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억 대륙에 뜬 '南道의 별' 정율성 음악혼 光州에 오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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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기획
13억 대륙에 뜬 '南道의 별' 정율성 음악혼 光州에 오롯
한중수교 30주년 기획 차이 나는 남도-중국 인연자원 ① / 신 중국 창건 100대 영웅 정율성||연안송·연수요·팔로군가 등 창작 ||혁명가이자 항일 음악전사로 추앙||新 중국 창건 100대 영웅에 선정 ||양림교회~옛집 정율성 거리 조성 ||하얼빈기념관과 같은 동상 세워
  • 입력 : 2022. 06.07(화) 17:48
  • 최도철 기자

광주 출신으로 중국 현대 음악의 3대 음악가로 칭송받고 있는 정율성 선생 기념사업 일환으로 남구 양림동 일대에 조성된 '정율성로' 전경.

항일 음악전사 정율성의 생전 모습

중국 호남성 창사에서 열린 정율성 축제

중국 정율성 하얼빈 기념관

1992년 8월 24일 베이징에서 이상옥 한국 외무장관과 첸치천(錢其琛) 중국 외교부장이 양국 수교 공동성명에 서명해 두 나라 관계에 새 장을 열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2022년 올해는 중국과 공식수교를 맺은 지 30년이 되는 해이다.

한중 수교 30주년을 기념해 신 중국 창건 100대 영웅 정율성, 세계 3대 중국 기행문 '표해록'의 저자 금남 최부, 명나라 장군 진린 사당인 해남 황조별묘, 조명 연합수군 함성 울려 퍼진 여수 묘도 등 남도 곳곳에 오롯이 남아 있는 중국 인연자원을 차례로 살펴본다.

수년 전부터 '중국과 친해지기' 정책을 통해 한·중 우호의 노둣돌을 놓고 있는 항일과 민주, 문화예술의 도시 광주는 신 중국 창건 100대 영웅이자 항일 음악전사인 광주 출신 정율성을 기리는 '정율성축제'를 한국과 중국의 주요 도시에서 개최했다.

광주와 중국의 인연은 다양하지만, 정율성이 단연 독보적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은 2014년 한국을 국빈 방문해 서울대 강연에서 한·중 역사 우호 인물을 열거하면서 정율성 을 언급했다.

광주시는 정율성의 생가, 옛집, 유년 시절의 거리를 조성한데 이어 중국과 광주에서 정율성 축제, 찾아가는 정율성 음악제, 사진전, 학술 심포지엄 등을 개최하고 있다.

우리나라보다 중국에서 더 많이 알려진 정율성이 태어나고 자란 곳은 광주 동구 불로동 163번지 일대이다. 부친 정해업이 1912년부터 소유했던 자택으로 정율성 형제들이 거주했다. 1914년 이 집에서 정율성이 태어난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정 선생은 중국 내 각종 문서에 자신이 태어난 곳을 양림동으로 기록하고 있다. 선생이 태어날 당시 양림동과 불로동은 같은 마을인데다, 광주천을 사이에 두고 있어 지금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불로동 옛집은 우물과 석류나무가 존재하고 있으며, 집 주변에 선생의 일대기를 볼 수 있는 사진들과 탄생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광주시는 불로동 옛집을 정율성 선생 유적지로 관리하고 있다.

정율성은 1917년 화순으로 이주, 1922년 능주초등학교에서 1년을 다녔으며, 이후 광주로 전학, 1928년 광주 숭일학교를 졸업했다. 화순에서 거주하던 7~8년 동안 그는 한국의 전통음악을 가르치는 학습소를 지나다니며 민속음악과 가락을 몸으로 익혔다. 1929년 전주 신흥중학교에 입학했으나 경제난으로 중도에 학업을 포기했다.

