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돈삼의 마을이야기> 암행어사 박문수가 '산수 좋기로 첫째'라는 그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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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돈삼의 마을이야기
이돈삼의 마을이야기> 암행어사 박문수가 '산수 좋기로 첫째'라는 그 곳
장성 고산마을||80여 가구 110명 사는 산골||등산 애호가들 찾는 불태산||조선시대 성리학자 기정진과||제자 8명 배향하는 고산서원||옛 진원현의 중심 진원성 등||지정 전남도 문화재 가볼만
  • 입력 : 2021. 09.09(목) 16:45
  • 편집에디터

고산마을 표지석. 마을로 들어가는 길목, 고산서원 앞에 세워져 있다. 이돈삼

장안만목(長安萬目) 불여장성일목(不如長城一目). '장안(서울)에 있는 1만 개의 눈이 장성에 있는 하나의 눈만 못하다'는 말이다.

청나라 사신이 낸 문제를, 학식 높다고 뽐내던 서울사람들이 풀지 못했다. 대신, 장성에 사는 애꾸눈의 기정진이 풀었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전북 순창군 복흥면 구수동에서 태어난 기정진(1798~1879)은 어려서 천연두를 앓아 한쪽 시력을 잃었다. 기정진은 7살 때 시를 지으면서 '천재'로 불렸다.

고산마을 풍경. 마을이 불태산 자락에 둥지를 틀고 있다. 이돈삼

노사 기정진은 1862년 국정의 폐해를 바로잡을 것을 역설한 상소 '임술의책(壬戌擬策)'을 올렸다. 삼정의 문란으로 인한 폐해를 바로잡을 다섯 가지 개혁안을 담았다. 사대부의 도덕적 해이와 특권의식도 비판했다.

기정진을 많은 문인들이 따랐다. 노사학파다. 기정진은 위정척사도 주장했다. 위정척사는 외국의 세력과 문물을 배척하고 전통을 지킬 것을 주장한 사회운동이다. '위정(衛正)'은 바른 것, 성리학과 성리학적 질서를 의미한다. '척사(斥邪)'는 사악한 것, 성리학 이외의 종교와 사상을 배척하자는 것이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으로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기정진의 제자이며 손자인 기우만이 이듬해 장성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국권을 빼앗기자 고광순은 1907년 창평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의 증손자 기삼연이 의병 300여 명을 이끌고 합류했다. 호남의병을 한데 모은 호남창의회맹소가 만들어졌다.

고산서원 풍경. 노사 기정진을 모신 집으로, 장성군 진원면 고산마을에 있다 . 이돈삼

고산서원 풍경. 노사 기정진을 모신 집으로, 장성군 진원면 고산마을에 있다 . 이돈삼

고산서원은 기정진을 모신 집이다. 기우만 등 그의 제자 8명을 함께 배향하고 있다. 기정진이 1875년부터 5년 동안 학문을 가르치던 '담대헌(澹對軒)'이 있던 곳이다. 부모의 묘소를 담담하게 바라본다는 곳이다. 1924년 후손들이 다시 지었다.

강학공간으로 강당과 거경재(동재), 집의재(서재)가 있다. 제향공간으로 고산사가 뒤편에 있다. 장판각에는 '노사전집'과 '단문류편' 목판이 보관돼 있다. 국정의 폐해를 지적한 '임술의책'을 새긴 비석도 서원 앞에 세워져 있다.

고산서원에 걸린 '담대헌' 편액. 서원이 옛 담대헌 자리에 들어서 있다. 이돈삼

기정진은 순창에서 났지만, 장성에서 살았다. 장성군 동화면에 묘와 신도비가 있다. 신도비의 글을 면암 최익현이 썼다. 노사를 흠모한 최익현은 생전에 두 번이나 노사를 찾아 장성에 왔다. 묘 앞에 위정척사 기념탑도 세워져 있다. 1866년 맨 먼저 위정척사를 외친 기정진을 기리는 탑이다.

