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가람 기자 |
초등학생 시절 '달려라 하니'의 주제가를 흥얼거리며 악바리 하니를 응원하던 기억이 아직도 새록새록하다. 가난하고 외롭지만 이를 악물고 연습하고 또 연습하던 모습, 마라톤 완주 후 기력을 잃고 쓰러지는 모습에 눈물 훔치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 '하니는 가난하지 않았다' 등 뜬금없는 금수저론이 불거지긴 했지만, 나에게 하니는 '역경을 극복한 우상'이었다.
IMF로 모두가 힘든 시기에 박세리나 박찬호 같은 스포츠 스타가 나왔다. 언론은 그들의 불우했던 과거를 조명했고, 사람들은 고난을 이겨낸 그들의 정신력을 칭찬했다. '헝그리 정신'이야말로 운동선수가 갖춰야 할 덕목(?)처럼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지난 달 지역의 '야구 명문'인 A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이 학부모들로부터 향응 접대, 수천만원의 뒷돈을 받았다는 민원이 광주시교육청 감사실에 접수됐다. 올해 국정감사에서도 지적됐듯, 해당 학교 야구부는 비슷한 민원이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취재 결과, 해당 감독은 경기 출전권 등을 빌미로 학부모들로부터 거액의 뒷돈을 받아온 것으로 확인됐다.
"프로팀에 입단하려면 부모의 재력, 감독의 능력, 학생의 재능 이 세 가지가 필요한데 그 중에서도 '부모의 재력'이 가장 중요해요. 아무리 능력있는 학생도 부모가 능력이 안되면 경기에 출전할 기회조차 얻기 힘들어요. 반면 실력이 부족해도 부모가 감독에게 '지갑을 많이 연' 학생들은 원하는 대학에도 진학하고, 프로에 수월하게 입단하기도 했죠."
"말 그대로 기둥 뽑힐 각오를 하고 운동을 시켰죠. 아이가 너무 하고 싶어 하니까…. 딱 몇 년만 '투자'하면 아이의 미래가 바뀔 수도 있는데, 그 정도 못해주겠나요? 그런데 막상 하려니 너무 힘들더라구요."
A고교 야구부 출신 자녀를 둔 학부모들은 이구동성으로 '아이의 미래'를 위한 일이었다고 밝혔다. '매달 고정적으로 들어가는 돈도 엄청난데, 따로 감독이나 코치들을 챙기느라 허리가 휠 대로 휘었다' 토로하는 학부모들의 모습에 씁쓸함이 밀려왔다.
우승 트로피를 거머쥐고자 1루, 2루, 3루를 흙먼지 날리며 달리는 학생 선수들과 벤치에 앉아 그들을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나머지 학생 선수들. 이들의 운명을 가른 게 학부모들의 '두둑한 지갑'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마음 아팠다.
이른바 '김영란법' 시행 이후 학교 운동부의 촌지, 불법찬조금 관행이 많이 사라졌다고 한다. 하지만 '엘리트 체육'이 낳은 비극은 현재 진행형이다. '스포츠 명문'으로 새롭게 떠오르는 B중학교 농구부에서도 코치의 금품수수 건이 논란이 돼 감사를 받고있다. 지도자 청렴도 제고 못지않게 학부모들의 의식 개선이 필요하다. 시교육청도 '학교 운동부 청렴도 개선'을 위해 형식적 연수 대신 특단의 칼을 뽑아야 할 때다.
학생 선수들의 꿈과 미래는 부모 지갑 속 돈으로 계산할 수 없다. 양은냄비에 라면을 끓여먹으며 운동하던 하니의 모습은 이제 전설 속 한 장면처럼 기억될지도 모른다. 어딘가에서 이 악물고 달리는 하니들에게 '결승점이 얼마 남지 않았다' 말해줄 수 있는 홍두깨 선생님이 많아지길 바란다.
양가람 기자 lotus@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