숭일학교는 양림동 일대에 존재했는데, 지금은 흔적조차도 남아 있지 않다. 숭일학교는 정율성이 유일하게 졸업한 학교이지만, 아쉽게도 졸업장과 학적부가 한국전쟁 중에 불에 타고 말았다. 이후 1929년 전주 신흥학교(현 신흥중학교)에 입학하지만, 1932년 중퇴했다.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은 광주 남구 양림동이다. 외삼촌인 오방 최흥종 목사 집에서 하루 종일 세계명곡을 들으며 음악적 흥취에 빠져 들었다. 양림교회에서는 선교사를 통해 서양 음악을 접했으며, 찬송가를 부르고 악기를 연주하면서 음악가로서의 소양을 쌓았다.

광주 남구청은 양림교회~정율성 옛집에 이르는 거리를 '정율성 거리'로 조성하고 그의 대표작인 연안송 악보와 연주음악, 삶의 자취를 볼 수 있는 사진을 전시하고 있다. 또 정율성 거리 입구에 중국 하얼빈 정율성 기념관에 있는 동상과 같은 동상을 세웠다.

정율성이 유년 시절 보낸 양림동은 다양한 문화가 공존했다. 1904년부터 미국 선교사들이 선교, 교육, 의료 사업을 펼쳤으며, 이들이 세운 숭일학교와 수피아학교는 항일 운동의 근거지 역할을 했다. 정율성은 양림동에서 서양음악과 민족의식을 키워나갔다. 그가 진학한 전주 신흥중학교도 미국 남장로교에서 세운 학교였다. 정율성이 기독교 계열 학교에 다닌 것은 아버지 정해업이 수피아 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한데다, 외삼촌인 최흥종, 최영욱이 기독교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율성의 형제는 5남 3녀로, 큰형 효룡(孝龍)은 항일 투쟁을 벌이다 두 차례나 옥고를 치른 독립투사였으며, 작은 형 충룡(忠龍)은 중국으로 건너가 운남강무학교를 졸업한 뒤 국민혁명군 장교로 북벌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했다. 나머지 누나와 형도 모두 중국 대륙에서 항일투쟁을 벌였다.

1933년 정율성은 형 정의은의 권유로 중국으로 건너갔다. 정율성은 당시 남경에 세워진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2기생으로 입학한 뒤 1936년 졸업해 상해와 남경 일대에서 비밀공작업무를 했다. 간부학교는 의열단을 조직하고 조선의용대를 창설한 약산 김원봉이 세운 항일 무장조직 간부육성학교로 중국에 세워진 최초 한인 군사학교였다.

그러다 매형 박건웅과 김산, 운암 김성숙이 주도한 '조선민족해방동맹'에 가입한 뒤 1937년 해맹 특사로 연안으로 들어가 항일투쟁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는 1938년 불멸의 명곡 '연안송'을 창작한데 이어 1939년 '연수요', '팔로군 대합창'을 잇따라 발표, 혁명음악가로 우뚝 섰다. 특히 팔로군 대합창 중 '팔로군 행진곡'은 1988년 등소평 주석에 의해 '중국인민해방군 군가'로 공식 비준됐다.

그는 1940년부터 45년까지 태항산 일대에서 조선의용대·조선의용군으로 무장투쟁을 전개했으며, 해방 후 북한으로 들어가 해주음악학교를 설립하는 등 다양한 음악활동을 벌였다. 정율성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중국으로 다시 건너가 동요, 군가, 오페라 등을 작곡했다. 하지만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다시 창작열을 불태우던 1976년 12월 뜻하지 않게 사망하고 말았다. 중국 정부는 지난 2009년 신 중국 창건에 기여한 100대 영웅으로 선정했으며, 하얼빈에 정율성 기념전시관을 개관했다.

어린 시절 꿈이 서린 화순 능주초등학교와 광주 양림동에는 선생의 흉상이 세워져 혁명음악가이자 항일음악전사로 추앙받고 있다.

최도철 기자 docheol.choi@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