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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벌교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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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벌교 살아요

게재 2021-04-01 13:29:25

꼭 '전남 벌교읍'이라 썼다. 그래도 알아서 배달해줬다. 고향을 물어도, 그냥 벌교란다. "아~, 보성 벌교시군요"라고 되물으면, 획 돌아설 듯싶다. 벌교는 행정구역상 전남 보성군 벌교읍을 말한다. 전성기 땐 주민이 6만5000명으로, 벌교 시가 될 뻔 했다. 군청이 있는 보성읍(9160명) 보다 많은 1만1826명이 살고 있다.

벌교는 원래 낙안 군에 속했다. 낙안 군은 낙안, 외서, 별량, 벌교, 동강지역으로 지금의 순천, 보성, 고흥의 일부를 아우렀다. 고려 초인 930년 이름이 보일 정도로 유서 깊은 땅이다.

낙안 군은 느닷없이 1908년 해체되고 만다. 일제 통감부는 행정개편(칙령72호)을 단행, 전남에서는 능주군과 화순군을 능주군으로, 창평군과 옥과군을 묶어 창평군으로 통합했다. 근데 전국에서 거의 유일하게 낙안 군만 아예 이름조차 지워버렸다. 낙안, 외서는 순천으로, 벌교는 보성으로 편입시켰다. 낙안읍성만이 흩어진 낙안 군을 추억할 따름이다.

낙안의 폐군은 의병투쟁에 대한 보복이었다. 머슴 출신 안규홍 의병장은 이 지역을 무대로 26차례 전투를 치러 일인 200여 명을 사살했다. 낙안과 안규홍은 눈엣가시였을 테다. 벌교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지역의 뿌리가 뽑혔다"고 통탄했다.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자행한 낙안군 벌교의 찢긴 지역사는 '보성군 벌교'를 낯설게 했으리라.

벌교에서 주먹 자랑, 순천서 인물, 여수서 돈 자랑 말라고 한다. 벌교 주먹은 3가지 설이 있다. 안 담살이 (안규홍 의병장)의 의로운 주먹, 전라도 일대를 평정했다는 김항수의 주먹, 벌교 역 조선인 주먹이다. 일제는 1920~30년대 벌교를 전남 동부권 수탈기지로 키웠다. 순천, 고흥으로 가는 길목에, 철도까지 깔고, 각종 행정 관서를 세웠다. 그러다 보니 1925년 면에도 불구, 1만6500명으로 전남 3대 도시가 됐다.

작가 조정래 선생은 '교통의 요충, 벌교 역에서 조선인과 일본인 간 싸움이 잦았는데, 일본 왈패들을 때려눕히면서 벌교 주먹의 매운 맛이 알려졌다'고 말한다. 조 작가에 공감한다. 벌교 주먹에는 일제 수탈과 저항이 스며있다.

최근 부용교(소화다리)에 조형물이 선보였다. 아무런 치장 없이 그저 '나 벌교 살아요' 라는 글씨만 붙어 있다. 김철우 보성군수의 아이디어란다. 지역의 자긍과 자부심, 자존감이 이 보다 더할까.

문득, 벌상(벌교상고) 간다던 그 여학생은 잘 사는지…. 이건상 총괄본부장·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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