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호균의 사찰문화재 바로알기 <10>화순 운주사지(사적 제312호) ① 갖가지 주의 주장이 난무하는 천불천탑 운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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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균의 사찰문화재 바로알기
황호균의 사찰문화재 바로알기 <10>화순 운주사지(사적 제312호) ① 갖가지 주의 주장이 난무하는 천불천탑 운주사
  • 입력 : 2020. 05.21(목) 13:29
  • 편집에디터

1. 북쪽에서 내려다본 골짜기 풍경(박하선, '천불천탑 사진집', 2007.)

운주사, 여백의 미

운주사 옛 절터 발굴 기회를 얻게 된 것은 돌이켜보면 행운 같은 일이었다. 그때 드나드는 탐방객들에게서 매우 흥미로운 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한두 명이 오기보다는 무리 지어 오는 경우가 많았고 꼭 한 사람이 인솔하면서 매스컴에서 나온 보도 내용이나 문학인들이 문학적 소재로 언급한 이야기를 자기 나름대로 상상력을 더해 신명 나게 떠들어대는 것을 자주 목격했다. 그때는 틀린 생각이라며 바로잡아 주고 싶기도 했다. 반짝이는 눈동자들을 보면서 감상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그만둘 때가 많았다. 그때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했던 것도 '운주사의 실체'에 '여백의 공간'으로 비어 있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1941년 고유섭의 연구 이래로 8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여전히 운주사의 총체적인 실체에는 10%도 접근하지 못했다.

매스컴의 보도에 북새통을 이룬 운주사

운주사와 천불천탑, 나아가 중장터의 신비를 이야기하는 수많은 사람. 시인이나 소설가 같은 문학인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모 미술사학자조차도 대중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전한다. '운주사를 추석 답사 여행지 3위'로 소개한 한 라디오 방송 덕분에 주말인 2017년 10월 7일에 2천여 명, 8일 1,500여 명이 운주사를 찾아 북새통을 이뤘다는데 이는 예년 추석 관람객의 두 배에 달했다고 한다. 방송에서는 어디에서도 확인이 안 된 탑과 불상의 숫자를 들먹이거나 운주사 절 이름 한자를 일제강점기 때에나 등장한 '배 주舟자'라고 소개하는 것은 고려시대에 창건된 운주사雲住寺를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더구나 중장터의 '중장'은 '중 전용 장'인 '중장僧市'이 아니라 '중촌中村'이라는 곳에서 열리는 일반적인 '장시場市'를 축약해서 '중장中場'으로 불려왔음을 고지도로 증명하고 설화에 등장하는 인근 사찰과 승려 관련 이야기를 '중장터'라는 장터 이름에 오버랩overlap되면서 '중장僧市'으로 오해하여 와전된 것이라는 글을 학계에 여러 차례 발표했는데도 아직도 중들이 장을 보던 '중장' 타령이다.

'운주사 탑의 1등성 별자리 배치설'과 '백제 유민들의 운주사 창건설'

이런 일은 20년 전에도 있었다. 1999년에는 (2회, '새롭게 밝혀지는 운주사 천불천탑의 비밀')에서 '운주사 탑의 배치가 밤하늘의 1등성 별자리로 배치'되었다는 다소 과격한 주장이 방송을 타게 되면서 그 반향도 대단했었다. 더구나 '백제 유민들이 환국하여 운주사를 창건'했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까지도 흥미롭게 소개되었다. 남중국 일대에서 살고 있던 백제 유민들이 고려가 건국되자 집단적으로 고향으로 돌아와 운주사를 세웠을 것이라는 아주 흥미로운 주장을 내세웠던 것이다. "남중국쪽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건너온 시기가 운주사 탑과 불상이 세워진 때와 묘하게도 일치하고 있다. 이는 영산강의 물줄기가 운주사까지 이어지는 점에서도 그러한 가능성이 있다. 11세기~12세기 무렵에 약 150회에 걸쳐 5,000명 이상의 인원이 온 기록이 있다. 이들은 대개 중국 남동부의 절강·복건성을 출발해 주산舟山열도를 지나 우리나라 서남해안을 향해 북상해왔다."고 했다. 고려의 건국을 계기로 그동안 신라에 의해 봉쇄돼 왔던 해상로가 개방되자 이 지역에 살고 있던 백제유민들이 남방항로를 이용해서 대거 고향으로 되돌아왔을 가능성이 크다며 마치 이러한 몇몇 역사적 사실을 끄집어다가 비슷한 시기라는 정황상 근거만으로 백제 유민들이 운주사를 창건했다고 단정하는 우愚를 범하고 말았다.

