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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자산어보를 쓴 손암 정약전의 유배지, 흑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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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자산어보를 쓴 손암 정약전의 유배지, 흑산도

1758년 남양주서 출생, 실학에 심취 이승훈·권철신과 교유
1801년, 천주교 탄압한 신유박해 때 전라도 신지도로 유배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약전은 흑산도, 약용은 강진에 이배
1807년 흑산도 사리마을에 ‘사촌서실’ 짓고 아이들 가르쳐
흑산도 어패류·어초류 기록 최초 어류도감 ‘자산어보’ 편찬
복성재 복원, 유배공원에 최익현 등 유배인물 기념비 세워

게재 2021-01-28 16:02:22
정약전이 흑산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제자를 가르치고 자산어보 등을 집필했던 사촌서당.
정약전이 흑산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제자를 가르치고 자산어보 등을 집필했던 사촌서당.
흑산도 사리성당
흑산도 사리성당
흑산도 사촌서당
흑산도 사촌서당
면암 최익현 선생 유허비
면암 최익현 선생 유허비

정약전, 흑산도에서 자산어보를 쓰다

섬과 바닷물이 푸르다 못해 검다 해서 붙여진 섬 이름 흑산도(黑山島, 신안군 흑산면)는 전라도 잔칫상에 꼭 올라야 하는 명물 홍어와 가수 이미자가 구성지게 불러 크게 히트한 '흑산도 아가씨'라는 노래로 유명해진 섬이다. 그러나 지역사를 공부하는 필자에게 흑산도는 손암 정약전과 면암 최익현 등이 유배 간 절해(絶海)의 유배지로 더 각인되어 있다.

1801년, 조선에서는 신유박해라 불리는 최초의 대대적인 천주교 박해 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은 정조가 세상을 떠난 후 노론 강경 세력들이 남인들을 몰아내기 위해 일으킨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 1752~1801)를 비롯한 300여 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목숨을 잃었고, 정조의 탕평 정책에 따라 등용된 남인 대부분이 정계에서 쫓겨났다. 그 남인 중에 정약전·정약용 형제도 있었다.

흑산도에 유배 중 사망한 정약전(丁若銓, 1758~1816)은 1758년 남양주 마재에서 정재원과 어머니 해남 윤씨의 네 아들 중 둘째로 태어난다. 정약전은 어린 시절 이승훈 등과 함께 어울리며 실학자였던 이익의 학문에 깊이 빠져들었다. 이승훈은 훗날 그의 누이와 결혼하여 처남·매부지간이 된다. 이어 권철신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는다. 이승훈과 권철신은 한국 천주교를 출발시킨 핵심 인물로 모두 신유박해(1801) 때 순교한 분들이었다. 정약전이 천주교에 입교하게 된 것은 이처럼 그의 주변 인물들과 연결되어 있다.

신유박해로 정약전은 전라도 신지도로, 동생 정약용은 경상도 장기(長鬐, 지금의 포항)로 유배된다. 그러나 조카사위 황사영의 백서사건으로 두 사람은 다시 압송되어 심문을 받은 뒤 약용은 강진으로, 약전은 흑산도로 유배지가 옮겨진다. 정약전은 1807년에 대흑산도로 거처를 옮길 때까지 우이도(신안군 도초면)에 살았다.

우이도에 머무는 동안 우이도 진리 마을의 홍어장수 문순득의 표류 이야기를 듣고 『표해시말』이라는 책을 엮는다. 문순득은 흑산도로 홍어를 사러 나갔다가 폭풍우를 만나 표류하여 오키나와, 필리핀, 마카오 등을 전전하다가 3년 2개월 만에 고향에 돌아온 인물이다.

대흑산도로 옮긴 후에는 사리마을에 사촌서실(복성재)을 짓고 아이들을 가르쳤다. 아이들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인근에 살던 청년 장창대의 도움을 받아 흑산도에서 잡히는 226종에 달하는 어패류와 어초류의 이름과 모양, 습성 등에 관한 자료를 모아 우리나라 최초의 어류도감으로 불리는 『자산어보(玆山漁譜)』를 편찬한다. 『자산어보』라는 책 이름은 정약전이 흑산도의 검을 '흑(黑)'자가 어둡고 음침한 기운이 있음을 꺼려 같은 의미를 가진 자산(玆山)이라고 부른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정약전은 흑산도에서 유배가 풀리지 못한 채 유배 16년만인 1816년 숨을 거둔다. 그러나 오늘 그가 흑산도에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은 그가 남긴 『자산어보』 때문이었다.

