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남 최초 패션디자인 양복 부문 대한민국 명장 전병원 대표는 양복을 만드는 데 있어 절대 대충 하고 싶지 않다는 의욕과 열정, 끈기가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다고 설명한다.
대한민국 최고의 기술자라는 실력과, 그에게 옷을 맞춰 입으려는 고객들의 믿음까지 모든 것을 갖춘 대한민국의 제586호 패션디자인 양복 부문 명장. 광주 동구 수기동에서 '전병원 양복점'을 운영하고 있는 전병원 대표의 또 다른 이름이다.
50년간 남다른 열정과 노력으로 최고의 '양복쟁이'가 된 전 대표의 삶을 되돌아보고 지역 '명장·명인 알림이'로서 제2의 인생을 힘차게 열고 있는 그의 생각을 들어본다.

패션디자인 양복 부문 대한민국 명장 전병원 대표가 동구명장명인장인협회장으로서 2022년 광주 동구와 충장로를 대표할 수 있는 명장 명인만의 브랜드를 구축하는 원년으로 삼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다.
● '심부름꾼'에서 '기술자'까지
처음부터 양복을 만드는 일을 천직으로 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중학생 시절, 어려운 집안 형편에 내년에는 고등학교에 꼭 보내주겠다는 어머니의 말을 믿고 임시방편으로 시작한 일이 양복점 심부름꾼이었다.
몇 개월이 지나도 집안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고, 그때 마침 TV에서 세계기능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온 선수들을 환영하는 카퍼레이드 모습을 보게 됐다.
"그래, 내가 공부를 할 수 없다면 기술자로 저렇게 세계 최고라도 돼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친 순간이었다.
전병원 대표는 "지금 생각하면 어머님이나 아버님이 참 선견지명이 있으셨던 것 같다. 기술을 배우고 실패하고 또 도전하면서 항상 되뇌었던 말이 '무엇을 하든 자기 일에서는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부모님의 가르침이었다"며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바지를 배우고, 조끼를 배우고, 슈트, 코트까지 옷 만드는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회상했다.
부단한 노력으로 남들보다 빠른 시간에 기술을 배우고 정식 재단사가 됐을 때는 한동안 우쭐한 적도 있었다. 손님들에게 옷을 만들어주면 척척 들어맞았다. 그러다 지금까지도 '멘토'로 여기는 고객을 만났다.
건장한 체격의 손님은 어깨는 넓고 허리는 가는 체형을 가진 보디빌더였다. 당시 양복천으로 근육질의 몸에 맞는 옷을 재단하기란 까다로운 일이었다. 처음으로 실패를 맛보고 손님 앞에서 옷 만들기 어려운 체격이시라는 등의 변명을 늘어놓던 찰나 "옷을 맞춰주는 사람이 본인 실력이 아닌 고객의 체격을 탓하는 건 기술자 자격이 없다"는 손님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전 대표는 "그 순간 기술자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로서, 상품으로 고객에게 만족을 드리는 것이라는 사실이 뼈저리게 느껴졌다"며 "그 후로 진정한 기술자가 되기 위해 2년 동안 주말도 반납하고 전국의 내로라하는 양복 기술자 선배들을 찾아다니며 기술을 다시 배우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전병원 대한민국 명장이 운영하는 광주 동구 수기동의 '전병원 양복점' 내부.
● "재능 아닌 열정과 끈기로 이뤄낸 명장"
그래도 최고만이 오를 수 있는 대한민국 명장까지 됐으면, 어느 정도 재능이 있었지 않겠냐는 기자의 질문에 전 대표는 "선천적인 것보다는 절대 대충 하고 싶지 않다는 의욕과 열정, 끈기가 지금의 저를 대한민국 명장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옷을 만들다가도 왜 이렇게 만들어야 하는지 의문이 생기면 그날은 동이 틀 때까지 해답을 찾기 위해 연구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자신의 기술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싶은 마음에 도전한 재단대회에서는 8년만에, 봉제기술대회에서는 11년만에 대상을 받아낼 만큼 한 가지 목표가 생기면 끝까지 파고들었다.
2002년 호기롭게 도전한 뒤 대한민국 명장이 되기까지는 7전8기의 노력이 필요했다.
전 대표는 "재단대회 대상을 받고, 한국 양복 100년 전시회를 개최하는 등 나름대로 준비를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면서 "세 번째 명장 도전까지는 그저 열심히만 했다면, 그 이후로는 명장이란 무엇인가, 내가 정말 명장이 될 자격이 있는가, 또 대한민국 명장이 되더라도 내가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실력이 있는 사람일까라는 진정한 고민을 거듭했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렇게 그는 2014년 경력 42년째가 되던 해 호남지역 최초이자 유일한 패션디자인 부문 대한민국 명장이 됐다.
그는 "대한민국 명장이라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국가에서 최고의 기술자 자격과 대우를 해줄테니 그 숙련된 기술을 사회에 환원하고 공유해서 전반적으로 대한민국의 양복 기술이 나아질 수 있도록 하는데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의무도 있다"고 강조했다.
전 대표는 그 의무를 누구보다 충실히 수행해왔다. 기술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가리지 않고 강연과 수업에 나섰으며, 우연히 찾게 된 교도소의 기능경기 심사장에서는 재소자들의 열정을 보고 먼저 재능기부를 제안했다.
광주교도소에서는 11년간, 목포교도소에서는 8년간 재소자들을 위해 기술지도를 했다.
그는 "그때 나에게 기술을 배운 재소자들이 출소 후에 산업체에 취업하는데 보증도 서보고, 사회에 나와서 기능사 자격증을 따서 기능경기대회 입상도 하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보람을 느꼈다"고 말했다.

