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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노휘의 길 위의 인생 72> '섬안의 섬' 고즈넉한 '우도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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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노휘의 길 위의 인생 72> '섬안의 섬' 고즈넉한 '우도 풍경'

놀멍 쉬멍 걸으멍, 걸어서 제주 한 바퀴, 제주 올레길- 섬 속의 섬, 제주올레1-1 우도(11.3km) 천진항에서 하우목동항까지
서빈백사, 우도봉과 그 아래 몽돌해변, 검멀레 해수욕장

게재 2022-03-10 16:45:28

섬은 가끔 제 스스로 텔레파시를 보내 사람을 유혹한다. 섬 스스로 고독이란 DNA가 있어 견디는 일이 극에 달하면 먹먹하고, 무료하고, 한 없이 나약한 영혼을 불러댄다. 올해 겨울, 제주도가 그랬다. 하릴없이 먼 곳을 응시하는 일이 많던 내 안에 바람 한 점이 훅 들어왔다. 나는 또 길을 나섰다. 천천히 랜딩기어가 작동하는 비행기 안에서, 제주도가 나를 불렀다는 것을 확신했다. 바람과 막막함, 낯선 풍경들이 미리 말을 걸어왔다. 말쑥한 건물과 건물사이, 햇살이 튀어 오르는 돌담과 돌담 사이, 도랑과 도랑 사이에 거리가 펼쳐졌다. 때로는 북적거리며 사람들이 걷고 때로는 적막이 머물기도 했다. 처음과 끝을 연결하듯 반복적인 루트를 제공하듯 조용히 드러누워 있는 거리였다. 수많은 거리를 통과하여 내가 당도한 곳은 섬 안의 섬 우도였다.

푸르다 못해 시퍼런 우도 바다
푸르다 못해 시퍼런 우도 바다

우도(牛島) - 개들의 시간

성산 일출봉 아래 성산포항 여객선터미널에서 십오 분 배를 타고 도착한 우도. 제주도 동쪽 끝. 성산포에서 북동쪽으로 약 3.8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섬 속의 섬 우도. 섬 모습이 마치 소가 누워 있거나 머리를 내민 모양 같다고 해서 우도(牛島)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여객선에서 내린 나는 여행객 무리에서 빠져나와 올레 리본을 따라 섬을 한 바퀴 돌기 시작했다. 희다 못해 순결하게 느껴지는 서빈백사, 우도봉과 그 아래 몽돌해변, 검멀레 해수욕장을 숨 가쁘게 돌았다. 드디어 마지막 여행객들이 다섯 시 막배로 섬을 빠져나가자 섬만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이곳은 다른 시간대의 두 가지 풍경이 존재했다.

첫 번째 풍경은 첫 배가 들어오고 막배가 나가는 오전 9시부터 5시까지였다. 관광객들이 해안도로와 연결된 올레길(1-1)을 북적거리게 했다. 이른바 관광객들의 시간이었다. 해안도로를 따라 띄엄띄엄 자리한 앙증맞은 카페와 식당은 그 시간에 맞춰 문을 열고 닫았다. 일몰과 함께 썰물처럼 이들이 밀려나가면 적막한 어둠이 찾아왔다. 어둠을 방패삼아 어슬렁거리는 그림자들이 있었다. 두 번째 우도의 풍경인 '개들의 시간'이 시작된 것이다.

우도에 여장을 푼 첫날, 해가 저물고 나서는 제일 늦게 문을 닫는다(오후 9시)는 펜션 옆 식당에서 땅콩 막걸리를 마시고 숙소로 돌아와 간당간당 터지는 와이파이로 음악을 들었다. 어둠이 짙어질수록 세를 불린 바람이 창문을 흔들어 대고 바람에 비껴간 개들의 하울링이 파도소리에 간간이 끼어들었다.

우도봉에서 바라본 우도. 차노휘
우도봉에서 바라본 우도. 차노휘

우도봉을 오르면서 보았던 햇살에 반짝이며 하늘거리며 우아한 자태를 뽐내던, 억새풀과 다른 반전이었다. 고음에서 시작되어 주변으로 퍼지는 하울링은 내 내면 깊숙하게 숨겨놓은 원시성을 건드리면서 손가락을 간지럽게 했다. 노트북을 가지고 오지 않은 아쉬움과 일초도 이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는 긴장감 사이에서 졸음이 넘나들었다. 잠깐 눈을 붙였다고 생각하며 눈을 떴다. 흡사 검청빛 새틴이 펼쳐진 듯한 바다와 그 수평선에 도열된 불빛들. 서서히 그 빛이 유리를 물들였다. 바로 창문 위에 떠 있는 달도 청빛을 품었다. 서서히 바다는 물결을 드러냈다. 나는 트레이닝복을 입고 밖으로 나섰다. 하울링이 혹 개가 아닌 다른 무엇이 내는 소리는 아닐까, 잠깐 궁금했다.

