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선비가 기록한 명나라 여정, 표류문학의 白眉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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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기획
조선 선비가 기록한 명나라 여정, 표류문학의 白眉 되다
차이 나는 남도-중국 인연자원 ② / ‘표해록’의 저자 나주 출신 금남 최부||나주 출신 금남 최부 제주 추쇄경차관 임명||부임 두달만에 부친상 당해 귀향하다 표류||고초 끝에 14일 만에 절강성 우두외양 표착||間者 취급받아 중형 당하는 위기 속에서도||5만자 분량 3권의 책 중국 풍토, 습속 기록||중국 절강성 영해현에 최부표류사적비 건립||한·중우호 인물로 조명, 무양서원 등에 배향
  • 입력 : 2022. 06.21(화) 16:05
  • 최도철 기자

중국 절강성 영해현 월계촌에 세워진 '최부표류사적비'

최부가 귀향길에 나섰던 제주도 별도포(화북포)

표해록 지도

금남 최부가 쓴 표해록

나주 곡강 최부길

최부 유허비

무안 몽탄의 금남 최부의 묘. 강 하나 건너면 최부가 태어난 나주 동강이다. 나주시 제공

"표해록은 난징에서 황제의 도읍에 이르기까지 산천과 풍토, 습속을 갖추어 기록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우리나라 사람이 비록 중국을 눈으로 보지 않더라도 이로써 알 수 있다."

5만 자 분량의 일기형식으로 기록한 세계 3대 중국 견문록 '표해록'. 금남 최부가 쓴 이 책이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 지를 가늠할 수 있게 해주는 '중종실록' 기록이다. 한중 수교 30주년 기념-남도, 중국 인연자원 시리즈 두 번째로 나주 출신 최부의 표류기 '표해록'를 싣는다.

1487년 9월 전라도 나주 출신의 한 관리가 제주도에 파견됐다. 조선 성종과 연산조 문신인 최부(崔溥, 1454~1504)이다. 직함은 도망친 노비나 범죄자들을 색출하여 본래의 자리로 되돌려 보내는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이다.

부임후 두 달이 지난 이듬해 1월, 부친의 별세 소식에 향리·군관·관노 등 일행 42명과 함께 나주 귀향길에 나섰다. 많은 사람들이 폭풍이 올 것이라며 만류했으나 끝내 별도포(화북포)에서 배에 올라 탔다.

뱃길에 나선 후 추자도 인근에 이르자 큰 풍랑이 덮쳐 왔다. 표류가 시작된 것이다. 폭풍우와 기갈, 선원들과의 갈등, 해적 등 생사를 넘나드는 고초를 견뎌내며, 표류 14일 만인 1월 16일 중국 절강성 태주부 임해현의 우두외양에 표착했다. 다행히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43명 전원이 생존했다.

하지만 다시 시련이 닥쳤다. 중국 관리들은 이들을 왜구로 여겨 죽이려 했던 것이다. 최부는 필담을 통해 유학에 조예가 깊은 조선 선비임을 입증해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이후 중국 정부가 말과 수레를 제공했고, 최부 일행은 항저우, 경항대운하 등 조운로를 따라 베이징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황제를 알현하게 되었는데, 최부는 상중이기 때문에 군신의 예 이전에 부자의 도리를 주장하며 비록 황제 앞이라 할지라도 상복을 벗을 수 없음을 밝혔다. 하지만 명나라 예부에서는 신하의 예를 갖춰 관복입기를 끝내 요구해 논쟁끝에 입조때만 예복을 입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명 황제 앞에서도 굽힘이 없는 조선 사대부의 기개를 드러낸 것이다.

이후 북경을 떠나 압록강에 도착한 것이 6월 4일,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기고 만 5개월 만에 밟는 고국 땅이었다.

중국 우두외양 (지금의 저장성 태주시)에 표착해 영파-항주부터 북경 교외인 통주 장가만까지 1794km의 경항대운하를 이용해 북경에 다다르고 다시 산해관-의주를 거쳐 한양의 청파역까지 135일간 총 8000리의 긴 여정을 거쳐 조선으로 돌아온 것이다. 향리·군관·관노 등 43명 모두 무사귀환이었다

6월 14일 마침내 최부가 한양에 도착하자 성종은 그에게 제주도에서 표류한 내용부터 중국을 견문한 내용을 적어 바치라고 했다. 이렇게 중국에서 돌아온 지 8일 만에 5만 자 분량의 일기형식으로 된 '표해록'이 완성됐다.

