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 봄비 희구하는 기우제… 무격·광대들 한바탕 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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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이윤선의 남도인문학> 봄비 희구하는 기우제… 무격·광대들 한바탕 잔치
순천성황제||이앙법이 없고 저수지 등||관개농법 개발 안됐던 때||봄가뭄은 천영과 다름없어||비를 빌게 할 때 짓게 했던||토룡은 지렁이 신격화한 것
  • 입력 : 2021. 12.19(일) 14:31
  • 편집에디터

순창성황대신사적현판 조사. 이윤선

"무격(巫覡)의 무리들이 어지럽게 무리 지어 모이고, 춤패와 노래패를 나열시키고 돌아다니며 제사를 받드는 것도 역시 지금껏 폐지되지 않은 것은, 그 영신(靈神)의 덕이 사람들의 눈마다 엄숙하였기 때문이다." 「순창성황사적현판」의 내용 중 무격과 관련된 부분이다. 무격(巫覡)은 무당(여자)과 박수(남자)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성황당의 의례에 많은 무당과 박수들이 모여들었다는 정보를 담고 있다. 성황제 의례 때문에 모였을 터인데 궁금한 것은 이들의 역할이다. 춤패와 노래패는 춤을 추고 노래했을 것이므로 그 기능이 짐작되는데 무격의 역할이 딱히 드러나지 않는다. '제사를 받드는 것도 역시 지금껏 폐지되지 않은 것은'에 나타나는 정보는, 당시에도 제사가 왕성하게 연행되었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 영신이 사람들의 눈마다 엄숙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은 당시의 순창 사람들이 이 무격들의 제의 혹은 어떤 연행을 '영신(靈神)'의 '덕(德)'으로 생각하는, 이른바 신앙이나 종교 관념으로 여기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영신의 덕이란 표현이 엄중하고 엄숙하다. 일반적인 민속 관념을 넘어서는 신앙의 한 형태 아니고서야 이런 표현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서 무격들이 행한 의례를 짐작해볼 수 있다. 종교적이고 신앙적인 혹은 매우 엄중하고 엄숙한 어떤 기능을 담당했을까? 김갑동은 그의 책 '고려의 토속신앙'(혜안, 2017)에서 순창성황당을 포함한 성황사의 헤게모니를 고려시대 무격들이 가졌을 것이라고 추정한 바 있다. '고려사'의 여러 기록 중 '정언진'에 대한 기사라던가, '심양'에 대한 기사들이 그것이다. '고려사' 권107 권단(權㫜) 부(附) 권화전(權和傳)의 기록을 보면, '무격들이 이금을 신임하여 성황사묘를 헐어버리고 그를 부처님처럼 섬기고 복을 달라고 빌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금이 미륵불을 자칭하면서 백성들의 신망을 얻자 무격들이 그들이 관리하던 성황묘를 헐고 대신 이금을 부처님처럼 모셨다는 것이다. 김갑동은 이를 성황사에 대한 무격들의 주관자적 위치로 해석하고 있다. 주관자가 아니라면 그들이 모시던 신격을 하루아침에 이금이라는 실존 인물로 바꿀 수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렇다면 무격들이 어떤 기능을 하길래 성황당의 신격마저 바꿀 정도로 주관자적 위치를 점할 수 있었을까? 5월 1일부터 5일까지 다섯 집의 향리 집을 돌면서 가설 성황당을 짓고 연행한 일종의 가무잡희에 대해서는 차후 소개를 기약한다. 다만 한 가지 중요한 정보만 소개해 두기로 한다. <'고려사' 권54 오행지2 金>조다.

순창성황대신사적현판 조사. 이윤선

(충숙왕) 3년 5월 무오일에 가뭄이 들었으므로 비를 빌고 정묘일에는 재차 기우제를 지냈다. 무진일에는 절에서 비를 빌었으며 기사일에는 무당을 모아놓고 또 비를 빌었다. 5년 2월 경진일에 한재로 인하여 왕이 강안전에서 크게 제를 지내고 비를 빌면서 말하기를 "내일은 반드시 비가 내릴 것이다"라고 하더니 과연 비가 내렸다. 4월 기미일에 무당을 모아놓고 비를 빌고 저자를 옮겼다. 경신일에는 또 절에서 비를 빌었다. 5월 무진일에 재차 기우제를 지내고 절에서 비를 빌었더니 을해일에 비가 내렸다. 을유일에 또 묘통사에서 비를 빌었다. 병술일에는 왕이 명령을 내려 사심첩(事審貼, 사심관 임명장)을 거두어 불태워버리게 했더니 비가 내렸다

