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어린 노동자가 사망했다. 그것도 아니다. 우리의 이웃이 갑작스레 사망했다.
병이 있는 것도, 차 사고가 난 것도 아니다. 이른 아침 졸린 눈을 비비며, 기계를 빨리 돌리고자 손을 넣다가 빨려 들어갔다.
그녀를 삼킨 기계는 소스교반기(소스를 섞어주는 기계)였다. 그 기계는 2인1조로 운영돼야 했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기계가 멈췄고 23살의 어린 여성 노동자는 선배들이 알려준 위험천만한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사라져간 그 노동자의 흔적을 회사에서는 흰색 천으로 덮었다. 지난 15일 오전 6시20분께 평택 SPC 계열 SPL 제빵공장에서 발생한 일이다.
회사는 잔인했다. 그녀가 죽어가는 것을 본 동료들을 다음날도 출근 시키고 흰색 천을 덮은 기계 옆에서 다시 소스를 만들게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소스는 19종, 샌드위치 4만1032개로 퍼져 우리 앞으로 배달 돼 왔다.
그 샌드위치를 먹는 이는 취업난에 시달리던 고된 청년 비정규직일 수도 있고, 23살 같은 나이의 고시준비생일수도 있었다. 딸을 취업 시키고 안전을 바라던 아버지나 어머니가 먹을 수도 있고, 그녀의 곁을 든든하게 지켜 준 친구들이 먹을 수도 있다.
그 노동자의 목숨이 얼마나 하찮았으면, 얼마나 우스웠으면, 그 샌드위치를 먹게 될 수많은 노동자나 노동자가 될 사람들이 쉽게 보였으면…
피 냄새 가득한 공장에서 다시 '사람이 먹을 음식'을 만들 생각을 했을까.
대한민국 70%를 차지하는 노동자들에게, 동료의 피가 묻은 음식으로 한 끼를 떼우라고 권유한 것이다. 가축에게도 같은 종의 고기는 사료로 먹이지 않는다.
이 천박한 자본의 논리에 분노하다 못해 서럽기까지 하다.
그녀가 태어났을 때, 부모는 매우 기뻤을 것이다. 유아 시절 우는 소리에 밤마다 잠을 설치면서도 무사하고 건강하게 크길 바랬을 것이다. 첫 걸음마, 첫 단어, 학교 입학 등 모든 순간이 감사하고 대견했을 것이다. 대학을 가지 않고 빵집에서 일을 할 때도, 그 일이 힘들어 그만두고 SPC로 갈때도 그녀의 부모는 응원하며 등을 다독였을 것이다.
그런 젊은 청춘의 마지막은 차가운 기계와 그 위에 덮은 흰색 천 이었다.
가맹점주들도 허탈한 표정이다. 얼마 전 본보 사회부 기자가 가맹점주들을 만나 취재를 했을 때, 그들은 인터뷰를 거절했다. 몇 번의 설득 끝에 입을 연 그들 역시 이 시대의 노동자였다.
"허탈하죠. 원망도 스럽구요. 매상 폭락은 둘째치고 자부심을 가지고 일했는데… 사람이 죽었으면 공장을 닫았어야죠."
사건 이후 필자는 자주 가던 단골 빵집을 가지 않는다. 갈 수가 없다.
가맹점주들에게는 죄송하지만 그곳의 제품에 한 청춘의 눈물과 비명소리가 서려 있는 것 같아, 감히 집어 들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렇다. '안' 먹는 것이 아니다. 먹을 수가 없는 것이다.
혹자는 말한다. '죽은 자는 안됐지만 가맹점주는 뭔 죄냐'고. 이 말은 한 거대기업이 노동자와 다를 바 없는 점주들을 인질로 잡고 '이해하라'고 딜을 거는 것과 다름없다.
또 다른 이는 이렇게도 비꼰다. '일터에서 죽는 사람이 한해 얼마나 되는지 아느냐? 왜 이리 호들갑이냐'고.
아니다. 한 노동자의 죽음이 아니다. 이 사건은 거대 기업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 사건이다.
"당신들이 생각할 때 이 여성 노동자의 목숨 값은 얼마인가? 기계를 멈출 만큼 대단한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답해야 할 것인가. 마음이 스산한 늦가을이다.
노병하 기자 bhno@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