'운주사 탑의 1등성 별자리 배치설'과 '백제 유민들의 운주사 창건설'이 역사스페셜에 방송되면서 1999년에도 2017년만큼이나 매주 주말이면 2?3천 명의 탐방객들이 몰려들었을 정도로 그 반향은 매우 컸었다. 방송 내용에 고무된 수많은 탐방객은 때마침 중·고등학생들에게 부과된 '문화유적 탐방'이라는 자녀들의 수행학습 과제물도 해결할 겸 운주사를 찾았다고 한다.

지난 30여 년의 결실

지금부터 일곱 차례에 걸쳐 다루어질 글들은 지난 30여 년의 결실이다. 때로는 발굴 현장에서, 때로는 연구실에서 '운주사'에 대한 여러 자료를 뒤져보거나 떠오르던 생각을 정리하여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에 학술·발굴보고서와 단행본을 펴냈었다. 답사 현장에서 끊임없이 쏟아내던 일반인들의 허망한 질문까지도 소중했다. 그들이 진정으로 궁금해하는 것을 알기 쉽게 풀어쓴 글들이 여러 신문이나 잡지 등에 실리기도 하였고 답사나 강의의 자료로 활용되기도 했다. 그동안 여러 차례 다듬고 보태고 최근에 진행된 몇 가지 연구 성과도 곁들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대표적으로는 2009년에 발표된 그 당시까지의 총체적으로 자료를 모으고 분석한 '운주사 자료집성'과 2013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위해 시도된'운주사의 세계유산적 가치 세미나', 다음 해인 2014년에 국내·외 최고 전문학자들이 7개 분야에 걸쳐 발표한 국제학술대회 '천불천탑의 불가사의와 세계유산으로의 탐색'이란 연구서들이다. 앞으로 운주사를 이야기하려면 적어도 이 세 자료는 읽어 보길 권해드린다.

운주사 천불천탑,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

우리는 누가? 언제? 이곳 화순하고도 능주 땅에서 운주사를 창건하고 천불천탑을어떻게? 왜? 만들었는지? 그러다가 무슨 이유로 그만 미완성으로 그치고 말았는지? 어쩌다가 조선 중기 경에 화재로 폐사에 이르게 되었는지? '와불'이라고 부르는 거대한 돌부처는 정말로 일으켜 세우려고 조각을 했는지? 당시 우리 조상들의 토목건축기술 수준이 산 정상에 있는 250여 톤이나 되는 돌부처를 일으켜 세울 수 있는 기술을 보유하였는지? 칠성바위는 쌓다 만 미완성 원반형 탑재인지? 아니면 북두칠성 신앙(도교)이나 천문관측과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 중장터는 정말 중(스님)들만을 위한 장터인지 등등 끊임없는 궁금증은 가시지 않는다.

운주사雲住寺는 예로부터 '천불천탑千佛千塔'과 '석실상배불石室相背佛'로 주목을 받아왔고 그 역사도 고려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1세기 이전부터 정유재란(1597년) 때까지 600여 년 동안 당당한 신앙 공간이었다가 그만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옛 영화를 뒤로한 채 황량한 폐사지로 머물다가 1930년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자그마한 규모로 법등을 다시 밝혔다. 이어 1990년대부터 지속해서 이루어진 중창 불사와 문화재 복원공사로 그 모습이 단장되어 오늘에 이른다.

보통 한 사찰에 한 두기의 석탑과 몇 분의 불상을 모시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하지만 운주사에는 산골짜기 여기저기에 100여 분의 돌부처와 30여 기의 돌탑들이 집단으로 배치되는 아주 이색적인 양상을 보인다. 더구나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북두칠성의 천문관측 실증 유물'인 칠성바위와 250여 톤에 달하는 석불좌상?입상(속칭 와불)은 학술적인 의미 이상으로 신비롭게 다가온다.

도탄에 빠진 민중을 어루만지는 따뜻한 손길

아주 먼 옛날 전라도 능주 땅 골짜기에 어느 누가 무슨 사연이 그리도 많아 그렇게 정과 망치를 두들겨댔을까? 그것도 숨을 죽이면서… 그러다가 '날이 샜네!'라는 거짓말에 그만 탄식하며 연장을 내팽개치고 어디로 사라져 버렸을까? 여기저기에 널브러진 그 잔해들을 바라보며 우리는 관찬사서官撰史書에 한 줄도 올리지 못한 그 사연들이 못내 궁금해진다.

