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화친과 척화 대립 최근 한반도 정세의 데자뷔
  • 페이스북
  • 유튜브
  • 네이버
  • 인스타그램
  • 카카오플러스
검색 입력폼
김기호의 음악세상
병자호란 화친과 척화 대립 최근 한반도 정세의 데자뷔
김기호의 음악으로 읽는 세상 영화 ‘남한산성’ OST
“우선 백성들 먼저 살려야” 실리
“오랑캐에 고개 숙일 수야” 명분
영화 비장미 극대화한 타악기
  • 입력 : 2018. 06.21(목) 21:00
  • kjpark@jnilbo.com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한 영화 ‘남한산성’에 등장하는 주화파 최명길(이병헌 분·왼쪽)과 척화파 김상헌(김윤석 분). 뉴시스
북한의 연이은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로 인해 한반도의 전쟁위기가 고조되던 지난해 말, TV의 한 시사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한 두 패널이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진보 성향의 유시민 작가는 한반도 내에서의 전쟁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주체는 오직 대한민국이라고 했다. 미국이 무슨 권리로 한반도에서의 전쟁을 우리 정부의 동의 없이 결정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미국과 북한이 이른바 ‘미치광이 전략(Madman Strategy)’으로 폭주하는 상황에서 이성적으로 이를 중재하고 조정할 수 있는 권한과 의무는 오직 대한민국 정부에 있다고 했다.

이른바 보수 성향의 박형준 교수는 우리 정부가 한미동맹의 강화를 위해서 더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한반도 내 전쟁의 가능성이 확실히 높아진 지금의 상황에서 긴밀한 한미관계를 통해 북한을 더욱 강하게 압박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방안이라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강한 힘을 통해 북한의 의도를 확실히 꺾어놓는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대해서 유시민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동시대를 경험하며 살아온 우리도 서로의 생각을 바꾸지 못하는데 하물며 국가 간에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결국은 상대방을 굴복시키겠다는 것인데 그것은 결국 모두를 위험하게 할 수 있다.”

공교롭게도 방송 며칠 전에 본 영화 ‘남한산성’에서 김상헌과 최명길이 벌이던 ‘말(言)의 전쟁’이 떠올랐다.



아들과 전쟁영웅을 시기한 왕, 선조

태조 이성계가 새로운 왕조를 설립한 이후 약 200여년 간 조선에서는 전면적인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 나라 전체는 문약(文弱)에 빠지고 주변국에 대한 경계는 허술했다. 네 차례의 참담한 사화(士禍)를 거치며 침잠해 있던 사림(士林)은 조선 제 14대 임금 선조(宣祖)대에 이르러 정치적 재기에 성공한다.

이황, 조식, 이이 등을 중심으로 학파를 결성한 이들은 비약적인 학문적 성취를 이루지만 붕당(朋黨)간의 정치적 대립은 더욱 심화되었다. 동인과 서인으로 나뉜 사림은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도 합리적 협치를 이루는데 실패한다.

일본(倭)은 100여 년간의 치열한 전국시대를 거치며 군사력을 극대화했다. 포트투갈 무역상을 통해 들여온 조총으로 무장한 오다 노부나가와 그의 부하였던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시대를 통일하기에 이른다.

100여 년간의 전쟁이 끝나자 수많은 일본의 군인들은 실업자가 될 위기에 놓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과 명나라로 눈을 돌린다. 그가 조선에 보낸 통첩의 핵심은 ‘정명가도(征明假道)’, 명을 정벌하려 하니 길을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명과 군신의 외교관계를 맺고 있던 조선에게는 불가능한 요구였고 이는 선전포고나 다름이 없었다.

조선은 동인의 김성일과 서인의 황윤길을 일본에 통신사로 파견한다. 귀국 후 이들이 선조에게 올린 보고의 내용은 완전히 상이했다. 선조실록에 의하면 서인인 황윤길은 풍신수길(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눈빛이 심상치 않으니 저들이 반드시 공격해 올 것이라고 했다. 반면에 동인인 김성일은 풍신수길이 쥐같이 생긴 얼굴이라 감히 전쟁을 일으킬 인물이 못된다고 했다. 조정은 김성일의 보고를 채택한다.

이듬해인 임진년(1592년) 4월13일, 일본은 부산을 함락하고 파죽지세로 한양을 향해 북진한다. 수성에 실패한 성주는 할복하거나 항복하는 자신들의 경험을 기반으로 단기간에 선조를 볼모로 확보함으로써 조선반도 전체를 중국 정벌의 병참기지화 하려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선조는 상상 이상으로 비겁한 왕이었다. 눈물로 매달리는 백성들을 뒤로하고 그는 북쪽으로 피신한다. 전쟁은 장기화됐고 왜군의 물자보급로를 완전히 차단한 이순신의 활약과 명의 개입으로 전세는 역전된다. 일본의 무리한 요구로 협상은 결렬되고 전쟁은 1597년의 정유재란으로 이어졌으나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7년간의 전쟁은 끝이 난다.

