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며칠을 걸어 보성서 아버지를 묻었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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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일반
"어머니는 며칠을 걸어 보성서 아버지를 묻었제"
●한국전쟁 전후 전남 민간인 희생 관련자 인터뷰(1)||조천환·양계주 할아버지의 숨겨둔 이야기||"끌려가서 총살·집에 돌아오다 총살 당해"||진화위 조사 화순 포함…"억울함 풀어주길"
  • 입력 : 2021. 10.27(수) 17:41
  • 도선인 기자
지난 25일 화순의 덕음산 아래 다지리에서 만난 조천환 씨가 빨치산들이 많이 드나들었다는 덕음산을 가리키고 있다.
"한스러운 마음이야 말도 못 하죠… 어머니는 평생 아버지를 그리워하다 가셨으니깐."

화순 덕음산 아래 다지리에서 평생을 살아온 조천환(82) 할아버지는 70여 년 전 그날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당시 그의 나이 11살. 평범한 농사꾼이었던 아버지가 빨치산 활동을 하는 인민군과 내통했다는 누명을 받고 끌려가 총살을 당했다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생생하기 때문이다.

강산이 일곱 번 바뀌면서 집은 현대식으로 리모델링 됐지만, 조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살았던 그 집에 여전히 머물고 있다. 그 날, 그 순간을 아직도 마음에 가득 담은 채 말이다.

"그 시대만 하더라도 전남 산에 빨치산들이 많이 돌아다녔거든. 어느 날 밤 여기 뒷산 덕음산에서 빨치산들이 내려오더니 밥을 달라는 거 아니오. 총을 들이대면서. 방법이 없으니깐 어쩔 수 없이 어무이가 상을 차렸어요."

그게 화근이었다. 동네 사람들 눈에 띄어 인민군에게 밥을 줬다는 사실이 경찰 귀에 들어갔다. 순식간에 조 할아버지 가족은 빨갱이를 도운 사람들이 되었다.

조 할아버지는 "초등학교 갔다 왔는데 어머니가 하염없이 울고 계셨다. 인민군 밥해줬다고 경찰이 아버지를 연행해 갔다면서. 그게 아버지의 마지막 행적이었다"고 말했다.

그때 조 할아버지의 어머니는 화순 경찰에게 사정하고 백방으로 묻고 물어 화순사람들 32명이 보성 예제에서 총살당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것도 거기서 총을 잘못 맞아 살아나온 사람이 있어 이야기가 돌았던 것이다. 어머니는 일꾼 2명을 구해 몇 날 며칠을 울면서 걸어 보성에 도착했다. 그리고 아버지 시신을 수습하고 인근에 묻었다.

조 할아버지는 그해부터 가장이 돼야 했다. 남동생 2명을 보살피며 하루하루를 버텨내듯 살았다. 아버지의 한스러운 죽음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해 마음에 독이 되고 병이 됐다.

연좌제가 성행했던 터라 알려지면 동생들 앞길에 걸림돌이 될까 아버지의 이름을 올리는 일도 없었다. 그의 인생에서 아버지를 지워야 했던 것이다. 마을에서 나름 부농의 자식이었던 조 할아버지는 동생들을 가르치고 먹이느라 농사를 지어야 했고 학교는 다니지 못했다.

"어머니가 평생을 그리워만 하다 눈을 감았다. 경찰이 군인이 평범한 농사꾼을 어떻게 무참히 죽일 수 있냐고. 많이 억울해하셨다"며 "그래도 몇 년 전에 아버지 묘를 드디어 화순으로 옮겨왔다. 동생들 자식들 모두 서울에서 직장생활하면서 자리 잡았는데, 아버지가 꿈에 나와 칭찬이라도 해주면 좋으련만 한번을 찾아오지 않으신다. 얼굴이 가물가물해 많이 그립다"고 말했다.

또 다른 유가족인 양계주(78) 할아버지. 퇴직 이후 광주 남구에 거주하는 양 할아버지는 1951년 만삭이었던 어머니를 잃었다. 그의 나이 일곱 살 때였다. 당시 화순 청풍면에 살았던 양 할아버지는 "이미 그때 산골 마을들은 빨치산들이 점령했었어"라고 회고했다.

양 할아버지의 어머니는 만삭의 몸을 이끌고 이웃마을 정미소를 다녀오는 길에 변을 당했다. 배 속의 아이는 양 할아버지 4남매의 막냇동생이 될 아이였다. 인민군들이 주로 밤에 활동하기에 경찰들이 밤에 돌아다니는 모든 사람들에게 총을 쏴댔다. 그 총에 어머니가 비명횡사 한 것이다.

"한스러운 삶이야 두말할 것도 없고 억울한 맘에 사람이 안 미치면 다행이제. 70, 80년대 어디 말하지도 못했소. 알려지기라도 하면 빨갱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시대였은께. 새 장가를 든 아버지도 말을 안 꺼내고, 나야 계모 밑에서 눈치 보느라 그 일은 금기였제."

조 할아버지와 양 할아버지의 사연처럼 '한국전쟁 전후로 발생한 전남 화순지역 군경 및 적대세력에 의한 민간인 희생사건' 피해자는 화순군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수만해도 479명이다. 이는 노무현 정권 때, 진실화해위원회가 진실규명을 완료해 발표한 수로 현재 화순군 화순읍 민간인 희생자 추모공원에 위패봉안 되어있다.

하지만 피해자는 더 있다. 이번 진화위 2기에서 '화순지역 군경 및 적대세력에 의한 민간인 희생사건'으로 진실규명을 신청한 건수는 182건에 이른다. 민간인 희생사건이 벌어진 전남 22개 시군 중 지난 5월 가장 먼저 1차 조사개시 사건에 포함된 지역이기도 하다.

그들의 억울함이 과연 이번 기회에 풀릴 수 있을까. 진화위 조사를 향한 지역 유가족들의 간절함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화순군 군경 및 적대세력에 의한 민간인 희생사건'=1949년부터 1953년까지 군경의 빨치산 토벌작전 수행 과정에서 화순 군민들이 희생된 사건이다.

도선인 기자 sunin.do@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