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재항 겸임교수
최근 어느 정부기관에서 하는 회의에 참석했다. A, B 대안 두 가지를 놓고 광고 제작의 방향을 결정하는 회의였다. 자문위원 자격으로 간 나까지 포함하여 기관의 담당자들과 광고회사 인원 등 총 9명이 참석했다. 두 방향 모두 괜찮았지만 B안이 좋다는 이들이 살짝 우세했다. 미적지근하게 참석자들이 두 안의 장점과 단점을 열거하는 발언만 계속해서, 내가 조금 강하게 B안의 문제점 몇 가지를 지적한 후에 A안으로 가야한다고 말했다. 몇몇이 고개를 끄덕였으나 눈에 띄는 반응은 없었다. B안이 나은 것 같다는 의견을 다시 소심하게 피력하는 이가 있었으나, 마찬가지로 큰 호응은 없었다. 회의 진행을 맡은 친구가 의견이 엇갈리는데 시간은 없으니 거수표결을 하자고 했다. 참가자 한 명이 '눈 감고 해야 하는 것 아니에요?'라고 농담반진담반 얘기를 했으나 참석자들의 조용한 미소와 함께 묵살되었다. 모두 두 눈 부릅뜬 가운데 진행자 친구가 말했다.
"A안으로 가자는 분, 손들어 주세요."
힘차게 바로 손을 들었는데, 동조하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내가 이야기를 할 때에는 심하다싶게 고개를 끄덕이고, 이어 자신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발언한 이조차 손을 들지 않았다. 아직도 한국인들은 확실하게 행동으로 자기 의견을 표현하길 꺼리는가 싶었다. 그런데 이어 B안 찬성자를 물었을 때, 나를 제외한 8명 모두가 약간의 시간차는 있었지만 손을 들었다. 진행자가 '이렇게까지 의견이 일방적이네요'라고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표정으로 말했다. 소수 의견으로 괜히 뻘쭘한 분위기를 만든 것 같아서 그도 삭일 겸 말했다.
"데블스 애드버킷(devil's advocate)이 이래서 필요한 거죠. 확실하게 결정을 내릴 수 있잖아요."
같은 제목의 영화로 더욱 유명해진 '데블스 애드버킷'이란 영어 표현은 직역하면 '악마의 변호인'이다. 법과 관련 없는 분야에서도 쓰인다. 특정한 안건에 대하여 토의할 때, 일부러 반대 의견이나 질문을 내는 이를 뜻한다. 한쪽으로만 쏠릴 수 있는 걸 막고, 다양한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고, 그래서 결정이나 방어를 위한 논리를 더욱 충실하게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자기 변명처럼 내가 말하기는 했지만, 반대쪽에 기준을 마련해줌으로써 결정 내리는 걸 도와줄 수도 있다. 이런 장점이 있어서, 사전에 '데블스 애드버킷'역할을 할 사람을 정하기도 한다. 가끔은 반대 의견에 본인 자신이 적극적으로 찬동하며 진짜 데블, 곧 악마가 되는 경우도 나타난다.
진실 여부는 확실하지 않지만 1960년대 3공화국 시절 정치권의 일화이다. 베트남전쟁에 파병하기 전에 박정희 대통령이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그의 최측근으로 알려졌던 차지철을 불렀다. 육영수 여사가 총탄에 피격, 별세한 1974년 광복절 이후 대통령 경호실장을 맡아, 1979년 10·26때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궁정동 안가에서 사망한 바로 그 인물이다. 그에게 베트남 파병을 반대하는 의견을 내도록 했다. 정부가 일방적으로 몰아붙이지 않는다는 인상도 주고, 미국에 대해서는 심지어 여당 내에서 반대하는 것도 무릅쓰고 하는 파병이니, 경제와 안보 분야의 대가를 높여줘야 한다는 시위를 하는 등 다목적이었다. 그런데 베트남전 공부를 하며 차지철은 파병을 해서는 안 된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배우가 실제 생활에서까지 배역처럼 행동하는 식으로 곳곳에 파병 반대 의견을 설파해서 결국 대통령이 나서서 제지를 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최초의 의도는 꽤 달성했다고 평가한다. 다른 목소리를 용납하지 않았던 독재정권에서 부러 데블스 애드버킷을 활용했다는 점이 신기하기도 하면서, 반대도 허가된 상태에서만 가능했다는 점에서 씁쓰레하다.