아니나 다를까 나보다 먼저 빈 거리를 점령한 것은 개들이었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강아지들까지 합해 열 마리 정도 되는 녀석들은 밤새 싸돌아다녔는지 분탕한 기운을 발산했다. 앞서 걷던 커플은 개들을 피해서 거리를 벗어났지만 나는 그들 사이로 서서히 들어갔다.

보리밭을 뛰노는 개들. 차노휘
보리밭을 뛰노는 개들. 차노휘
홍조단괴. 차노휘
홍조단괴. 차노휘

펜션을 벗어나 해안도로를 따라 걷다가 왼쪽으로 나 있는 낮은 둔덕길로 접어들었다. 둔덕은 청보리, 마늘, 땅콩이 자라는 검붉은 흙밭이었다. 밭과 묘지 주위에 쌓아놓은 현무암 돌담은 밭보다 더 검었다. 내가 둔덕길로 들어서자 개들은 잠시 멈칫하더니 해안도로로 향했다. 하지만 두 마리가 내 뒤꽁무니를 따라나섰다. 녀석들은 곧 익숙한 길이라는 듯 청보리나 마늘밭에서 겅중겅중 뛰면서 싸움하듯 장난을 쳤다. 이들의 유쾌한 몸짓을 지켜보다가 지붕 낮은 인가로 들어섰다. 그러자 한 녀석이 재빨리 뒤꽁무니를 뺐다. 녀석을 향하기라도 하듯 인가에 묶인 개들이 사력을 다해 짖어댔다. 줄이 풀리면 금방이라도 사단을 낼 것 같은 날카롭고 적의에 찬 울부짖음이었다. 인가의 개가 거리의 개를 향해 짖었다. 거리의 개는 꽁무니를 뺐지만 딱히 도망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다만 괜한 귀찮음을 피하기라도 하듯 총총히 멀어져 갈 뿐이었다.

집담이 있는 골목. 차노휘
집담이 있는 골목. 차노휘

해가 완전히 산중턱에 올라왔을 때에야 출발지였던 펜션 앞 하얀 알갱이(홍조단괴) 해변 가에 도착했다. 흡사 긴 라면 줄기를 주물럭주물럭 동그랗게 말아 놓은 것 같은 홍조단괴는 깨끗했다. 그 순백색으로 밀려오는 물빛은 그야말로 투명했다. 투명한 물빛 뒤를 에메랄드빛 물살이,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짙은 다시마 색 물살이 그 꽁무니를 이었다.

나는 물살을 보며 해안가에 앉았다. 내가 편하게 앉자 내내 나를 따라왔던 녀석도 배 깔고 등 뒤에서 자리를 잡더니 코를 골기 시작했다. 연이어 밀려오는 밀물처럼 생각 뭉치들이 발밑으로 쏟아졌다. 끊임없이 밀려드는 에메랄드빛 물살이 홍조단괴에 머물렀다가 뒤로 내뺐다. 적막하고 아름다워서 세상 속에 녹아들 것 같지 않은 풍경이었다. 볼수록 투명한 푸른빛은 현실을 외면하려는 환상의 베일처럼 보였다. 손을 뻗어 만져보려다가 만지면 사라질 것 같아 뒤로 물러났다.

우도 옛등대가 있는 풍경. 차노휘
우도 옛등대가 있는 풍경. 차노휘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더 이상 인가의 개들이 짖어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대신 등 뒤 해안도로가 다른 리듬으로 소란스러웠다. 상점 문 여는 소리, 관광객이 타는 ATV 소리… 긴 밤 불 꺼진 편의점도 불을 밝혔을 것 같았다. 내 등 뒤에서 곤하게 잠을 자던 녀석은 어느새 먼발치에서 나를 보고 있었다. 녀석과 나 사이에는 관광객들로 북적거렸다. 이제 개들의 시간이 아닌 관광객의 시간이 된 것이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녀석과 일별하고는 숙소로 돌아섰다. 나도 떠날 때가 된 것이다. 아니 돌아갈 때가 된 것이다. 등 뒤로 밀쳐 두었던 세상과 당당하게 대면할 시간이 된 것이다. 차노휘〈소설가, 도보여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