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안 차퍼(Chopper), 막심과 함께 달리다 ② - 초원에 대한 꿈과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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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국의 유라시아 탐험기
러시안 차퍼(Chopper), 막심과 함께 달리다 ② - 초원에 대한 꿈과 현실
김현국의 AH6, TRANS EURASIA 2014
  • 입력 : 2019. 03.27(수) 13:25
  • 편집에디터

시베리아, 평원에서의 야영. 질퍽거리는 습지를 거쳐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는 초파리와 모기와 파리 떼들에게 몸을 맡겼다- 초원에 대한 꿈과 현실

블라고베셴스크로부터 650km. 석양이 눈높이까지 내려와 숲길 저 멀리에 떠있다. 달려 나가는 모터바이크 앞으로 펼쳐져 있는 도로가 살짝 젖어 있어 소나기가 먼저 이곳을 지나갔음을 알려준다. 옅은 안개가 떠다니는 길 위로 붉은 빛이 들어와 있어 아늑해 보였다. 문득 핼맷 안으로 무척 기분 좋은 냄새가 흘러 들어왔다. 코 안으로 들어온 향기는 점점 진해졌다. 나는 바이크의 속도를 살짝 줄이고서 냄새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땀과 흙 먼지투성이의 나와 모터바이크에 실려 있는 짐으로부터 흘러나온 것은 아니었다. 좌우를 향해 머리를 돌려 마을이나 사람의 흔적을 찾아보았지만 길 위에는 울창한 숲과 지는 해와 나뿐이었다. 분명 꽃 향기였다. 시선이 숲과 도로 사이의 길가에 다시 집중되었다. 그곳으로부터 다양한 종류의 꽃들이 숲 속 깊숙이까지 퍼져 있었다. 안개의 정체가 밝혀졌다. 건조한 대기가 대지 위의 습기를 빨아올리면서 길 전체가 꽃향기로 뒤덮여 안개처럼 떠다니고 있었다. 이 광활한 땅, 어느 곳에서나 꽃은 쉽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시간에 이런 곳에서 이런 기분 좋은 냄새를 그것도 달리는 모터바이크 위에서 만나게 된다는 것은 지극히 드문 일임에 틀림이 없다.

20km를 더 달렸다. 막심과 나탈랴가 길 가에 서 있었다. 길 위에서 함께했던 열 시간동안 우리는 만났다 헤어지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여전히 반가운 표정으로 다가온 나탈랴가 내게 안부를 물어왔다. '킴, 괜찮아?'라고. 미안한 마음으로 가득한 나는 핼맷을 벗으면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 것인지 난감했다. 전날의 대화를 통해 이들은 나의 여행이 암스테르담까지 이어지는 유라시아 대륙횡단도로에 대한 자료를 구축하기 위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의 사진 촬영으로 인해 서로의 속도를 맞출 수 없었고 이들은 어느 곳에선가 나를 하염없이 기다리기 시작했다. 결국, 막심은 나를 향한 염려의 표정을 드러냈다. 이렇게 달리다가는 내가 평생 러시아의 길을 벗어날 수 없을 거라는 농담과 함께.

막심과의 라이딩 첫째 날- 시베리아, 평원에서의 야영

야영장소를 찾기 위해 우리는 M58(P297)연방도로를 벗어났다. 잡목 숲 사이로 난 길로 들어서자마자 울퉁불퉁한 흙길이 시작되었다. 자그마한 물웅덩이를 몇 개 건너고서 다시 길 전체를 가로막고 있는 커다란 물웅덩이와 만났다. 막심의 모터바이크가 멈추었고 나탈랴가 내렸다. 그녀는 물웅덩이 가장자리를 선택해서 거침없이 물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나탈랴의 모습과 음성을 통해 물 깊이와 바닥의 상태를 파악한 막심의 바이크가 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군화가 물속에 잠기었고 모터바이크가 한번 비틀거린 다음에야 웅덩이 밖으로 빠져 나왔다. 이번에는 내 차례였다. 기어가 낮은 상태로 서서히 움직이면서 발판을 딛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허벅지에 힘을 주고 두 종아리까지 모터바이크의 양쪽 면에 힘껏 밀착시켰다. 이 순간부터는 액셀을 당기는 오른손에 신경이 집중된다. 나는 막심이 비틀거리며 지나간 자리를 피해 반대편 가장자리를 선택했다. 웅덩이 속으로 들어서자마자 발목이 물에 잠겼고 신발 안으로 물이 넘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앞바퀴로부터 튀어 오르는 흙탕물로 가슴까지 적셨다.

