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이윤선의 남도인문학>‘죽기 살기’… 상생과 상극의 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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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전남일보]이윤선의 남도인문학>‘죽기 살기’… 상생과 상극의 역학
345. 멀리 돌아 굽은 길로
“상생만 하면 좋을 듯싶어도 상극이라야 그 실천을 앞당길 수 있고, 상극만 하여 속도나 순서를 빨리하다 보면 멸망이 이르게 될 것이니 필연코 상생해야 한다. 굽은 것을 곧다고 이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 입력 : 2023. 05.11(목) 10:15
2011년 9월24일 전남대 강신겸 주관의 송이도 섬학교 현장학습. 이윤선 촬영
멀리 돌았기에 온전하고, 굽었기에 곧다(曲則全, 枉則直)(도덕경, 22장). 김상준은 『붕새의 날개, 문명의 진로-팽창 문명에서 내장 문명으로』(아카넷)에서 이 문장을 헤드라인으로 뽑았다. 우회로를 말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빠르고 마침내 옳은 길을 말하는 것이다. 아시아에 광범위하게 분포한 토끼와 거북이 설화가 그중 하나일 것이다. 우리 전통사상의 골격이라 할 수 있는 음양오행론 중에서 상생과 상극의 길도 또한 그러하다. 천지만물과 우주원리를 음양(陰陽)과 오행(五行)으로 나누어 그 이치를 밝혀둔 이론이자 실천방식이다. 일월이니 해와 달과 별을 통틀어 말하는 일월성신이요 목화토금수이니 나무와 불과 흙과 쇠와 물 등 세상을 구성하는 천지만물을 말하는 것이다. 이를 서로 엮고 견주어 이치와 분별의 상관을 말한 것이 음양오행이다. 대표적인 원리가 상생과 상극이다. 상생(相生)은 둘 이상이 서로 북돋으며 다 같이 잘 산다는 것이고 상극(相剋)은 오행이 서로 배척하고 부정하는 이치를 말한다. 상극은 싸우기만 한다는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죽기 살기로 하다’라는 우리 속담이 있다. 무슨 일을 열심히 할 때 쓰는 말이다. 이 말의 출처는 ‘죽고 살고’에 있다. 세상의 모든 의례가 ‘죽이기와 살리기를 모아서 만든 방식’으로 꾸며진다는 데서 그 이치를 알아차릴 수 있다. 그것이 종교든 사상이든 혹은 이론이든 실천이든 아니면 학문이든 경제든 크게 다르지 않다. 만약 어떤 의례(ritual)에 죽이기의 요소가 없다면 그것은 단지 보이지 않는 것일 뿐이다. 예컨대 일 년 중의 가장 큰 의례인 설날이 새로 시작하는 의미들만 나열해두어 그 이전의 죽이기 의미들을 숨겨버렸다. 은닉되고 스며든 의례들 속에 ‘죽이고 살리고’의 맥락이 있음을 발견해내고 나면 그 희열감에 무릎을 치게 될 것이다. 마치 쪽윷놀이 윷을 던지고 허벅지를 손으로 크게 내려치는 것과 같다. 내 지난 칼럼에서 안태(胎를 부르는 남도말)의 장례와 탯줄 자름 등을 예로 들어 설명한 바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기독교의 예수다. ‘죽고 살고’의 전형적인 모델이라 할 것이다. 멀리 돌았기에 온전하다는 것은 상생과 상극의 역학을 에둘러 이르는 말이다. 상생만 하면 좋을 듯싶어도 상극이라야 그 실천을 앞당길 수 있고, 상극만 하여 속도나 순서를 빨리하다 보면 멸망이 이르게 될 것이니 필연코 상생해야 한다. 굽은 것을 곧다고 이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돌아가는 저 길에 갱번(Gengbone)이 있었네