선조는 나약하고 비겁할 뿐만 아니라 이순신, 권율 등의 전쟁영웅을 시기할 정도의 열등감에 시달리는 인물이었다. 심지어 북으로 파천한 자신을 대신해 전장을 지킴으로써 백성들의 지지를 받고 있던 아들 광해군을 경계하기에 이른다. 광해군은 결국 왕위에 오르지만 지속적인 정치적 공세에 시달려야 했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선조의 왕비였던 인목왕후를 덕수궁에 가둔 후 배다른 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인다. ‘폐모살제(廢母殺弟)’는 광해군의 발목을 잡았고 결국 인조반정으로 인해 왕위에서 축출된다.

광해군은 재위기간 중 대동법(大同法)을 비롯한 세제개편 등의 선정을 펼쳤고, 특히 외교정책에서 탁견을 보였다. 임진왜란 이후 동아시아의 정세는 크게 변하고 있었다. 명은 쇠락했고 여진족이 건국한 후금은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명과 후금의 대립관계 속에서 광해군은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중립외교정책을 채택한다. 명의 원군으로 파견된 강홍립 장군은 곧바로 후금에 투항했다.

광해군의 직접적인 명령이 있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광해군일기’등에 남아있는 기록 등을 토대로 볼 때 광해군이 중립외교정책을 구사했음은 확실하다. 그리고 이는 ‘재조지은(再造之恩)’, 명의 도움으로 나라를 구했다며 그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서인들의 반발로 인조반정의 빌미가 된다. 쿠데타에 성공한 세력은 전임정권의 모든 치적을 부인해야 했고 초점은 ‘주변 강대국 간의 균형’을 추구한 광해군의 외교정책에 맞춰졌다. 이제 그들은 ‘친명배금(親明排金)’을 핵심가치로 내걸기 시작했다.



인조의 ‘삼궤구고두’

2017년 개봉한 ‘남한산성’은 영화의 시대적 배경을 이렇게 설명한다. “17세기 초,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명과 대립하던 여진은 국호를 청(淸)으로 정하고 조선에게 신하의 나라가 될 것을 강요했다. 조선은 민족의 자존과 명과의 의리를 내세워 청에게 저항했다. 1636년 12월4일, 청의 대군이 압록강을 넘어 서울로 들이닥쳤다. 인조와 신하들은 강화도로 가는 길이 막히자 남한산성으로 몸을 피했다. 그 해 겨울은 추웠고, 눈이 많이 내렸다.”

영화는 청과의 화친을 주장하던 주화파(主和派)의 수장 이조판서 최명길과 결사항전을 주장하던 척화파(斥和派)의 수장 김상헌의 치열한 대립을 핵심 축으로 전개된다. 당시 남한산성의 총 군사 수효는 1만3000여 명이었고 비축한 식량은 한 달을 버티기도 힘겨웠다. 어떤 식으로든 난국을 타개하지 않으면 모두가 굶어 죽거나 얼어 죽을 지경이었다.

남한산성의 절박한 상황을 간파한 청은 두 가지 조건을 내걸고 이를 따르지 않으면 조선의 전 강토가 유린당할 것이라며 조선 조정을 압박했다. 첫째는 임금이 출성하여 용서를 빌고 신하된 성심을 보일 것, 둘째 척화의 주모자들을 결박하여 볼모로 보내라는 것이었다. 화친과 항전의 사이에서 벌이는 최명길과 김상헌의 말(言)의 전쟁은 극한으로 치닫는다.

최명길 “전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살기 위해서는 가지 못할 길이 없습니다.” 김상헌 “삶과 죽음에도 아름다운 자리가 있을진대, 하필 적의 아가리 속이겠나이까?” 최명길 “전하, 저들이 말하는 대의와 명분은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옵니까? 먼저 삶이 있은 후에야 비로소 대의와 명분도 있는 것 아니옵니까?”

결국 인조는 출성을 결심한다. 정축년(丁丑年) 1월30일, 곤룡포(袞龍袍) 대신 남빛으로 된 융복(戎服)을 입은 인조는 소현세자와 함께 수어장대를 나서 한강 동쪽 기슭 삼전도(지금의 송파구 삼전동)로 향한다. 삼궤구고두, 세 번 무릎을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것으로 청의 황제에게 신하가 되기를 맹세하고, 최명길은 치욕의 눈물을 흘리며 이런 임금의 모습을 바라본다.