전병원 대한민국 명장이자 동구명장명인장인협회장이 그동안 전시해온 양복의 변천사와 재단 용품 등을 소개하고 있다.
● '동구명장명인장인협회'로 제2의 도전
'열정'과 '끈기'로 삶을 이끌어 온 전 대표에게 지난 2019년부터 새로운 목표가 생겨났다. 바로 충장로의 숨겨진 보물들인 명인·명장·장인들을 세상 밖으로 알리는 일이었다.
전 대표는 30년 이상 고유의 기술을 갈고닦아온 광주 동구 25명의 장인들을 모아 '동구명장명인장인협회'를 만들었다.
동구명장명인장인협회는 2019년 국립아시아문화전당 회원 전시회를 시작으로 동구 달빛야행 야외전시회, 충장축제 야외전시회, 색동한복 전시회 등 다양한 행사를 비롯해 충장 장인학교에서 청년 크리에이터들과의 협업을 통해 기술과 젊은 아이디어가 결합한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내고 있다.
전 대표는 "그동안 많은 분들에게 기술을 공유하고 또 도움을 주기도 한 것 같은데, 지나 보니 내가 살고 있는 충장로 또 광주 동구에서는 많은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우연치 않게 마련된 자리로 동구명장명인장인협회가 탄생하고 회장직까지 맡게 됐는데 지금은 무엇보다 우리 명인, 명장, 장인들을 세상 밖으로 내보이고 싶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저처럼 양복을 만드는 사람, 귀금속을 만드는 사람, 도자기, 한복, 미용, 손뜨개 등 정말 다양한 업종에 장인들이 있다"며 "그동안 이분들이 홀로 꿋꿋하게 본인의 기술과 직업을 지켜왔다면, 이제는 우리가 힘을 모아 작품을 선보이고 또 사회에 보탬이 될 수 있는 기회와 시스템을 만들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굴뚝이 없는 도시'로 공산업보다는 오랜기간 전통적으로 전해 내려온 가내수공업과 수공업이 주를 이루고 있는 동구의 특성을 살리고 명인·명장을 동구 충장로만의 브랜드로 만들겠다는 계획이다.
전 대표는 "이제 도시는 대규모의 관광이 아닌 소규모지만 스토리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직접 체험하고 머물고 갈 수 있는 관광으로 재편되고 있는 상황이다"며 "우리 회원들의 공방 자체가 예술공간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관광객들을 모집하고, 체험할 수 있게 하고, 상품도 구매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궁극적으로 올해부터 시행되는 충장상권르네상스 사업과 더불어 동구명장명인장인협회도 지역 상권 활성화를 위한 기틀을 다지겠다는 포부다.
그는 "올해 열심히 준비해서 내년에는 전국의 내로라하는 예술인들이 활동하는 서울 인사동에서 전시를 시도해보려고 한다"며 "광주 그리고 동구의 이름을 걸고 명인·명장들의 작품을 선보이고 우리 지역을 다시 한번 알리는 기회를 지속적으로 만들어나갈 계획이다"고 전했다.

전병원 패션디자인 양복 부문 대한민국 명장이 광주 동구 수기동에 위치한 양복점 연구실에서 재단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