2023년 2월 10일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 40주년 기념 포럼에서 <안섬과 바깥섬의 인문지형>이라는 제목으로 기조발표를 하였다. 한동안 내가 몸담았던 연구기관이었고, 애정 또한 놓지 않고 있었던 터라 주저 없이 발표에 응했다. 뭇 사람들이 목포대학교는 알지 못해도 도서문화연구소는 안다고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만큼 역동적으로 한국과 동아시아 섬을 두루 살피던 시절이었다. 선배 교수들의 열띤 노력 때문에 얻은 성과였다. 이에 비약적인 기점을 마련했던 것이 인문한국(휴먼코리아, 줄여 HK라고 한다) 프로그램이었다. 이때 섬의 인문학을 표방한 제안서를 내가 초(抄)하였다. 나를 자랑하자는 게 아니다. 갱번에 대한 사유가 그만큼 촘촘하고도 방대한 내력을 지니고 있음을 말해두려 할 따름이다. 나의 연구 편력과 내력을 두루 상고해보니 그 헤아림이 교묘하다. 지난달에는 무형유산학회 춘계학술회의(목포대)에서는 ‘갱번의 인유(引喩), 갯벌에 스민 마음’이라는 주제로 발표하였다. 갱번이라는 호명에 그치지 않고 남도사람들의 사유를 톺아보는 노정에서 일으킨 생각들이다. 거듭하여 이를 밝히는 뜻은 지난 칼럼(4월 14일)의 “산이 물이고 물이 산이다”에서도 밝혀두었다. 2022년 6월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통신사선, 묘박(錨泊, 배 위에서 먹고 자고 한다는 뜻)의 선상에서 생일을 맞이하며, 토수양(土水洋)을 상고한 것이 서긍의 『고려도경』에 기댄 작명이었는데, 마치 이 생각들을 접거나 펼쳐지거나 한 셈이다. 조동일은 상생과 상극의 운행 이치를 생극(生剋)이라는 원리로 다듬어 천명한 바 있다. 상생이 상극이고 상극이 상생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조어(造語)다. 이에 대해서도 5~6년 전 본 칼럼에서 다루어두었다. 남도사람들이 바다를 총칭하여 부르는 이름 ‘갱번’에 주목하고 이를 추적한 내력들이다. 「개야도 ‘도서문화’의 전통과 활용전략-새만금의 안섬, 바깥섬 설정을 중심으로」(도서문화)에서 새만금의 안섬과 바깥섬을 설정해 본 것이 2006년 경이다. 현지답사를 다니고 논고를 갈무리했던 것은 한두 해 더 거슬러 올라간다. 또 「영산강의 인문지리와 ‘갱번’문화 시론」(도서문화)이란 논고를 통해 ‘갱번’을 이론적으로 다룬 것이 2011년이다. 남도의 갯벌과 바다를 겨냥하여 갱번을 주목한 것은 물론 훨씬 이전의 일이다. 본 지면을 통해서도 수차례 ‘갱번’의 의미화 작업을 시도했기 때문에, 내 글을 일부라도 읽은 이들에게는 그리 낯선 이름짓기는 아닐 것이다. 중첩된다고 나무라는 이도 있을 것이나, 거듭 강조하여 밝히려는 뜻임을 너그러이 봐주시기 바란다. 남도인들의 변증법적 상상력, 대대성(對待性)의 ‘갱번’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웅숭깊고 광대하다. 문제는 내게 있다. 이십여 성상을 넘기며 문제의식만 깊어졌을 뿐 묘안을 궁구함에 ‘죽고 살고’의 열심을 내지는 못하였기 때문이다. 여전히 답은 멀리 있으니 애오라지 내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만 흉중을 어지럽힐 뿐이다. 다만 바랄 뿐이다. 멀리 돌아왔지만, 그것이 온전함이요, 휘어지고 굽었지만, 그것이 곧은 길이었기를.



남도인문학팁

오상아(吾喪我)에서 오상아(我喪吾)로, 김정호의 ‘외길’을 들으며

나는 첫째 아들 이름을 붕(鵬)이라 지었다. 『장자』에서 인용하였다. 그만큼 『장자』에 경도되었던 시절이라고나 할까. 무작정 내 젊은 날의 호기 때문에 이런 이름짓기를 했던 것은 아니다. 『장자』의 <붕새>가 가지는 동아시아적 비중이 그러하다. 둘째 아이 이름은 요한(樂翰)이라고 지었다. 성경의 세례요한에서 따온 이름이다. 차차 그 이유를 설명할 날이 올 것이다. 멀리 돌아 굽은 길 걸어오는 동안 늘 붕새에게 길을 묻고 스스로 답하였다. 물을 때마다 틀렸고 틀릴 때마다 고쳤다. 지금도 고쳐 쓰는 중이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학문(學問)이라고 생각한다. ‘죽고 살고’의 열심을 내려는 까닭이기도 하다. 북명(北溟, 북쪽 바다)에서 곤(鯤)이라는 물고기알로 탄생한 붕새가 그 길이를 알 수 없는 날개로 구만장천 하늘을 차고 오른 이유는, 장차 남명(南溟, 남쪽 바다)에 이르기 위해서이다. 남명이란 무엇인가? 천지만물과 사람들이 각자 처한 처지와 까닭과 명분에 따라 달리 설정될 것이다. 장자는 <제물론>에서 ‘오상아(吾喪我)’를 말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나(吾)를 죽여야 올곧은 나(我)를 발견한다는 뜻으로들 해석한다. 도교나 불교적으로야 참된 나를 찾기 위한 여정일 텐데, 나 같은 땔나무꾼은 굳이 그러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통고집 나(我)를 죽여 끊임없이 변화하는 나(吾)를 얻으면 족하다. 두루 살피면 내가 나를 죽인다는 의미는 음양오행의 상생과 상극에 닿고 그를 통합한 생극에 닿으며 우리 속담의 ‘죽기 살기’에 가 닿는다. 갱번에서 돈오(頓悟)하였으니 죽기 살기로 점수(漸修)한다. 고담준론을 일삼자는 게 아니다. 오늘처럼 종일 비가 내리는 날 막걸리 한잔에 김정호의 노래 한 가락이면 족하다. 김정호의 ‘외길’을 틀어 둔다. “돌아가는 저 길에/ 외로운 저 소나무/ 수많은 세월 속을/ 말없이 살아온 너/ 돌아가는 저 길에/ 네가 좋아 나 여기 찾아와 쉬노라/ 철새들 머무는/ 높다란 언덕 위에/ 비바람 맞으며/ 홀로 서 있어~”

이윤선<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