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당시 3공수여단 11대대 7중대장이었던 박성현씨. |
과거를 말하던 70살이 넘은 노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날의 참상은 오랜 세월에도 무뎌지지 않았다. 애써 외면하고 가까운 이들에게 이유없는 악다구니를 써봐도 가슴의 통증과 헛헛한 마음은 지워낼 수 없었다. ‘오월 트라우마’였다.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출범 이후 ‘상향식’ 조사가 이뤄짐에 따라 5·18 당시 계엄군들이 하나 둘 증언과 사죄에 나서고 있다. 최근 5·18단체도 군조직 단체인 특전사동지회와 접촉, 5·18 당시 숨진 군·경 묘역에 참배하는 일정을 소화하면서 상부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던 ‘계엄군’들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모습을 드러내 참회와 고백에 나선 계엄군도 잇따르고 있다.
3공수여단 11대대 7중대장이었던 전직 직업군인 박성현(71)씨도 꽁꽁 싸맸던 과거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5·18조사위를 통해 증언에 나선 것이 결정적인 계기였다. 고민했다. 어디 가서 단 한 번도 말한 적 없던 과거였다.
“전화가 왔어요. 내 군 기록이 남아 있었나 보더라고. 너무너무 늦었는데, 이제는 말해야죠. 나서는 계엄군들이 많아져 나도 용기를 냈어요. ”
1980년 5월18일. 서울 송파구 거여동 부대에서 훈련받던 3공수여단 11대대 소속 박성현 7중대장은 광주에 내려왔다. ‘폭동 진압훈련’을 3개월 동안 소화한 이후였다. 급하게 내려온 상부의 지시였는데 도착해보니 광주라는 것을 알았다. 시위현장에 있던 자동차들에 총격 자국이 벌집처럼 새겨져 있고 건물의 창문이 깨져 유릿가루가 소복이 쌓여 있었다. 전쟁보다 더 심각한 상황에 혀를 내둘렀다.
“시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게 군인이잖아요. 그런데 오히려 아무 방어무기도 없던 대학생들을 무자비하게 패고 대검을 휘두르고… 제발 그러지 말라고 부하 대원을 때리면서 말렸어요. ”
전남대 앞 시위 대학생과의 대치상황은 끔찍했다. 군인들이 개머리판과 박달나무 방망이로 학생들 머리를 때렸다. 머리가 조각나 피가 터지고 허리가 꺾였다. 현장은 총격 소리가 뒤섞여 고통스러운 아우성으로 가득 찼다. 온갖 풍파를 이겨낸 것처럼 보였던 주름 가득한 눈가가 이내 찡그려졌다.
“폭동 진압훈련이라고 3개월 동안 내내 고강도 특수훈련을 받고 내려온 부대원들이에요. 부대원들이 광주시민들을 원수로 생각했어요. 이 사람들 때문에 고생했다고. 화풀이하기 딱 좋았죠. ”
작전이 끝나고 광주를 벗어나 직업군인의 평범한 일상이 시작됐다. 그런데 마음속 돌덩이 무게는 점점 더 무거워졌다. 매일매일 피로 얼룩진 꿈을 꿨다. 밥 먹다 말고 갑자기 상을 뒤엎고 손에 잡히는 것이 무엇이든 무기가 됐다. 입에 담지 못할 폭언도 불사했다. 아내가 아이들만 다 크면 집을 나갈 거라고 했다.
“마누라가 그래요. 결혼했을 때, 화 한번 낼 줄 몰랐던 사람이 어느 순간 폭력적인 남편이 됐다고. 조금만 거슬리는 게 있으면 가족들에게, 지인에게 모질게 했어요. 내가 왜 이러지 정말… 그랬죠. 옛날 사람이라, 트라우마가 뭔지도 몰라요. 남들도 그러거니 그냥 살았어요.”
애써 모른척했던 ‘5·18’ 세 글자는 최근 다시 소환됐다. 5·18조사위의 계엄군 대상 프로그램인 ‘증언과 치유’ 활동에 참여하면서 트라우마 척도 결과를 받았다. 만성 소화불량, 수면장애, 분노조절 장애가 심각했다. 그제서야 5·18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더는 침묵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트라우마는 박씨뿐 아니었다. 활동하면서 만난 계엄군들 대부분이 사회 적응을 하지 못하거나 알코올중독을 앓고 있었다. 10년 전쯤에는 5·18 당시 광주에서 함께했던 선임하사관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도 들렸다. 우리도 피해자라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다. 뒤늦게라도 부끄러운 침묵을 깨고 그날의 증언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난한 세월에 덜어지기는 커녕 더 무거워지는 죄책감과 또렷해지는 그 날의 기억이 이유였다.
한 발짝 더 용기를 냈다. 지난해 5·18단체를 찾아가 자신이 그날 광주에 있었던 계엄군이었다고 고백했다. 중대장의 위치에서 더 말리지 못한 것을 사죄했다. 박씨는 뿔뿔이 흩어진 당시 부대원들을 수소문해 증언을 모으고 있다.
“광주시민들이 허락만 해주신다면 5·18 봉사활동을 계속하고 싶어요. 늦었지만 죄송합니다.”
도선인 기자 sunin.do@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