반대가 없이 하나의 의견만 있는 상태는 강력해 보이지만, 작은 이견이나 구멍이라도 생기면 걷잡을 수 없이 빨리 허물어진다. 더 좋은 안이 나올 수 있는 여지를 처음부터 없애 버리기도 한다. 독재국가의 군대는 승리하며 진격할 때는 무적으로 보이지만, 소규모 전투에서 패하면 무질서의 극단을 보여주며 패퇴한다. 오로지 명령 받는 데만 익숙하고, 스스로 복원하고 자정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해서이다. 개개인의 창의성을 다른 목소리라며 짓눌렀기 때문이다.
이전에 다녔던 광고 회사에서 대표이사와 함께 몇몇 부서장들이 식사를 하는데, 지원 부서의 한 친구가 '일사불란하게 회사 운영이 되도록 하겠다'라는 식으로 얘기를 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표이사가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일사불란'이야. 어지러운 가운데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나오는 거야"라고 일갈했다. 실제 광고에서 그런 '일사불란'을 깨부수며 자신들의 창의성과 새로운 시대를 연다는 의의와 명분을 자신의 제품과 브랜드에 담는 데 성공한 기업들이 있다. 스티브 잡스의 애플(Apple)이 대표적이다.
IT업계를 넘어 대중들에게 회자되고 지금도 많은 이들이 기억하고 있는 애플의 광고가 있다. 개인용 컴퓨터, 곧 PC의 시대를 연 매킨토시의 출시를 알리는 1984년 1월에 딱 한 번 방영된 '1984'라는 제목의 광고가 그 첫째이다. 흑백 화면 속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죄수복과 같은 복장에 일사불란하게 대열을 지어 행진하여 와서, 극장에 앉는다. 이들에게 죠지 오웰의 소설에 나오는 '빅브라더(Big Brother)'같은 인물이 무대 앞의 화면을 가득 채우고 쩌렁쩌렁하게 외친다.
"'사상 통일'은 어떤 함대, 군대보다 강력한 무기이다. 우리는 하나다. 하나의 바람, 하나의 의견, 하나의 대의만이 있다. 우리의 적들은 스스로 사망의 길로 가고 있다. 우리는 혼란에 빠진 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갈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승리한다!"
흑백 화면 속 빅브라더와 멍하니 무리들과는 확연히 구분되게 밝고 가벼운 운동복 차림의 젊은 여성이 해머를 들고 달려온다. 잡으러 오는 경찰들을 뿌리치고 해머를 던져서 빅브라더가 떠드는 영상이 나오고 있는 화면을 박살낸다. 깨진 화면에서 군중들을 깨우는 바람이 그들의 얼굴을 때리고, 자막과 음성이 함께 나온다.
"1월 24일 애플컴퓨터가 매킨토시를 출시합니다. 여러분들은 1984년이 왜 '1984'와 다른지 보시게 될 겁니다."
사회 변화를 가져오는 제품을 내놓는 애플을 악마로 여기는 이들이 다수였다. 역사를 보면 기존 사회에서 악마 취급을 했던 이들이 사회 개선과 인류의 진화를 이끌었다. '일사불란', '총화단결'만 내세우지 말고, 악마와 그들을 옹호하는 이들이 세상에는 필요하다.

지난 1984년 애플이 맥킨토시를 광고하면서 "1월24일 애플컴퓨터가 매킨토시를 출시합니다. 여러분들은 왜 1984년이 (조지오웰의) '1984'와 다른 점을 보게 될 것입니다"라는 문구를 삽입했다. 유튜브 캡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