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의 후원(後園)·임효경>움직이는 사랑, 달마산 진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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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칼럼
배움의 후원(後園)·임효경>움직이는 사랑, 달마산 진달래
임효경 완도중 前 교장
  • 입력 : 2025. 04.22(화) 17:14
임효경 완도중 前교장.
온 천지가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 지금은 꽃보다 신록이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아름다운 것도 한 때이고, 우리 마음도 영원하지 않다. 사랑은 늘 움직인다.

초봄엔 여리고 가는 꽃눈을 숭앙했었다. 단단한 가지의 껍질 속에 어쩌면 저러한 것이 나올 수 있을까 신기하고 대견해했던 것이다. 연한 꽃과의 만남을 기다리며 첫사랑처럼 마음이 설렜다.

환하게 세상을 밝히는 벚꽃의 인디안 핑크는 매혹적인 일본 기생을 연상하게 한다. 어린 시절 신작로에서 우연히 마주친 하얀 분칠하고 빨간 입술꼬리를 살짝 올린 화려한 기모노 차림의 기생의 모습은 낯설지만 신비로웠다. 그 음흉함 속에 깃든 묘한 아름다움은 자꾸 흘깃흘깃 뒤돌아보게 했었다.

나의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흠모가 방향을 틀었다. 남쪽 바다 해남 쪽으로. 광주 한국산학협동연구회 일원으로 해남 달마산을 다녀왔다. 비가 오려는지 잔뜩 흐린 지난 토요일 아침, 40여명의 회원들과 광주 시청에서 만나 버스에 몸을 싣고 남쪽으로 달렸다. 미황사가 자리하고 있는 달마산에 명품길이 있다. 달마고도라 칭한다.

2017년 봄 어느 날엔가 그 길이 막 조성되며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기 전에 한번 다녀왔기에, 반가운 마음이 먼저 앞서가는 길이었다. 그 당시 미황사 주지스님이 대중에게 보시(報施)하는 마음으로 이 길을 만드셨다 했다. 제주 올레길 등 순례길과 산책길이 여기저기 만들어지던 차, 달마가 다녀갈 정도로 수려한 경관과 기(氣)가 승한 이 달마산을 사람들에게 선물해 주고 싶으셨다 했다. 자연을 크게 훼손하지 않기 위해 사람의 손으로만, 일일이 곡괭이, 삽과 호미로 조성했다 했다. 그렇게 조성된 길이라 좁고 돌덩이들이 발끝에 걸렸었지만, 오히려 그 수고로움이 마음 끝에 닿아 숙연해지게 했었다.

가파르게 깎아지른 절벽과 특별히 바다를 내려다보며 걷는 능선은 가히 남도의 소금강이라 칭할 만하다. 거기에 산약초의 향내와 다양한 산꽃들의 호위를 받으며 걷다 보면 어느새 수련을 받는 듯 내 몸이 가벼워진다. 눈은 자연스레 하늘과 맞닿고, 지척의 남도바다 내음과 바람의 소리를 느끼다 보면 콧노래가 흥얼흥얼 나오게 된다.

달마고도, 그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참 신박하다고 생각했다. ‘차마고도’를 연상하게 했고, 매일매일 삶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멀고 먼 길나서는 우리네 삶을 반영하는 듯했기 때문이다. 그 길이 괴롭고 험하기만 하면 금방 무너지겠지만, 때로 바람이 불어 땀을 식혀주고, 마르지 않는 샘이 있어 갈증을 해갈시켜 주고, 구름이 햇빛을 가려주며, 아름다운 꽃들과 나무들이 숨과 쉼을 허락해 주기도 한다. 그래서 다시 일어나 걷고 끝내 목적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 우리네 삶의 여정이지 않은가?

달마산의 기상이 그러했다. 원래 도솔암 주차장에서 시작해 미황사로 돌아오면 되는 산행이었다. 산악대장님이 A코스는 매우 가파른 절벽이 있어 험악하고 난이도가 최상이라고 겁을 줬다. 중간에 줄타기 유격훈련도 감수해야 한다 했다. 나는 나의 기량과 체력에 맞게 B코스를 선택해 달마고도만 천천히 걸으려 했었다. 그런데 주차장에서 눈을 들면 보이는 도솔암이 바로 400m 거리에 있다고 하니, 거기까지는 올라가 보자고 했던 것이 문제였다. 가파른 길이지만 올라갈 만했다. 도솔암 앞에 펼쳐진 멋진 풍광에 환호성을 지르는 사이, 바다를 내려다보며 걸을 수 있다는 능선길이 바로 옆길에서 우리를 유혹했다. 우리는 그 유혹을 떨치지 못했다.

중간에 몇 번 유격훈련처럼 줄을 타고 90도 가파른 벼랑을 내려가야 했다. 그렇지만 그 고생은 보람을 안겨줬다. 지천에 진달래꽃 잔치가 열리고 있었다. 바다가 내려다보이고, 진회색 가파른 바위가 여러 형상을 보여주고 있고, 약간 흐린 날씨에 바람도 한 몫을 하고 있는 풍광 속에서 단연 주인공은 진달래였다. 다투듯이 활짝 핀 진달래 수만 송이 능선 길을 걷다가, 뒤돌아보면 산 전체가 한 폭의 진달래 수채화였다. 황홀했다.

나의 사랑이 또 움직였다. 나는 진달래와 짝사랑을 시작했다. 한차례 살짝 지나간 비를 맞으며 벼랑 끝 바위 사이에 뿌리내리고 위태롭게 피어있는 한 진달래 여인이 있었다. 회색빛 하늘과 암석을 배경으로 진달래색을 투명하게 발하고 있는 그 아름다운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차마 이룰 수 없는 사랑인 줄 알았는데, 선심을 쓰듯 내 마음에 쏙 들어오는 사진을 허락해 주니 나는 여한이 없었다. 혼자 한 사랑을 이룬 것처럼 기뻤다.

풍광에 취해 걷다 보니 때를 놓치고 배가 고팠다. 삼삼오오 나뉘어 옴팡한 곳에 자리를 깔고 늦은 점심을 먹었다. 깻잎 김밥, 향긋한 두릅과 감칠맛 나는 물김치, 완두콩 가득한 찰밥, 진한 호박죽과 과일을 나눠 먹고 막걸리도 한 순배했다. 배부르고 만족해 하늘을 올려다보니, 세상에, 가늘고 긴 가지 끝에 핀 진달래 꽃송이들이 우리를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저렇게 예쁜 진달래 여인 밑에서 도시락을 나누며 행복을 누리는 호사가 어디 쉬운가?

달마산 품속에서 노닐다가 숲길을 걷고 내려오니, 굵은 비가 쏟아졌다. 그것도 고마웠다. 잘 가라고, 봄 가뭄을 좀 이겨내라고 손을 흔들어 주는 달마산, 또 올게. 안녕, 내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