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실학의 깃발을 세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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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실학의 깃발을 세우자
화순실학의 발견1
  • 입력 : 2018. 07.10(화) 16:30
  • 편집에디터

나간채(전남대 명예교수, 광주연구소 이사장)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의 진리를 요즘에 실감하고 있다. 30여년 세월을 광주에 살면서도 바로 이웃한 화순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었는데 정년퇴임 후에야 의미 깊은 사실들을 새로 알게 되었다. 더구나 그것들이 나에게는 중요한 관심사가 되어 그 기쁨이 적지 않다. 발견은 크게 보면 세 가지다.



첫째, 조선 중기에 화순에서 실학연구가 활발했다는 사실이다. 대표적인 실학자는 석당 나경적(1690-1762)과 규남 하백원(1781~1844)이다. 석당은 천문관측기구인 혼천의를 비롯하여 자명종, 자전마, 자전수차 등을 발명하여 중국 학자도 그 능력을 높게 평가하였던 바가 있고, 규남은 동국지도와 만국전도를 제작하여 지식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석당과 유사하게 자명종, 자승거, 계영배 등을 제작하여 실생활에 도움을 주었다.



둘째, 화순을 넘어 호남의 다른 곳에서도 여러 학자들에 의해 실학연구가 진전됨으로써 이 지역에 하나의 학풍을 형성했다는 것이다. 이를 테면, 유형원(1622-1673, 부안), 신경준(1712-1782, 순창), 위백규(1727-1798, 장흥), 황윤석(1729-1791, 고창), 정약용(1762-1836, 강진) 등 천재 실학자들의 행적이 별같이 빛나고 있다. 특히 반계 유형원은 토지 국유제를 주장할 만큼 진보적인 사상을 밑바탕으로 조선 왕조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국방 등 각 부문에 걸친 광범한 개혁정책을 그려냈으며, 후기 실학의 거봉을 이룬 다산 정약용의 경세학은 오늘날에도 한국인의 영혼에 큰 울림을 주고 있다.



그리고 세 번째 발견은 호남에서 실학이 번성한 역사적 사실과는 대조적으로 영남에는 그와 같은 실학의 흐름이 없었다는 점이다. 무엇이 영남에 이러한 실학부재 현상을 초래했는가? 퇴계가 주자학을 천착하여 조선성리학을 정립하는 위업을 이룬 이후, 그 후대들이 이를 절대시하는 도통주의에 빠져 비판자들을 사문난적으로 징벌함으로써 새로운 발전의 싹을 잘라버린 데서 연유했다고 본다. 또한 그 도통의 중심에서 밀려난 호남의 성리학은, 뛰어난 학문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어찌 보면 초라한 변방의 존재로 전락한 위상을 갖게 된 것이 그날의 진실이다.(이 지점에서 일찍이 공맹의 유학이 성리학과 실학의 양면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갈파한 현암 이을호 선생의 관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호남유학의 이와 같이 초라한 자화상은 현대를 사는 지역의 지식인에게 통절한 성찰과 아울러 미래발전을 위한 강인한 도전을 요구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지역 현실에서 우리의 학문세계가 영남유학에 대한 변방성에서 벗어나 독창적이고 주체적 자기발전의 전망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더 구체적으로, 우리들 자신의 학문적 정체성을 굳건하게 정립하여 시대의 어둠을 밝히는 정신세계를 건설하는 길은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위에서 본 역사적 사실은 우리에게 그 길을 자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그것은 영남에 부재하고 호남에 번성했던 실학의 값진 역사문화 자원을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연구하여 호남실학의 체계를 정립함으로써 우리의 학문적 정체성을 강화하는 일에서 출발한다고 본다. 그리고 이 진리와 그 열매의 향기를 지역민이 함께 향유함으로써 정신적으로 당당하고 품격 있는 지역사회를 건설하는데 있다 할 것이다.



그러나 호남실학을 건설하는 일은 복합적인 장기과제이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각 단위지역별로 실학자료를 연구하고 교육하고 재생산하는 작업이 필수적이다. 따라서 호남실학의 굳건한 건설을 위해서는 그 초기단계로서 먼저 화순실학의 기치를 내세워 나아가자는 것이 필자의 제언이다.



왜 화순실학인가? 우선 앞에서도 지적한 대로 화순에는 다른 지역과 달리 두 분의 걸출한 실학자가 활동했으며, 특히 이 분들은 화순군 이서면의 한 마을에서 활동하였다는 사실이 인상적이다. 상호관계의 측면을 볼 때, 석당은 규남 선생의 증조부인 병암 하영창과 친밀한 교우관계를 유지하고 향촌사회의 발전을 위해 서로 협력했다는 기록이 있음을 볼 때, 두 학자 간에 실학의 학문적 연계성을 가늠해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또한 그 실학의 내용이 과학기술적 성격을 갖는다는 점에서 다른 지역 실학자와 차이나는 특성이 있음을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배경에서 볼 때, 화순실학의 건설은 영남유학과 쌍벽을 이루는 호남실학의 체계를 구축하는 출발이고, 더 구체적으로는 안동유학과 함께 발전하는 화순지역 실학의 기치를 드높인다는 학술사적 의미를 갖는다. 또한 이를 통해서 우리 지역민들이 스스로의 정신적 자존감을 드높임으로써 소외와 피해의식으로 상처받은 과거의 자학사관을 뛰어 넘어 이 시대의 정의와 진리를 바탕으로 한 자존사관을 강화하는 길이 열릴 것이라는 희망을 그려본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