'…위정척사 운동은 바로 한말 의병운동의 정신적 토대가 되어 외세를 물리치고 자주독립을 지키자는 애국운동으로 승화되어 마지막 망해가던 나라에 민족혼을 살아나게 했던 애국애족의 밑거름이 되기에 충분하였다.…'

기념탑에 새겨진 비문의 일부다. 당시 서양의 침략세력이 동양을 침탈하던 상황에서 서양세력은 사(邪)일 수밖에 없었다. 위정척사론이 민족정신을 일깨웠다.

고산서원의 초가을 풍경. 은행나무 잎이 서서히 노랗게 물들어가고 있다. 이돈삼

노사 기정진을 배향하고 있는 사당 고산사. 기정진을 주향으로 하고, 그의 제자들을 함께 배향하고 있다. 이돈삼

오래된 진원성도 있다. 분지형의 두 봉우리를 연결해 쌓았다. 옛 진원현의 현성(縣城)이다. 최근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를 통해 성벽의 축조방식, 출입문과 건물 자리 등이 확인됐다. 성벽의 둘레는 1200m 남짓. 높이 3.5m, 폭 3∼8m의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다.

포곡식은 성내에 계곡을 포함시킨 성곽을 가리킨다. 물이 풍부하고, 활동공간이 넓다는 장점을 지닌다. 외부에 잘 노출되지도 않는다. 성곽은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은 '서고동저' 형태를 하고 있다.

고려 명종(1170~1197) 때 문인 김극기의 시에 '진원성'이 언급돼 있다. 성이 그 이전에 쌓였다. 임진왜란 때 일부 무너지고, 정유재란(1597년)을 전후해 폐허가 됐다. 성 아래에는 진원현감 최희설의 선정비 등 비석 6기가 세워져 있다. 진원성과 고산서원이 전라남도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노사 기정진의 묘. 위정척사기념탑과 함께 장성군 동화면에 있다. 이돈삼

고산서원과 진원성을 품은 고산마을은 옛 진원현의 중심지였다. 불태산과 삼성산을 이으며 형성된 남쪽 산골짜기에 자리하고 있다. 동쪽으로 병풍산과 삼인산이 있다. 주변에 송강 정철과 석탄 이기남이 강학한 정이암 터를 비롯 상청사, 하청사, 인원사 등 절터가 있었다. 성곽도시였다.

불태산 아래로 사방이 탁 트였다. 전망이 아주 좋다. 우연히라도 한번 찾으면, 누구라도 오래 머물게 된다. 불태산에서 광주와 광주광산구, 담양 대전면이 한눈에 들어온다. 암행어사 박문수가 '산수 좋기로는 첫째가 장성'이라고 한 이유다. 광주첨단지구의 배후도시로 인기를 얻고 있다.

고산마을은 전라남도 장성군 진원면에 속한다. 현재 80여 가구 110여 명이 살고 있다. 깨끗한 산골이다. 복숭아, 포도, 감을 많이 재배한다. 불태산 차돌복숭아는 맛이 좋다고 정평이 나 있다. 과육이 단단하고 향도 깊다.

마을회관에 도서관과 생활유물 전시관이 들어있다. 마을사람들의 자부심이다. 진원저수지를 둘러싼 절벽은 '적벽'을 떠올리게 한다. 물속에 반영돼 비치는 풍경도 환상적이다. 수변을 따라 산책길도 만들어졌다. 서원에서 진원성을 거쳐 수변길을 따라 가는 산책코스가 좋다.

불태산은 오래 전부터 등산 애호가들이 많이 찾고 있다. 불태산 아래 캠핑장에도 가족단위 여행객들이 찾는다. 광주시내 어디서나 30∼40분이면 닿을 수 있는 게 큰 장점이다.

이돈삼/여행전문 시민기자·전라남도 대변인실

옛 진원현의 위상을 보여주는 선정비군. 진원성 아래쪽에 세워져 있다. 이돈삼

옛 진원현의 위상을 보여주는 선정비군. 진원성 아래쪽에 세워져 있다. 이돈삼

임술의책 요약비. 기정진이 올린 상소 '임술의책'을 요약해 적어놓은 비석이다. 이돈삼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