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광복 후 일제와 가장 치열하게 싸운 여전사, 이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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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샘의 남도역사 이야기
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광복 후 일제와 가장 치열하게 싸운 여전사, 이금주
이금주 여사, 1920년 평양 출생 공립학교서 수학||결혼후 남편 일본군 강제징용, 광복 4달 전 전사||태평양전쟁희생자전국유족회 광주지부장으로 활동||30년간 80여 회 도일, 日 법원에 소송 7건 지휘||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특별법 제정 청원||정부 ‘국민훈장 모란장’ 수여, 2021년 순천서 영면
  • 입력 : 2022. 02.16(수) 16:36
  • 최도철 기자

관부재판 승소 판결을 보도한 일본 아사히(朝日)신문, 맨 앞의 인물이 이금주 회장

태평양전쟁 유족회 광주시지부 사무실 앞에 선 이금주 회장

관부재판을 지원하는 이금주 회장(오른쪽에서 두 번째)

태평양전쟁 유족회 광주시지부

남편의 전사통지서가 날아오다

태평양전쟁희생자광주유족회 회장 이금주(李錦珠, 1920~2021)는 보통 여인이 아니었다. 광복 후 일본의 강제 징용에 대한 사과와 배상, 강제 징용당한 분들의 명예 회복을 위해 도쿄·시모노세키‧나고야 등의 일본 법원에 7건의 소송을 직접 진두지휘한 여전사였다. 70세가 넘는 고령으로 일본을 건너간 횟수만도 80여 회를 넘는다. 소송은 패소로 이어졌지만, 절망하지 않고 30여 년을 버텨냈던 것은 징용으로 끌려가 사망한 남편과 피해 유가족의 명예 회복에 대한 간절함 때문이었다.

이금주는 1920년 평양에서 6형제 중 맏이로 태어나 평양부 남산 여자공립보통학교를 다녔다. 아버지가 당시 조선철도주식회사 업무과장으로 퇴임한 걸 보면 가정은 유복한 편이었던 것 같다. 1940년, 21살의 나이에 김도민과 결혼한 후 남편의 고향인 평안북도 강계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한다. 그리고 1942년 3월, 맏아들이 태어난다. 몇 대에 걸쳐 독자로 이어오던 집안이어서 가문의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금주의 행복은 여기까지였다. 결혼한 지 2년도 채 되지 않은 1942년 11월, 남편이 일본 해군 군속으로 일본군에 징용되었기 때문이다.

김도민은 아들의 팔을 잡고 "건강하게 있어라"하고 집을 나갔고, 이금주는 실신 상태가 되어 떠나가는 남편의 구두 발자국 소리만 들어야 했다.

서울 친정집으로 거처를 옮긴 이금주는 남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한 달에 한 번씩 오는 남편의 편지만이 최고의 기쁨이었고 위로였다. 그런데 편지마저도 9개월 뒤에는 끊어진다. 그리고 1945년 4월, 광복 4달을 남긴 어느 날 남편의 전사 통지서가 날아든다. 김도민의 실제 전사일은 1943년 11월 25일, 태평양 한복판에 있는 길버트 제도의 타라와섬이었다.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광주지부를 이끌다

광복 후 이금주는 교원 시험에 합격한 후 서울 서대문구에 위치한 가명(加明)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는다. 낮에는 학생들을 가르쳤고, 밤에는 학교 앞에 있는 고무공장 직공들을 가르쳤다. 야학 교사까지 한 것이다. 그의 서울에서의 교직 생활을 길지 않았다. 1948년 친정아버지가 전남여객 전무 취체역(取締役, 이사)으로 일하게 되자, 친정아버지를 따라 광주로 내려왔기 때문이다. 광주와 인연을 맺게 연유다.

그녀가 태평양전쟁 희생자 유족들을 위해 뛰어들었던 것은 "전쟁 피해자는 순천의 극장에 모여라"라는 신문에 난 보도를 접하고서였다. 당시 그녀의 나이 53세, 1973년이었다. 순천 극장의 집회에서 일제 희생자 유가족들이 만나 "힘을 합쳐 싸워야 한다"는 결의를 했지만, 박정희·전두환 정권은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이들의 집회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다. 한·일협정으로 배상이 끝났다는 일본의 심경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1988년 6월, '태평양전쟁희생자전국유족회'가 결성되자, 이금주는 서울 중앙 유족회의 이사, 광주지부의 지부장을 맡는다. 1990년 유족회 회원들은 부산을 출발, 서울의 일본 대사관까지 걸어 시위행진을 했다. 부산을 출발한 지 30일이 되는 날, 일본 대사관에 도착하여 사죄와 배상을 촉구했다. 이금주가 앞장섰음은 물론이다.

1990년 12월, '태평양전쟁희생자광주유족회'가 결성되자 회장이 된다. 그녀의 나이 71세였다. 변변한 사무실 한 칸도 마련하기 힘든 시절, 그녀의 남구 진월동 410-4번지 자택은 마음 의지할 데 없는 일제 강제 동원 피해자와 유족들의 사랑방이었다. 일흔이 넘은 할머니 이금주는 남구에 있는 집을 사무실 삼아 강제징용 피해자와 가족 등 1,273명을 직접 만나 피해 사실(증언)을 손글씨로 일일이 정리했다. 이는 이후 이른바 '천인 소송'과 '관부재판' 등 일본 사법부에 제소한 소송 7건의 기초 자료가 된다. 그녀가 사망하기 직전까지, 30년 동안이었다.