우리 선조들이 남긴 많은 문화유산 가운데 석굴암·고려불화·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성덕대왕신종·금동용봉봉래산향로 같은 유물들은 인류 최고의 예술품으로 찬탄을 받기에 어느 한 곳도 부족한 점이 없다. 대부분 민족은 이렇게 완벽한 조형미를 갖춘 문화유산을 선조로부터 물려받지 못했다. 거기에 비교한다면 우리는 행복한 민족인 셈이다. 위와 같은 기준으로 운주사 못난이 돌부처와 동냥치 탑을 볼 때는 솜씨가 형편없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기에 담긴 역사적인 실체에 조금이라도 접근한다면 아름다움이라는 기준에 대해 다시금 돌이켜 생각해 볼 여지는 분명하다. 미적 감각의 잣대는 단순하지만은 않다.

사실 운주사에는 못난이 돌부처와 동냥치 탑 만 있는 것도 아니다. 그 유래를 알 수 없는 돌집에 서로 등을 대고 서 있는 '석실상배불石室相背佛'이나 250톤이나 나가는 대형 석불(일명 와불), 고려시대 석탑 중 가장 큰 '구층석탑'이나 산 골짜기에 20여기 석탑을 엄청난 무게의 기단석이나 산비탈 암반에 아슬아슬하게 세워진 석탑 등 절대 대충 적당하게 성의없이 연습삼아 만든 '석불석탑 대량 생산공장'은 아니라는 것이다.

종교 형상물에는 병든 부분을 치료하기 위한 고등 철학 내재

모든 종교는 대개 그 시대의 사회상을 충실히 반영한다. 그러한 종교의 교리나 형상물에는 그 시대의 병든 부분을 치료하기 위한 정신의학적 측면에서의 고등 철학도 담겼다. 불교도 여기에서 예외는 아니다. 우리 역사를 되돌아볼 때 온통 지배 이데올로기로 전락한 모습으로만 등장한다. 물론 이것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正覺한 참뜻이 아니며 교세 확장의 方便으로 변질되어 온 몸집 불리기의 비극적인 결말이다. 간혹 어쩌다가 도탄에 빠진 민중을 어루만지는 따뜻한 손길을 내밀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신라 원효 스님이나 고려 시대 백련 결사를 주도한 요세스님 같은 이의 손길이 무척 그리워지는 시절이다.

귀족불교와 민중불교의 예술품

불교가 그동안 지배자 중심의 이데올로기를 충실하게 양산해 낸 탓에 석굴암이나 고려불화 등과 같은 귀족 불교미술을 생산해냈고 거기에 찌든 이들의 눈에는 운주사의 못난이 불상이나 동냥치 탑은 어째 정성이 부족한 듯 성에 차지 않을 것이다. 이렇듯 문화유산에 대한 진정한 가치를 느끼기 위해서는 못난이 불상이나 동냥치 탑 하나에서도 소망을 담아내는 사람들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 사실 윤회설도 삼국시대에는 누구나 선업을 쌓으면 다음 생에 귀족으로 태어날 수 있다는 논리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귀족이나 왕족들에게 당신들은 전생에 선업을 쌓아서 그 보상으로 왕족이나 귀족으로 태어났으니 그러지 못한 민중들을 지배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이른바 집권 이데올로기로 이용된 것이 그 실체이다.

2. 남쪽에서 올려다본 골짜기 풍경(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박물관 유리건판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919년 촬영)

3. 북쪽에서 내려다본 골짜기 풍경(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박물관 유리건판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919년 촬영)

4. 석조불감 남북에 놓인 쌍탑 풍경 - 북쪽 원형 다층석탑과 남쪽 칠층석탑(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박물관 유리건판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914년 촬영)

5. 남쪽에서 바라본 골짜기 풍경(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박물관 유리건판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919년 촬영)

6. 북쪽에서 바라본 골짜기 풍경('조선고적도보' 六, 1917년)

7. 석불군과 탑이 어우러진 풍경('조선고적도보' 六, 1917년)

8. 북쪽에서 내려다본 골짜기 풍경(1967년 이전 촬영, 송광사)

8. 북쪽에서 내려다본 골짜기 풍경(1967년 이전 촬영, 송광사)

9. 1960년대 법당 주변 풍경(1967년 이전 촬영, 송광사)

10. 북쪽에서 내려다본 골짜기 풍경(1973년 3월 1일, 이순규 촬영)

11. 남쪽에서 바라다본 골짜기 풍경('전남문화재도록' 1975년)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