀다고 했다.
1960년생으로 나주 출신인 이 회장은 1980년 전남대학교 농과대학에 입학 후 다시 대입을 준비하고 있었다. 고향에서 한창 공부를 하던 중 5월20일 광주역에서 계엄군이 시민들을 향해 집단발포를 했다는 소식에 광주에 있는 큰 형을 데리러 자전거를 타고 광주로 향했다. 그 과정에서 청년시위대가 탄 버스를 발견해 탑승하게 되면서 어느새 시위에 참여했다. 다행히 형님은 스스로 나주로 돌아갔지만 이 회장은 또래 청년들과 뭉쳐 광주에 남게 됐다.
당시 이 회장은 시위대가 나주, 함평, 화순 등지에서 무기를 가져오기로 결정하자 운전을 자청했고, 군용 트럭에 청년들을 태워 광주에서 함평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송암파출소 사거리에서 계엄군이 함평방향 출입을 통제하고 대치하는 차량 속 시민들을 무차별로 사살했다. 다행히 운전석에서 총알을 피했지만 그대로 몇시간을 숨죽이고 있어야 했다. 정말 끔찍했다.”
이후 이 회장은 계엄군이 잠시 눈을 돌린 틈을 타 정신없이 부상자들을 트럭에 태운 후 순간 엑셀을 밟으며 광주시내로 도망쳤다. 무사히 시내로 들어왔지만 몇몇 부상자들은 이미 숨진 상태였다.
이 회장은 “시신 5~6구를 수습한 기억이 난다”며 “한 명이라도 더 태워서 오고 싶었지만 조금이라도 지체했다가는 모두 죽을 것 같았다”고 그날의 참상을 떠올렸다.
이후 이 회장은 도청서 시신을 수습해 상무대로 옮기는 일을 맡았다. 이 회장은 40여구의 시신을 태극기로 감쌌는데,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부상자나 사망자가 많았다고 증언했다.
이 회장은 “목에 기관총탄이 다닥다닥 박혀서 거의 너덜너덜해진 시신을 태극기로 감싼 기억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며 “손발이 떨리고 너무 무서웠지만 어떻게든 고인들의 존엄을 지켜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영상에 이윤희 미주지역 미주지역 5·18광주민중항쟁동지회장(노란 원)의 모습이 찍혀있다. 5·18민주화운동기록관 제공 |
5·18항쟁이 끝난 뒤 이 회장은 고향에서 공무원으로 살았다. 하지만 지워지지 않는 항쟁 트라우마, 부채감에 시달렸고 큰 아들마저 병으로 2000년에 잃으면서 결국 2006년 캐나다 이민을 결정했다.
도망치듯 한국을 떠나 정착한 캐나다에서 간간히 5·18 소식을 접하던 중 5·18민주화운동기록관(기록관)이 공개한 영상에 이 회장의 모습이 담긴 것을 발견했다. 그는 “주변에서 그 영상을 보고 알려줬다”며 “그 영상에서 내 모습을 발견한 순간 오만 감정이 교차했다. 이렇게 살면 안되겠다 싶었다”고 설명했다.
이후 이 회장은 2018년, 자신이 오랜기간 수집한 400여 페이지의 5·18관련 나주지역 공문서와 개인이 소장했던 각종 메모들을 기록관에 기증하기도 했다.
또 2019년에는 5·18광주민중항쟁동지회를 결성해 지금까지 175명의 회원을 두고 매년 광주와 다른 나라, 지역을 오가며 기념식을 주관하고 5·18 행사를 추진하는 역할을 해왔다. 지난해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해외 최초로 5·18민주화운동기념일이 제정됐지만 아쉽게도 올해 43주기 기념행사는 내부 사정으로 불발됐다.
그러나 해외 5·18 동지들과 연대해 적극적인 정신계승사업과 추모행사 등을 계획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 5·18은 아직 현재진행형인 것이다.
이 회장은 “미주지역 5·18광주민중항쟁동지회를 UN산하의 비영리민간단체로 등록할 예정”이라며 “5·18민주화운동으로 말미암아 계승되는 대동정신은 우리 한민족은 물론 세계인 모두가 보편적인 삶의 가치로 승화시켜야 할 비전이다. 앞으로도 미주지역의 동지들과 함께 전세계에 오월정신을 확산시켜 나가겠다”고 덧붙였다.
지난 2018년 이윤희 미주지역 5·18광주민중항쟁동지회장이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 기증한 5·18 관련 나주지역 공공기록물. 김혜인 기자 |
나주=박송엽·김혜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