일본을 80번 넘게 찾다

이금주는 손수 정리한 자료를 바탕으로 일본 재판소에 소송을 제기했다. '태평양전쟁희생자광주유족회' 회원들이 원고가 되거나 이금주 회장이 지원한 재판은 1992년 원고 1,273명이 참여한 '광주 천인소송'을 시작으로 'BC급 전범 포로감시원 소송', '우키시마마루(浮島丸)호 사건 소송', 일본군 위안부·근로정신대 피해자 등이 원고로 참여한 '관부재판',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 등 무려 7건이나 된다.

이중 관부재판(공식 명칭은 부산 종군위안부 여자근로정신대 공식 사죄 등 청구소송)은 1992년 부산의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및 '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 10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공식적인 사죄와 배상을 청구한 소송이었다. 6년에 걸친 소송 끝에 1998년 일본 야마구치 지방재판소 시모노세키 지부에서 일부 승소한다. 일본군 '위안부'와 관련해 일본 정부가 책임을 인정한 최초의 판결이었다. 이 소송은 2018년 개봉했던 영화 '허스토리'로 다뤄진다. 그러나 2001년 일본 정부의 항소로 열린 히로시마 고등재판소에서 패소했으며, 2003년 대법원에서 항소를 기각하면서 패소한다. 미쓰비시 여자근로정신대 소송 마찬가지로 패소였다. 일본에서의 재판은 결과가 정해져 있었다. 일본 재판소는 일본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재판을 통해 일본의 뻔뻔함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특히 일본 지원단체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을 지원하는 모임'이 일본에서 만들어져 소송이 끝날 때까지 물심양면으로 힘을 보태기도 했다. 국제연대가 이루어진 것이다.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항공기제작소로 강제 동원되었던 양금덕 등은 일본 소송 직후 2009년 광주에서 결성된 '근로정신대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의 도움을 받아 2012년 광주지법에 소송을 제기했고, 마침내 2018년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한다. 1999년, 나고야 지방재판소에 소송을 제기한 지 19년 8개월 만의 일이었다. 이금주 회장이 벌인 그 동안의 소송투쟁이 국내의 대법원 최종 승소 판결의 '주춧돌'이 된 것이었다.

1992년부터 시작된 일본에서의 7건의 법정 투쟁의 선두에 선 이금주, 그녀가 소송을 뒷받침하기 위한 증인 출석, 시민단체와의 연대활동 등을 위해 대한해협을 건넌 것만도 80여 차례가 넘는다. 그녀가 일본과 싸운 7건의 재판은 광복 후 잃어버린 강제 징용자들의 명예를 찾기 위한 치열한 전쟁이었다.

이금주는 우리 정부를 상대로 한 '한일회담 문서 공개 소송'에도 직접 원고로 나서는 등 '강제동원 특별법' 제정에도 앞장선다. 특히 2003년, 이금주는 국회 법사위 국회의원 앞으로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 진상규명 등에 관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유서(遺書)를 보낸다. 그녀의 나이 84세였다.

"나는 23세 되던 해, 만 2년의 결혼생활 중에 남편을 일본전쟁에 빼앗겼습니다. 그리고 9개월이 지난 후 남편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저세상으로 갔습니다. 그 후 61년. 죽고 싶어도 아들 때문에 죽지 못하고 나는 남편의 주검을 가슴에 묻은 채, 미망인으로 한 많은 세상을 살아왔습니다.……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우리와 우리 혈육이 일제의 침략전쟁에 의해 입은 피해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입니다.…… 이제 죽기만을 바라고 있는 우리 회원들을 위해 마지막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로써, 그들의 시름을 달래고 눈물을 닦을 수 있는 이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특별법'을 제정해 주시기를 의원님들께 유서로써 간청합니다.……"

그녀는 유서를 통해 강제동원 특별벌 제정을 간절히 요청한다. 그녀의 노력 등으로 이듬해인 2004년 특별법이 제정되었고, 이어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가 출범한다. 정부 최초로 피해자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징용피해자들의 명예회복도, 일본의 사과와 배상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광주 시민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르다

2011년 외아들과 며느리가 잇따라 세상을 떠나자, 2012년 광주 생활을 청산하고 순천의 요양병원에서 투병 생활을 시작한다. 투병 생활 10년만인 2021년 12월 12일, 남편을 비롯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명예가 회복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뜬다. 그녀의 나이 102세였다.

그녀가 사망하자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기억하기 위해 많은 조문객이 빈소를 찾는다. 문재인 대통령도 조화를 보내 고인의 삶을 추모했다. 멀리 일본 시민단체의 조화와 추도글도 이어졌다. 광주·전남의 25개 시민단체는 '일제강제동원 피해자의 벗 이금주 회장 시민사회장'으로 그녀의 마지막을 배웅했다. 광복 후 일제의 만행과 가장 치열하게 싸운 여전사였고, 평생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벗이었던 이금주, 그녀는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나 순천시립공원 묘역에 영면했다.

2019년 정부는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권익을 위해 헌신한 공로를 인정, 그녀에게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했다.

최도철 기자 docheol.choi@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