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 '갈매기섬 비극'
60년 만에 규명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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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 '갈매기섬 비극'
60년 만에 규명되나
한국전쟁 당시 해남보도연맹원 300명 이상 학살
진실화해위, 9월 유해발굴 개시
  • 입력 : 2008. 07.31(목) 00:00
진도 갈매기섬에서 집단 학살된 희생자 유골 중 지상에 노출된 일부를 수습해 관에 안치, 향후 합동 무덤 조성 등에 대비해 임시로 마련한 초분. 진도군 제공
진도군 의신면 수품항에서 쾌속선으로 30여 분 거리에 있는 무인도 '갈매기섬(갈명도)'. 크기가 각기 다른 3개의 섬이 잇닿아 있어 멀리서보면 마치 갈매기나 날개를 펴고 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이같은 이름을 얻었다.

가끔 낚싯배만 찾을 뿐 한가롭던 갈매기섬이 민간인 집단 학살이라는 비극의 현장으로 전락한 것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당시 이승만 정권의 지시를 받은 경찰이 해남 출신 보도연맹원들을 대거 연행, 구금해오다 북한군이 진격해오자 부산으로 퇴각하면서 길목에 있는 갈매기섬에서 집단 학살을 자행한 것이다.

당시 희생자 수에 대해서는 약간의 이견이 있지만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범국민위원회 해남군 유족회는 300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희생자 대부분은 해남군 산이면을 중심으로 북평, 화산, 송지, 삼산면 등지에서 소집된 보도연맹원들로 알려졌다.

하지만 갈매기섬의 민간인 학살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사건 발생 한참 뒤의 일이었다. 경찰이 해남이 아닌 진도의 외딴 섬을 학살 장소로 택한 데다 이곳이 사람의 왕래가 없는 무인도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서슬퍼런 군부독재 시절 공권력의 상징인 경찰에 의해 벌어진 학살사건을 파헤친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 때문에 유족들은 숨진 가족의 시신조차 찾지 못한 채 오랜 세월 가슴에 한을 품고 지내올 수밖에 없었다.

해남군 유족회 관계자는 "당시 경찰에 끌려간 채 소식이 끊긴 가족의 생사를 몰라 발을 동동 구르던 유족들은 2002년 갈매기섬에서 신원을 알 수 없

는 다량의 유골이 발견된 뒤 소문으로만 떠돌던 참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며 "그러나 경찰은 희생자 명단 등 관련 기록 열람을 거부하는 등 유족들의 진실규명 작업을 방해했다"고 말했다.

6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면서 역사의 뒤안길에 묻힐 뻔한 갈매기섬 사건의 진실이 햇빛을 보게 됐다.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안병욱ㆍ이하 진실화해위원회)가 9월부터 진도 갈매기섬에 대한 유해발굴작업을 시작한다.

진실화해위원회는 발굴 작업을 통해 정확한 희생자 규모를 밝혀내는 한편 DNA검사로 신원 파악에도 나설 계획이다. 유해발굴단은 30일 진도 갈매기섬을 찾아 현지답사를 진행하는 등 발빠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진실화해위원회 관계자는 "유해 발굴작업은 갈매기섬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증거 수집 차원에서 이뤄진다"며 "현지에서 이미 상당수의 유골이 발견된만큼 많은 성과를 거둘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갈매기섬 진상규명 작업에 주력해온 향토사학자 박문규(74)씨는 "이번 유해 발굴을 통해 억울하게 희생된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고 유가족들의 아픔이 조금이나마 치유되길 바란다"며 "앞으로 희생자 신원 확인은 물론 집단학살의 전개과정, 갈매기섬까지의 이동경로, 학살일시 등 정확한 사건의 실체가 밝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성원 기자 swpark@jnilbo.com



보도연맹사건 = 좌익 운동을 하다 전향한 사람들로 1949년 전국적으로 조직된 반공단체로 정식 명칭은 '국민보도연맹'이다.

강제적으로 가입이 이뤄졌으며 지역별 할당제가 있어 사상범이 아닌 경우에도 등록되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정부와 경찰은 이들이 북한군과 내통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해남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무차별적인 학살을 단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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