순창성황사지. 이윤선

사찰이나 강안전 등의 궁전은 물론 나라의 여러 공간에서 기우제를 지내는데 무당들이 동원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디언 기우제의 특징이 비 내릴 때까지 지내는 것이라고들 농담 삼아 얘기하는데 실제 고려시대 기우제는 비가 내릴 때까지 지냈을 수 있겠다. 중요한 것은 가뭄과 관련된 절기가 5월이고, 이때 집중적으로 왕이 주관하는 기우제를 지냈다는 것이다. 남도지역의 단오제의가 가지는 특성이 여기 나타난다. 특히 이앙법이 없고 저수지 등의 관개농법이 개발되지 않았던 때라는 점, 마치 천수답처럼 하늘의 뜻만 바라보고 농사를 짓던 시절이라는 점은 먼저 지적해두어야겠다. 동남아시아처럼 2기작이나 3기작을 하는 환경이라면 한 번쯤 농사에 실패해도 큰 손실로 이어지지 않는다. 참고로 벼농사를 두 번 짓는 것을 2기작이라 하고, 벼와 보리를 번갈아 짓는 것을 2모작이라 한다. 따라서 오로지 1기작밖에 할 수 없는 특히 직파로 논농사를 했을 환경이라면 봄가뭄이 가져올 피해가 얼마나 큰 타격일지 불을 보듯 훤하다. 보릿고개니 봄가뭄이니 하는 말들이 왜 나왔겠는가. 빠듯이 벼 혹은 기장과 보리를 2모작 할 수 있는 경우에도, 봄가뭄은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천형으로 여겼을 것이다. 고려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 맥락은 더 강해진다. 그래서 가뭄의 책임을 왕이 지기도 하고, 왕을 대신한 무당들이 비를 내리는 기도 혹은 의례를 도맡아 연행했던 것이다. '고려사'권4(1021년 5월 6일)에도, 오월에 남쪽 궁전에 토룡을 짓고 무격들을 모아 비를 빌게 하였다는 내용이 나온다(五月 庚辰 造土龍於南省庭中, 集巫覡禱雨). 이 또한 오월이라는 시기와 토룡(土龍)이라는 의례 매개물, 무격이라는 의례 주관자들의 관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런 정보를 종합해보면 순창성황당 제의의 주된 기능은 일반적인 성황제의 기능도 했겠지만, 특히 봄비를 희구하는 기우제의 성격이 강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구동성 5월에 제의를 하고 5일 동안 각각 향리의 집을 돌며(이들이 순창에 넓은 농토를 가진 지주 혹은 관리들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무격은 물론 재인, 광대들까지 모아 한바탕 잔치를 벌였다고 추론할 수 있다. '고려사'에 언급하듯, 5월에 비를 빌게 할 때 짓게 했던 토룡은 지렁이를 신격화한 것이다. 비가 내릴 조짐이 있으면 지렁이들이 모두 땅 위로 기어 올라오는 현상이 이를 설명해준다. 의례의 절차나 형식은 드러나지 않지만,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연행했던 기우제의 절차를 준용해 해석해보면 순창성황제의 무격 제의의 대강을 짐작할 수 있다.

순창성황대신사적현판 원판사진. 순창군 제공

남도인문학팁

「순창성황사적현판」과 제의

순창 단오성황제의 무속제의와 관련된 정보가 많지 않다. 인용한 순창성황대신사적 현판의 내용 중 무속제의와 관련된 내용이 핵심이다. 1992년 「성황대신사적현판」이 발굴된 이래, 많은 학자가 단행본도 내고 논문도 쓰며 연구했지만, 그 실체가 명료하게 드러났다고 하기는 어렵다. 근자에 기회가 있어 관련 연구에 참여하게 되었고 무속 관련 부분을 내가 담당하였기에 여기 그 일단을 소개했다. 연구책임을 맡은 심승구(한국체대)교수의 견해를 빌리면, 성황제는 고을의 수호신을 모시는 제사로, 석전, 사직제, 여제 등과 한 범주에 속하는 고을 의례다. 우리나라에 성황제가 전래된 것은 나말여초다. 전국에 성황제의가 진행되었지만 순창을 주목하게 된 것은 위 현판이 발굴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내용의 일부는 '전북문화살롱 소식지' 송년호 및 보고서의 형태로 전북 순창군에서 발행될 예정이다. 참고로 전주에서 월간으로 발행하는 '전북문화살롱'은 전북뿐만 아니라 남도의 역사문화를 담아 회원들에게 나누는 회보이다. 2017년 출범하여 매월 1회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주제를 발표하고 토론하는 모임이다. 광주전남의 경우도 민학회를 포함하여 대동문화, 전라도닷컴 등 다양한 시도들이 있었고 지금도 일부 진행되고 있다. 바라는 것은 제주를 포함한 전남북, 내 표현대로라면 남도 전체의 구성원들이, 선의의 경쟁을 하고 상호 연대하는 이른바 남도문화의 르네상스를 열어갔으면 한다는 점이다. 우리 지역이 최고라는 이기주의적인 발상이 아니라, 지역의 주권과 자치분권을 문화적으로 해석해내는 선진적인 메시지가 될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이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