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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노영기> '불법(不法)'과 '무법(無法)'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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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노영기> '불법(不法)'과 '무법(無法)'의 비극

노영기 조선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게재 2022-06-29 13:41:12

노영기 교수
노영기 교수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불법'은 "법에 어긋남"으로, '무법'은 "법이나 제도가 확립되지 않고 질서가 문란함"으로 정의한다. 옛날부터 인류는 법을 만들어 시행해왔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담고 있는 함무라비 법전이 대표적 예이다. 간혹 악법에 저항하는 선각자들이 있었으나, 사람들은 대체로 법을 지키려 노력해 왔다. 왜 이토록 법을 지키려 했을까? 법이 최소한의 장치이며 수단으로, 그나마 법이 없다면 세상은 강자만 살아남는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국 현대사에서 불법과 무법이 합법인 것처럼 작동하던 적이 의외로 많다. 5·18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지만, 1948년 10월 19일 여순사건이 발생한 직후 전남 동부지역에서도 그랬다. 아니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여순사건 직후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고위 인사들은 날마다 경쟁하듯 강경 발언을 쏟아냈다. 말이 총알처럼 공표됐으며, 단순히 말로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여순사건이 발생하자 정부는 곧바로 전남북과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미 10월 17일부터 제주도에서는 군이 해안선으로부터 5km 벗어난 지역을 통행금지 시켰지만 여순사건을 계기로 계엄령을 선포했다. 전남북 지역에서는 계엄령과 함께 '부역자 처벌'이 시작됐다. 계엄령의 가장 큰 특징은 군이 민간사회를 지배하는 것이다. 군이 언론을 검열하여 정보를 감추거나 비틀고, 집회·시위와 거주 이전의 자유도 빼앗으며, 군인들이 입법, 사법, 행정 등 모든 권력을 통제한다.

여순사건 직후 선포된 계엄령은 '불법'과 '무법'의 극치였다. 계엄법이 국회를 통과된 때는 1949년 11월 24일(법률 제69호)이다. 여순사건 직후에는 법도 없이 대통령이나 군의 명령에 의해 계엄령이 선포된 것이다. '불법'과 '무법' 아래 '부역자 처벌'이 이루어지고, 현지 주민들은 그곳에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처벌받았다. 어떤 증거나 혐의의 입증 없이 군이 주민들을 '즉결심판'할 수 있는 게 계엄령이다. 5·18 때도 그러했지만, 여순사건 때는 더욱 심했다. 그야말로 '징글징글한' 계엄령이었다.

"형사피고인은 상당한 이유가 없는 한 지체 없이 공개재판을 받을 권리(헌법 제24조)"는 총구 앞에 무시됐다. 군법회의에 회부된 주민들에게 적용된 법은 '국방경비법(國防警備法)'이었다. 국가보안법(1948년 12월 1일 제정)도 군 형법(1963년 1월 20일 제정)도 없던 시절이기에 공포된 적도 없는 미군정의 '유령법'인 국방경비법이 대신했다. 유령법의 위세는 사람들의 상상을 넘어섰다. 사형부터 징역형에 이르기까지 선고 형량은 가혹했고, 사형 판결은 곧바로 집행됐다. 주민들의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군법회의는 짧은 시간에 많은 사람들을 판결하는 '날림'과 '졸속'의 계속이었고, 애초부터 '항소와 상고'는 고려되지 않았다. 최근 들어 제주도와 여수 등지의 피해자 유족들이 재심을 청구해도 처벌받은 기록조차 남지 않았다. 피해자들은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 만큼 많았음에도 그 억울함을 확인할 기록조차 없다. 국방경비법도 무시무시했지만, 아예 법도 없이 군인들의 의해 주민들의 삶과 죽음이 결정되기도 했다. 이 억울한 죽음들은 '빨갱이 처벌'로 둔갑해 정당한 것 인양 꾸며지고 유족들은 '빨갱이 가족(연좌)'이라는 사슬에 묶여 침묵을 강요당했다.

여순사건이나 제주4·3사건 피해자들의 명예회복은 '불법'과 '무법'으로 얼룩진 과거와의 단절을 뜻한다. 지난 6월 7일부터 15일까지 한국을 방문해 과거사 관련 피해자를 만나고 장소를 방문했던 유엔인권이사회 특별보고관은 한국을 떠나며 "(한국)정부가 모든 인권 침해와 모든 희생자의 고통이 적절하게 조사되고, 인정되고, 기념되도록 보장할 것을 촉구한다"고 했다. 그만큼 아직까지 잘못된 과거와의 단절이 충분치 않다는 뜻이다. '국격'을 이야기하려면 과거사 청산도 '국제기준'에 맞춰야 한다.

그나마 4·3사건은 부족하지만 일정 부분 진상조사가 이루어졌으나 여순사건은 이제 첫발을 내딛었다. 74년의 세월만큼 피해자들과 그 유족들이 겪었을 아픔과 고통은 짐작조차 어렵다. 뒤늦게라도 진상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져 과거의 잘못이 고쳐지고 피해자들과 유족들의 피눈물이 조금이나마 씻겨지길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