최부가 지은 표해록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와 더불어 세계 3대 중국 기행문으로 평가되고 있다. 표해록은 모두 3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1권은 태풍을 만나 중국 절강성까지 표류해서 왜구의 혐의를 벗을 때까지의 기록이고, 2권은 절강성의 성도 항저우를 출발해 텐진을 지날 때까지의 기록이다. 3권은 베이징에 도착해 황제를 알현하고 요동반도를 거쳐 의주에 도착할 때까지의 기록이다.

이 책이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 지는 '중종실록'에 기록된 다음 내용에 잘 나타나 있다.

"표해록은 난징에서 황제의 도읍에 이르기까지 산천과 풍토, 습속을 갖추어 기록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우리나라 사람이 비록 중국을 눈으로 보지 않더라도 이로써 알 수 있다." 표해록이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과 견줄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조선의 마르코 폴로라고 불리는 금남 최부, 그는 나주시 동강면 인동리에서 태어났지만 결혼 후 처가인 해남에서 살았다. 그의 호 금남(錦南)은 나주의 옛 이름 금성과 해남에서 한 글자씩 따온 것이다.

최부는 성종 9년(1478) 성균관에 들어가 영남 사림의 영수이자 문장가인 점필재(佔畢齋) 김종직과 사제 관계를 맺고 수학하면서 문과에 급제해 홍문관에서 근무했다. 그는 대쪽 같은 선비였다. 그는 홍문관 관원 시절 훈구 대신들과 외척, 후궁과 환관들을 신랄하게 공격했다. 심지어는 임금의 잘잘못까지도 쉽게 넘기지 않았다. 연산군 3년(1497)에 "학문을 게을리하고 오락을 즐기며 국왕이 바로 서 있지 않다."고 상소를 올렸다. 대노한 연산군이 중국 황제의 축하 사절로 가야 할 최부의 직함을 회수했다. 미운털이 단단히 박힌 것이다.

연산군 4년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 사초가 빌미가 되어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그의 제자였던 최부는 장 80대를 맞고 함경도 단천으로 유배됐다. 다시 6년 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장 100대에 노비 신분으로 거제도로 유배됐다. 한 달 후 연산군은 참형을 명했다. 최부의 나이 51세였다. 그의 졸기에 "최부는 공정하고 청렴하여 정직하였으며, 경서와 역사에 능통하여 문사가 풍부했고, 간관이 되어서는 아는 바를 말하지 아니함이 없고 회피하는 바가 없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최부가 어떤 인물인지 보여주는 문장이다.

표해록은 원래 '금남표해록'으로 한문 필사본이었는데 그의 외손자인 미암 유희춘이 목판본으로 발간했다. 이 책은 외국에도 널리 알려졌다. 일본에서 1769년 '당토행정기'라는 이름으로 출간됐고, 미국에서는 1965년에 영어로 편찬됐다. 중국에서는 1995년 북경대 갈진가 교수에 의해 중국어로 번역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중·일 학자들이 학술대회를 열기도 했다. 또한 중국 절강성 영해현 월계촌에는 '최부표류사적비'가 세워졌다. 최부는 한·중 우호를 다지는 인물로 재조명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최부의 무덤은 무안군 몽탄면 이산리에 있다. 아버지 최택의 묘소 아래, 최부의 묘가 영산강을 바라보며 있다. 원래는 해남에 있었으나 1947년 후손들이 부친의 묘가 있는 이곳으로 이장했다. 이곳은 행정상 무안 땅이지만 강 하나만 건너면 나주 동강면으로 최부가 태어난 곳과 지척이다.

광주 광산구 산월동에는 최부와 외손자 유희춘을 함께 모시는 무양서원이 세워져 있다. 또한 해남의 해촌서원에도 배향되어 있다. 해촌서원은 원래 석천 임억령을 모시는 사우였으나, 해남 유림들의 요청으로 최부와 유희춘을 함께 배향했다. 흥선대원군 때 서원철폐령으로 철폐되었으나 1901년 다시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판 동방견문록'으로 불리우는 최부의 표해록은 금남의 13세손 최안범 선생이 '금남최선생문집'과 '금남최선생표해록'등 5점의 문화재를 지난 2019년 국립광주박물관에 기증해 소장하고 있다.

최도철 기자 docheol.choi@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