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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인문학>외로운 기러기가 날아온다… 잠못드는 밤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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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인문학>외로운 기러기가 날아온다… 잠못드는 밤 가을이다

기러기
'누님 전 상서' 첫머리를 써두었는데 아직 한 자도 더 쓰지 못했다
무심한 빗소리만 가득하다
떠난 사람, 잊지 못할 사람, 그리운 사람, 바야흐로 기러기의 계절 가을이다

게재 2021-09-30 17:03:38
기러기
기러기

"외기러기 날아가 쉬는 곳이 어디냐/ 구름아 물어보자 너만은 알고 있지/ 외기러기 날아가 앉을 곳이 어디냐/ 바람아 물어보자 너만은 알고 있지/ 어릴 적 옛친구 지금은 무엇할까/ 내 고향 앞산에는 뻐꾸기 울겠지" 잘 알려진 김정호의 노래다. 매년 가을이 되면 이 노래를 떠올린다.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면 더욱 그렇다. 가을 우수(憂愁)와 자연의 섭리가 이 노래를 호출하는 모양이다. 기러기 노래는 미련의 정조(情操)를 반영한다. 찬바람 나는 계절, 이루지 못하거나 풀지 못한 심사를 기러기에 투사했다는 뜻이다. 기러기는 가을에 우리나라로 날아왔다가 봄이 되면 시베리아, 사할린, 알래스카 등지로 떠난다. 겨울 철새다. 그래서 '기러기 한평생', '기러기 아빠' '철새 인생' 등의 말이 생겼을 것이다. 철새처럼 떠돌아다녀 고생이 끝이 없는 일생을 비유하는 말이다. 짝 잃은 외기러기, 짝은 연인이나 부부에서 나아가 부모 형제, 친구들을 포괄한다. 궁극적으로 고향이다. 본원적 노스탤지어다.

추월만정(秋月滿庭), 외기러기 불러 말을 한다.

"추월(秋月)은 만정(滿庭)하야 산호주렴(珊瑚株簾) 비쳐들 제, 청천(靑天)의 기러기는 월하(月下)에 높이 떠서 뚜루 낄룩 울음을 울고 가니 심황후 반겨 듣고 기러기 불러 말을 한다. 오느냐 저 기럭아, 소중랑(蘇中郎) 북해상(北海上)으 편지 전(傳)턴 기러기냐. 도화동을 가거들랑 불쌍하신 우리 부친전 편지일장 전하여라. 편지를 쓰랴 할제, 한 자 쓰고 눈물짓고 두 자 쓰고 한숨을 쉬니, 글자가 모두 수묵(水墨)되어 언어가 오착(誤錯)이로구나. 편지를 손에 들고 문을 열어 나서보니 기러기는 간 곳 없고 창망한 구름 밖에 별과 달만 밝았구나" 전설의 명창 이화중선이 가장 잘 불렀고, 국창 김소희가 평생 사모하여 불렀다는 <심청가> 중의 한 대목이다. 기러기는 심봉사 아버지에게 보낼 편지를 전해줄 전령사다. 한자투성이라 몇 군데 풀어 둬야겠다. 가을 달빛이 산호(珊瑚) 구슬로 만든 황실의 가림막 사이로 은은히 비추는데 하늘에는 기러기가 뚜루 낄룩 울고 지나간다. 소중랑은 전한(前漢) 무제(武帝) 시절의 소무(蘇武)라는 사람이다. 흉노에 사신으로 갔다가 억류되었을 때 기러기 발에 편지를 묶어 보낸 고사를 남겼다. 편지라는 뜻의 안찰(雁札)이나 안신(雁信)이라는 용어가 여기서 비롯되었다. 모두 기러기 편(便)에 전하는 지(紙, 종이)라는 뜻으로 지금은 편지(便紙)라는 말만 남았다. 심청가 중 추월만정은 황후가 된 심청이 소무처럼 기러기 발에 편지를 묶어 아버지에게 보내고픈 심정을 잘 표현했다. 김정호의 망향에 대한 투사처럼 아버지를 잃은 심사를 외기러기에 빗대고 있기도 하다. 아마도 기러기가 철새라는 점에서 소무의 고사 이전부터 전령의 의미를 갖게 되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가을이라는 계절의 감성과 만물이 수렴되는 천지자연의 이치들이 이런 감정을 추동하지 않았겠는가.