왕의 굴욕은 그 후 백성들이 겪어야 할 고통에 비하면 새털처럼 가벼운 것이었다. 병자호란은 1637년 1월30일, 47일 만에 끝이 났지만 전쟁 후 50만의 조선인들은 청으로 끌려갔다. 이후 그들이 겪었을 고통과 오욕의 삶은 기록에도 남아있지 않다.



2017년, 새로운 시대의 서막

한창 영화가 상영 중이던 지난해 말, 한반도에는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미국의 정가에는 북한에 대한 ‘코피 터뜨리기 작전(Bloody Nose Strike)’, 이른바 ‘코피전략’의 실행계획이 공공연히 제기되고 양국의 정상은 저자에서나 이뤄질법한 ‘말의 전쟁’을 벌였다. 한반도의 남쪽에서는 전시에 급히 챙겨 나갈 수 있는 ‘생존배낭’이 온라인을 통해 판매되기 시작했다.

앞선 2017년 7월 ‘한반도의 냉전구조 해체와 항구적 평화 정착을 위한 5대 정책 방향’을 제시한 문재인 대통령의 ‘베를린 평화구상’은 또다시 폐기처분되는 것으로 보였다. 그가 자임한 ‘한반도 운전자론’은 수구보수 세력의 비웃음을 사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역사의 도도한 흐름을 막을 순 없었다. 평창 동계올림픽에 북한은 헌법상 국가수반과 최고지도자의 친동생을 축하사절단으로 전격 파견함으로써 관계개선의 의지를 개진했다. 남과 북의 정상은 판문점의 경계석을 사이에 두고 뜨거운 악수를 나누었고, 오랜 친구를 만나듯 ‘통일각’에서 포옹했다. 70여 년간의 적대관계를 유지하던 북한과 미국의 최고지도자는 싱가폴의 센토사 섬에서 새로운 북미관계를 규정하는 문서에 서명했다.

이와 같은 거대한 변화를 거부하는 세력 역시 상존한다. 미국의 기성정치인들은 트럼프의 행보를 평가절하하고 주류 언론 역시 집중포화를 날리고 있다. 일본의 아베정부는 ‘재팬패싱’을 우려하며 좌불안석인 모습이 역력하다.

한국의 이른바 ‘보수’(라는 말에 동의하기 어렵지만)야당과 수구언론은 한국정부의 외교정책을 폄훼하고 비난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한미 정상의 통화시간을 초단위로 재가며 그 의미를 축소했고, 양국 관계에 균열이 생기고 있다고 했다. 방중한 대통령의 외교를 평가절하하고 멀리 중국까지 가서 ‘혼밥’을 하다 왔다고 조롱했다. 마치 21세기 형 ‘친미배중(親美排中)’의 시대를 바라는 것으로 보였다.

북한과의 관계개선이 급물살을 타기 시작하자 그들은 폭주하기 시작했다. 북측 고위급 인사의 방남을 막겠다며 통일대교로 몰려가 도로를 점거하고 농성을 벌였다. 북미 정상 간의 만남마저 ‘보여주기식 쇼’라며 미국의 대북정책 역시 실패로 규정했다. 그들은 6.13 지방선거에서 ‘궤멸’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참패하며 국민의 냉엄한 심판을 받았다.

이념대결의 시대는 종언을 고한지 오래다. 남한의 정부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동북아 시대를 주도하고 있고, 북한 역시 중국에 전적으로 의존하던 기존의 정책에서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통한 21세기형 균형외교로 선회하고 있다. 시대의 거대한 변화를 거부하며 여전히 미국의 ‘재조지은’을 말하고 ‘친미배중’의 가치를 내건 채 한줌 기득권을 유지하려 드는 세력은 역사 속에서 이제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게 될 것이다.

영화 ‘남한산성’에서, 이조판서 최명길은 청의 홍타이치에게 화친을 청하러 떠나기 전 인조에게 간청한다. “환궁하시더라도 예판 김상헌을 절대 버리지 마십시오. 그는 조정에서 유일한 충신입니다.”

국가의 정책, 특히 외교정책은 각자가 추구하는 이념과 가치관에 따라 갈리기 마련이다. 누구의 말이 옳은지는 역사만이 알고 있다. 그러나 모든 판단과 주장은 합리적이고 치밀해야 한다. 그 중심에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이 있어야 하고, 국가와 국민의 이익이 최우선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국가의 위기를 지렛대로 사익을 추구해온 세력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야 하고, 이제 그럴 때도 되었다.

‘남한산성’의 음악은 영화 ‘마지막 황제’로 아카데미 음악상을 수상하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류이치 사카모토가 감독했다. 잔잔한 피아노 선율, 때로는 휘몰아치는 타악기의 박동이 영화의 비장미를 극대화 하고 있다.



문화평론가 김기호의 음악으로 읽는 세상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kjpark@jnilbo.com
김기호의 음악세상 최신기사 TOP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