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학교역 자리에 있는 급수탑. 근대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철도시설물이다. 등록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
학다리 나눔숲 전경. 옛 급수탑을 두고 주변을 숲으로 가꿨다. 기차가 다니던 철길을 따라 걷는 길도 만들었다. |
한산한 거리 풍경. 옛 역전답게 ‘역전’이란 단어가 들어간 상호가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
가까이 가서 보니 굴뚝도, 첨성대도 아니다. 급수탑이다. 우리나라의 철도 역사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 시설이다. 오래 전, 증기기관차가 달릴 때다. 증기를 동력으로 쓰는 열차는, 물이 떨어지면 멈출 수밖에 없다. 하여, 적당한 거리를 두고 물을 공급하는 시설을 뒀다.
기관차가 역으로 들어오면 한쪽에선 삽으로 석탄을 퍼 넣고, 타고 난 재를 끄집어냈다. 다른 쪽에선 연료 솥에 물을 공급했다. 오늘날의 주유기와 같은 존재다.
급수탑은 옛 학교역(鶴橋驛·학다리역) 자리에 서 있다. 1921년에 세워졌다. 34년 동안 철도 운송을 뒷받침했다. 시나브로 디젤기관차로 대체되면서 할 일이 없어졌다. 1955년부터 방치됐다.
그냥 없애버리기엔 너무 아까웠다. 둥근 석조탑 모양도 보기 드물다. 근대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철도시설물로서의 가치도 높다.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전라도 서남부지역에서는 유일하게 남아있는 문화유산이다. 등록문화재(제63호)로 지정됐다. 20년 전의 일이다.
급수탑이 있는 학교역은 1913년에 개설됐다. 학교역의 전성기는 70년대 말이었다. 한 해에 100만 명 넘는 사람이 타고 내렸다. 학교역은 2002년 호남선 복선화와 함께 학교사거리로 옮겨갔다. 역 이름도 ‘함평역’으로 바뀌었다.
학교역에서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궤도차(軌道車)였다. 1925년 지역유지들의 노력으로 궤도가 놓였다. 궤도차는 학교역과 함평읍 사이 6.8㎞를 오가며 여객과 화물을 실어 날랐다. 함평과 영광은 버스로 연결됐다. 함평은 물론 영광사람들도 기차를 타려면 학교역을 찾아야 했다. 학교 일대가 북적거렸다.
궤도차는 1960년 말까지 다녔다. 시간이 흘러 레일이 낡고, 궤도차의 수명도 오래돼 위험했다. 자동차가 늘면서 궤도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여객과 화물량도 줄었다. 서울 남쪽에서 다닌 유일한 궤도차는 그렇게 사라졌다. 나이 많은 어르신들만 기억하는 추억 속의 이야기다.
급수탑 인근에 5·18사적지 표지석도 세워졌다. 예전의 학교역 앞 광장 자리다. 80년 5월 21일 광주에서 차를 타고 시위대가 내려왔다. 시위대는 역전 광장을 몇 바퀴 돌면서 광주의 참상을 알렸다.
그날은 석가탄신일이었다. 전남도청 앞에서 시민을 향한 공수부대의 집단 발포가 있었다. 오후 1시 금남로에서 도청으로 진출하려는 시민들을 향해 계엄군이 총을 난사했다. 어디선가 흘러나온 애국가가 신호였다. 우리 군대가, 우리 국민에게 총을 쏜 것이다.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시민들이 무장을 한 계기다. 시민들은 나와 내 가족, 이웃을 지키기 위해 손에 무기를 들어야 했다. 광주 인근 나주, 화순, 함평, 영암 등지의 경찰서와 예비군 탄약고에서 무기를 꺼냈다. 시민군이 결성됐다.
광주의 시위대와 만난 지역청년들이 호응하며 학교역 시위대의 규모가 커졌다. 시위대는 가까운 학다리초등학교 운동장을 돌며 계엄철폐, 민주쟁취를 외쳤다. 계엄군의 만행과 광주의 참상을 전해들은 지역민들은 분노했다.
당시 광주와 전남은 ‘남’이 아니었다. 형제와 자매, 친구와 이웃이 광주에 많이 살고 있었다. 하나의 생활 공동체였다. 광주에서 비교적 가까운 거리의 학다리 주민들이 느끼는 감정은 더 달랐다. 학교사거리의 주유소에서는 시위 차량에 기름을 그냥 넣어줬다. 학다리 주민들이 보여준 또 다른 형태의 ‘주먹밥’이었다.
시위대는 ‘광주로 가자!’며 역광장을 떠났다. 일부 시위대는 무안·목포 방면으로 내려가 시위를 계속하며 경찰서 무기고를 찾았다. 5월 그날, 뜨거웠던 시위대의 절규가 표지석에서 고스란히 묻어난다.
급수탑과 5·18사적지 표지석 인근으로 만들어진 숲이 근사하다. 한동안 빈터로 남아있던 옛 학교역을 중심으로 조성된 학다리 나눔숲이다. 기차가 다니던 철길을 따라 걷는 길을 다듬고, 주변에 나무와 꽃을 심었다. 초등학생들도 청단풍, 왕벚나무, 동백, 영산홍 등 수백 그루를 직접 심고 자신의 이름표를 달았다. 숲이 만들어지면서 급수탑도 새로운 관광자원이 됐다.
학다리초등학교는 1950년에 설립됐다. 학교면에 있던 다른 3개 초등학교와 합해져 지금은 학다리중앙초등학교가 됐다. 학교면에 하나뿐인 초등학교다. 그만큼 인구가 줄고, 아이들이 없다는 반증이다.
옛 학교역과 급수탑으로 상징되는 백학(白鶴)마을은 전라남도 함평군 학교면 학교리(鶴橋理)에 속한다. 학다리, 신학(新鶴), 이암(耳岩), 영화촌(永化村), 쌍교(雙橋), 회춘동(回春洞)과 함께 학교리를 이루고 있다.
마을의 지형이 학을 닮았다고 붙여진 이름들이다. 오래 전, 매립과 간척이 되기 전의 일이다. 마을 앞에까지 바닷물이 들어왔고, 호수처럼 가득 찬 물에 학이 많이 날아온 데서 유래했다.
지명에 얽힌 이야기도 전해진다. 옛날 ‘학다리’로 불리는 바닷가 마을이 배경이다. 바닷물이 들면 고기잡이배가 떠다니고, 물이 빠지면 조개류를 잡아먹으려는 학이 떼를 지어 날아들었다. 하루는, 효심 지극한 효순이가 아버지를 찾아 갯벌로 나갔다.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는데, 금세 바닷물이 들기 시작했다. 수백 마리의 학이 날아와 위험에 빠진 효순이를 구해줬다는 전설이다.
지금도 바닷가의 지명이 남아있다. 배를 매어 둔 닻배기(달배기), 조세를 받은 동창(東倉), 풍어를 비는 제당 ‘당코배기’가 그것이다. 거리에는 ‘역전’이란 단어가 들어간 간판이 심심찮게 눈에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던 옛 역전 풍경이 어렴풋이 그려진다.
이돈삼 여행전문 시민기자·전남도 대변인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