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의 러시아
대릴 커닝엄 | 어크로스 | 1만7000원
'전 세계를 혼란에 빠트린 독재자, 개혁과 좌절의 러시아 현대사의 상징, 레닌그라드의 불량아에서 크렘린의 일인자가 된 인물…'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의 별명들이다.
1952년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난 푸틴은 KGB가 되길 꿈꾸며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KGB 요원이 되어서는 동독 드레스덴에 파견 돼 비밀경찰 슈타지와 러시아의 연락책으로 일했다. 1991년 소련 해체 후 정경유착과 부정부패가 만연하는 상황에서 푸틴의 지위는 상승하기 시작한다. 푸틴은 퇴임 후 자신을 지켜줄 후임자를 찾던 보리스 옐친의 눈에 들어 1999년 대통령 권한대행에 지명되었고, 2000년 러시아 대통령에 오른다.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작가이면서 영국의 비판적 저널리스트인 대릴 커닝엄의 신간 '푸틴의 러시아'는 푸틴이 무소불위의 독재자로 등극하는 과정을 그래픽노블로 담아낸 책이다.
책은 냉전 말기 개혁개방, 소련 해체 후의 정경유착, 21세기 지정학적 분쟁 등 러시아의 굴곡진 현대사를 타고 푸틴이 무소불위의 독재자로 등극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펼치고 있다.
푸틴의 권력 쟁취 과정을 추적하고 그가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벌인 일들도 조명한다. 막강한 재력을 바탕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러시아의 신흥 재벌 올리가르히를 숙청한 것도 그중 하나다. 2004년 베슬란 학교 테러 참사나 2014년 크름반도(크림반도) 합병 등 국내외 사건과 함께 이민자와 동성애자 혐오 정서를 부추긴 사례도 짚는다.
2006년 런던에서 벌어진 알렉산더 리트비넨코 독살 사건(일명 '방사능 홍차 사건'), 2016년 미국 대선을 둘러싼 러시아 개입 의혹, 2018년 솔즈베리 독살 시도 사건 등도 조목조목 다루고 있다.
해외를 통한 막대한 규모의 자금 세탁도 이 책이 파고드는 이슈다. 저자는 지난 수십 년간 러시아의 돈이 서구권으로 흘러들어 사업가와 정치인을 매수하고, 정치 체계를 교란했으며, 독재주의의 발흥을 지원했다고 비판한다. 푸틴이 전 세계 악당들을 후원하여 그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으며, 그의 성공이 다른 이들에게 본보기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푸틴은 또 주변국과 전쟁을 벌여 지구촌까지 위험하게 만들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크름반도 합병 이후 끊임없이 내홍에 시달려왔고, 조지아 남오세티야 주민 수천 명은 전쟁의 여파로 삶의 터전을 잃었다. 시리아에서는 화학무기가 무차별적으로 사용된다는 의혹까지 일고 있다.
여기에 더해 푸틴은 지난 2020년 헌법 개정을 통해 2036년까지 집권 연장의 토대를 마련했다. 같은 해 연말에는 러시아의 대통령과 가족들에게 평생 형사고발 대상에서 제외되는 면책권을 부여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심판받지 않는 권력을 점차 손에 넣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2022년 2월,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옛 소련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서라는 관점이 지배적이다.
침공 직후 새로 쓴 서문에서 저자는 서구의 여러 나라들이 푸틴이란 인물에 대해 그동안 잘못 판단해 온 것이 지금의 사태를 불러왔다고 통렬히 지적한다. 푸틴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똑똑하고 계산적인 인물이 아니라 망상가, 독재자일 뿐이라는 것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떠나 지금 동북아시아는 어느 때보다 지정학적 갈등이 높다. 푸틴을 둘러싼 해묵은 신화를 벗겨내고, 그의 실체를 간결하고 신랄하게 파헤치는 책, 푸틴의 러시아. 무두의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