우리는 계속해서 전진했다. 나는 달리는 바이크 위에서 적당한 공터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그곳이 우리의 야영지가 될 것을 기대했다. 길이 끝나고 평원으로 들어가는 경계에서 자그마한 공터가 나타났다. 어떤 이유로 이곳에 들어온 자동차가 다시 돌아나가기 위해 여러 번에 걸쳐 전진했다가 후진했음을 알 수 있는 타이어 자국이 길 위에 어지럽게 남아 있었다.

막심이 타고 있는 모터바이크는 공터를 지나 무릎 높이로 솟아있는 평원의 풀밭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드넓은 평원의 오른편으로 향했다. 나는 그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평원은 평평하지 않았다. 흙길은 어느새 울퉁불퉁한 습지로 변해있었다. '막심은 도대체 어디로 가는 것일까?' 자그마한 잡목 숲이 눈 안으로 가까이 들어오기 시작했을 때 모터바이크는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바퀴의 절반이 질퍽거리는 땅에 박혔고 앞으로 나가려고 액셀을 잡아당기자마자 서로 얽힌 풀들이 쇠로 만들어진 기어 봉을 붙잡고 휘어 버렸다. '세상에 풀이 쇠를 휘어버리다니..,'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모터바이크는 왼손으로 쥐고 있던 클러치를 놓아버리자 마자 시동이 꺼져 버렸다. 모터바이크에서 내려도 넘어지지 않았다. 진흙과 풀에게 모터바이크가 완전히 붙잡혀 버렸다. 풀에게 휘어져 버린 기어 봉이 나의 손 안에서는 끔쩍도 하지 않았다. 도구를 사용해서 심하게 힘을 주게 되면 부러져버릴 것 같아 그대로 놓아두었다. 풀 속으로부터 무엇인가가 눈에 들어왔다. 발목까지 올라오는 흙더미들이었다. 자세히 보니 불개미들의 집이었다. 깜짝 놀라 옆으로 비켜섰다. 앵앵 거리는 소리에 머리를 들어보니 초파리 떼들이 눈 안으로 파고들 기세로 몰려들었다. 모기와 파리 떼의 공격이 합쳐졌다.

막심과의 라이딩 첫째 날- 시베리아, 평원에서의 야영

나는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앞의 진흙탕에 빠져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막심을 불렀다. '우리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이냐'는 나의 물음에 그는 자신의 팔을 들어 올려 손끝으로 잡목 숲을 가르쳤다. 나는 '모터바이크를 부서뜨려 가면서까지 겨우 이런 잡목 숲에서 야영해야 하는 것인가'라는 생각으로 화가 난 목소리를 이어갔다. 그는 사람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아니 도대체 누가 벌레뿐인 이 풀밭에 들어온다는 것인가? 설령 사람들의 눈에 뜨인다 해도 그게 어떻다는 것인가라는 표정을 지었다. 나에게는 1996년에 러시아를 횡단하면서 만났던 시골 사람들의 따뜻한 모습이 여전히 기억에 생생했기 때문이다. 그는 나를 향해 걸어왔다. 모터바이크의 휘어진 기어 봉이 힘이 센 그의 손 안에 들어가자마자 원상복구가 되었다. 그는 현재 러시아의 시골은 무척 위험하다고, '특히 야영할 때 사람들의 눈에 뜨여서는 절대 안된다'라는 내용의 말을 반복했다. 사람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평원의 한가운데서 야생동물이 아닌 사람을 조심해야 한다는 말이 반복되자 나는 막심이 마치 자신을 조심하라는 메시지로 오해하고 그를 의심하기까지 했다.