누님 전(前) 상서(上書)

죽은 자들에게 보내는 편지는 어떠할까. 북망산천이 북쪽이니 이른 봄 북쪽으로 돌아가는 기러기가 전해줄 수 있을까. 오후부터 시작한 가을비가 그칠 줄 모르고 내리는 밤, 나 또한 기러기 불러 편지를 쓴다. 재작년 돌아가신 누님께 올리는 편지다. 나하고는 10년 터울이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으니 학교라고 제대로 다녔겠는가. 국민학교 빠듯이 마치고 상경한다. 나이 어린 여자들에게는 서울의 구로동 가리봉동이 상징적 공간이다. 밤낮없이 재봉틀 돌려 한푼 두푼 모아 고향으로 보낸다. 고향에는 남동생들이 있다. 서울 간 누님이 보낸 자금으로 남동생들은 진학을 한다. 베이비부머 세대 이전부터, 이른바 산업화 세대가 공유하는 일반적인 경험이다. 우리집이라고 달랐겠는가. 1898년생 아버지는 첫 번째 아내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갖지 못했다. 두 번째 아내를 얻어 내 누님 하나를 얻었다. 제사 지낼 아들이 없어 조상 뵐 면목이 없다 했다. 세 번째 씨받이 어미를 통해 나를 낳았다. 아버지 나이 예순여섯이었다. 내 생모의 집은 고개 하나 넘는 마을이었다. 누님은 나를 업고 날마다 고개 넘어 젖 먹이러 다녔다. 꿈결 같은 시절이었다. 가리봉동 공장에서 돌아온 누님은 국민학교 총각 선생님을 사랑했다. 어린 나는 철자법 틀린 누님의 연애편지를 전달하는 전령사였다. 하지만 가난한 누님에게 총각 선생님은 눈길을 주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기러기 역할을 잘못했는지도 모르겠다. 누님이 입에 달고 살던 노래는 이미자의 '섬처녀'였다. '해당화 피고 지는 섬마을에 철새 따라 찾아오는 총각 선생님 열아홉살 섬처녀가 순정을 바쳐 사랑한 그 이름은 총각 선생님......' 우리는 섬 아이들이었고 누님은 열아홉살이었다. 스무살 갓 넘기고 결혼을 했다. 소 몇 마리 키우는 농군에게 시집을 갔다. 근면하게 농사지어 아들딸 낳고 소도시로 이사를 했다. 그런데 재작년 갑자기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나를 낳으시던 나이, 딱 예순여섯이었다. 나는 누님의 죽음이 억울했다. 아이들 다 여의고 다리 뻗고 살만한데 죽음이라니. 지나간 세월과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우리네 서민들의 삶이 고작 이 정도일까. 죽을 만큼 고생하며 살다가 좀 안정되는가 싶으면 종합병원으로 달려가고 좀 여유 있다 싶으면 죽음에 이르니 말이다. 2년이 지났지만, 세월과 세상에 대한 내 감정은 아직 추슬러지지 않았다. 다만 소망할 뿐이다. 지상에서 못다 꾼 꿈들, 그곳에서 꾸시라고. 지상에서 못다 누린 영화, 그곳에서 누리시라고. 밤새 내리는 가을비 때문인지 기러기 소리 들리는 듯하다. 아마도 내 편지를 배달하기 위해 오는 전령일 것이다. '누님 전 상서' 첫머리를 써두었는데 아직 한 자도 더 쓰지 못했다. 잠 못 이루는 밤, 무심한 빗소리만 뜰 안에 가득하다.

남도인문학 팁

편지의 전령사 기러기

전 세계 14종의 기러기 중 우리나라에는 흑기러기, 회색기러기, 쇠기러기, 흰이마기러기, 큰기러기, 흰기러기, 개리 등 7종이 거쳐 간다. 기러기, 기럭이, 기럭기 등으로 부른다. 한자로는 보통 안(雁)이라 한다. 홍(鴻, 큰기러기), 양조(陽鳥), 옹계(翁鷄), 사순(沙鶉), 주조(朱鳥), 상신(霜信), 홍안(鴻鴈) 등으로도 부른다. 가을에 우리나라로 오고 봄에 북방으로 돌아가는 철새여서 가을을 알리는 새 혹은 소식을 전해주는 새로 인식되었다. <심청가>에만 기러기 노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춘향전>의 이별 노래에는 '새벽 서리 찬바람에 울고 가는 저 기러기 한양 성내 가거들랑 도련님께 이 소식 전해주오'라고 했다. '달거리'에서는 '청천에 울고 가는 저 홍안(鴻雁) 행여 소식 바랐더니 창망한 구름 밖에 처량한 댓소리 뿐이로다'고 했다. 고전소설 <적성의전>에는 어머니의 편지를 받고 다시 소식을 전했다는 내용이 있다.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은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박목월과 제자의 연애, 부인의 한량없는 이야기는 지극한 가곡의 선율로 우리의 가슴을 울린다. 모두 기러기의 전령사적 의미를 덧붙인 언설들이다. 전통혼례에서도 전안례(奠鴈禮)를 할 때 나무로 깎아 만든 기러기를 신부집에 전한다. 기러기가 한번 짝을 맺으면 죽을 때까지 그 정조를 지킨다는 시경의 구절을 반영한 풍속이다. 떠난 사람, 잊지 못할 사람, 그리운 사람, 바야흐로 기러기의 계절 가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