다음 날, 나는 '쟌나'라는 이름을 가진 마을의 외곽에 서있는 추모비 앞에서 그의 말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몇 년 전부터 러시아의 시골지역에서 여행자들이 살해당하기 시작했다. 디지털환경이 만들어지면서 '시골은 러시아다움을 상징하는 곳이다'라는 말은 사라져가게 되었다. 누구나 그리고 어느 곳에서나 저렴한 가격으로 '와이파이'를 잡아 정보를 접하게 되면서 눈이 열린 시골 사람들은 열악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게 되었다. 시골에서의 한 달 벌이는 5만원도 되지 않는다. 러시아인의 평균수입은 600달러 정도이다. 시골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이 접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국에서 생산되는 빵(흘렙)과 감자와 보드카 정도이다. 다민족국가인 러시아는 공공예절이 발달되어 있다. 하지만 그 유명한 보드카 앞에서는 무기력하게 되고 어떠한 이유로 싸움이 시작되면 어디서나 쉽게 접할 수 있는 무기들이 동원되기도 한다. 러시아의 시골이 위험하다는 것은 바로 매일 술에 취해 있다시피 한 젊은이들을 의미한다. 이들이 대륙을 횡단하는 여행자들을 공격대상으로 삼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사람의 눈에 띄지 않아야 하는 이유를 막심에게 들었음에도 진흙탕에 빠진 모터바이크를 끌고 다시 앞으로 펼쳐진 습지를 지나야만 만날 수 있는 잡목 숲은 적절한 야영장소가 아니다 라는 의견들이 모아졌다. 수렁에 빠진 모터바이크를 빼내기 위해 짐을 고정하고 있는 끈들이 풀어졌고 각 자의 손에 들려 초원의 입구로 옮겨졌다. 모터바이크와 짐들이 다시 함께하게 되었을 때에는 이미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오늘은 이곳이 우리의 야영지이다. 우리는 짐을 놓아둔 채로 모터바이크를 타고 초원의 왼편을 향해 전진하기 시작했다. 도저히 앞으로 나갈 수 없을 것 같은 울퉁불퉁한 풀밭을 뚫어지듯이 바라보면서 마른 땅을 찾아 기어 나아갔다. 결국 사람의 눈에 드러나지 않을만한 잡목 숲과 평원의 경계에 텐트가 세워졌다. 이곳에서 집요한 초파리와 모기와 벌레들의 공격을 도무지 견디지 못하겠다는 나의 하소연에 막심은 걱정 어린 표정을 지었다. 연기가 나는 모닥불을 만드는 것은 '여기에 사람이 있소'라고 광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잠시 뒤, 적당히 마른 나뭇가지들이 모아졌고 모닥불이 피워졌다. 모터바이크를 타고 하루 종일 주행하는 것은 중노동을 하는 것과 같다. 첫날이라면 온몸이 몸살을 앓을 수도 있다. 오늘 하루 동안에 달린 거리는 650km를 넘었다. 손바닥이 얼얼하고 어깨가 뻣뻣하다. 며칠째 피곤함이 누적되어 있다. 밤이 깊어질수록 야영지의 기온은 더욱 내려갈 것이다.

막심이 가지고 있던 여유분의 쇠 컵이 내 손에 들려져 있다. 컵 안에는 모닥불로부터 데워진 따뜻한 밀크 커피가 담겨 있었다. 2014년 6월 29일, 시베리아의 잡목 숲에서 나의 꿈은 이루어졌다.

막심과의 라이딩 첫째 날- 시베리아, 평원에서의 야영

1995년 가을, 나는 1890년의 안톤 체홉에게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가 우편배달마차를 타고 시베리아를 횡단하면서 묘사해 놓은 지구 대자연을 동경하기 시작했다. 시베리아의 깊은 숲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밀크커피 한 잔을 마셔보는 꿈 이었다. 1996년 나는 현대판 말인 모터바이크를 타고 20세기 마지막 서부 개척지였던 러시아를 횡단하고 있었다. 매일 새로운 길에서 만나는 장벽들로 인해 밀크커피 한 잔을 마실만한 여유를 한 번도 가지지 못하고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2019년에도 나는 여전히 '유라시아대륙횡단도로'를 중심으로 한반도로부터 확장된 공간에 대한 자료를 반복적으로 구축하는 일을 진행하고 있다. 이를 위해 1996년, 2014년과 2017년에 유라시아대륙을 횡단했다. 1995년 여름에 이루어졌던 러시아와의 처음 만남이후, 24년째 대륙과의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이를 통해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리고 당장 지금, 우리의 일상에서 사용되고 있는 운송수단으로 한반도로부터 확장된 공간을 경험할 수 있는 구체적인 자료를 구축했다.

남과 북의 분단으로 인해 우리는 고립된 섬 안에서 제한된 선택의 범위 안에서 살아왔다. 한반도로부터 확장된 공간은 유라시아 대륙을 의미한다. 유라시아 대륙은 45억의 인구를 가진 거대 시장이자 자원의 보고로서 지구촌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곳이다. 한반도는 유라시아 대륙의 시작이다. 도전할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을 바라보는 청년의 꿈과 청년의 꿈이 실현될 수 있도록 함께하는 두 눈을 가진 사회를 기대한다.

막심과의 라이딩 첫째 날- 시베리아, 평원에서의 야영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