정약용, 형 약전을 늘 그리워하다

조카사위였던 황사영의 백서사건으로 정약전과 정약용의 유배지가 흑산도와 강진 등 남도 땅으로 재조정되면서, 서울서 나주까지 함께 내려온다. 그리고 마지막 밤을 함께 보낸 곳이 나주 동문 밖 삼거리 주점 '율정점(栗亭店)'이었다. 뜬 눈으로 마지막 밤을 보낸 두 형제의 마지막 이별 장소는 지금 나주역이 있는 영산강 나루터였다. 약용은 걸어서 강진으로, 형 약전은 배를 타고 흑산도로 향했기 때문이다.

4형제 중 둘의 우애는 각별했다. 약전과 약용은 유배 중에도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정약용이 형에게 보낸 편지 중에는 섬 생활에 육식을 하지 못할 형을 걱정하여 게를 요리하여 먹는 방법을 상세히 적어 보낸 것도 있다. 정약전은 약용에게 서당을 짓고 난 후 서당기를 지어줄 것을 부탁하기도 하였다. 약용은 형이 그리울 때면 늘 다산초당 옆 산자락에 올라 강진만 너머 바다를 바라보곤 했다. 오늘 그 자리에 '천일각'이 건립되어 있다.

정약전은 유배 15년만인 1816년 흑산도에서 세상을 떠난다. 형의 죽음을 접한 약용은 그 슬픔을 "아내도 나를 알아주지 못하고 자식도 나를 알아주지 못하고, 형제 종족들이 모두 나를 알아주지 못하는 처지에 나를 알아주던 우리 형님이 돌아가셨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라고 적었다.

흑산도 표지석
흑산도 표지석

정약전 유배지, 흑산도를 가다

『자산어보』를 쓴 정약전의 유배지 흑산도는 목포에서 93킬로미터나 떨어진, 꽤 먼 곳에 있는 절해의 고도다. 그러나 오늘 흑산도는 멀지 않다. 목포여객터미널에서 쾌속선으로 2시간이면 도착하는 거리이기 때문이다.

흑산도의 관문 예리항에 내리면 가장 먼저 반겨주는 것이 '기암괴석과 숲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섬 黑山島(흑산도)'라 새긴 홍어 모양의 흑산도 알림돌이다. 비 뒷면에는 흑산도의 간략 역사가 새겨 있어 흑산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흑산도는 통일신라 시대 828년(흥덕왕 2)에 장보고가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당나라와 교역할 때 중간 기착지가 되면서 주민이 거주한 곳이니, 중국으로 건너가는 전진 기지였다.

흑산도가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 바다 색깔이 얼마나 검은지를 보려면 흑산도 일주도로를 달려야 한다. 흑산도 일주도로에서 가장 구불구불한 도로를 지나면 상라산(200미터) 전망대가 나온다. 전망대에 서면 가까이에는 대장도가, 멀리는 홍도가 보인다. 참 아름답다. 그런데 전망대 곁에 전설적인 가수 이미자가 불러 흑산도를 널리 알린 '흑산도 아가씨 노래비'가 서 있다. '흑산도 아가씨'란 노래가 탄생할 수 있었던 심리 마을을 지나면 정약용의 유배 흔적을 품고 있는 사리마을에 나온다. 마을 자락에는 '유배문화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공원 끝자락에는 정약전이 흑산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제자를 가르치고 자산어보 등을 집필했던 사촌서당(沙邨書堂) 복성재가 복원되어 있다. 유배공원에는 '위리안치', '절도안치' 등 유배 유형을 재현해 놓고 있었을 뿐 아니라 정약전, 최익현, 황승원, 박치륭, 정운복 등 흑산도 유배 인물을 기억하는 비가 가득 서 있다.

사촌서당 건물 이름 복성재(復性齋)의 '복성'은 '서학(西學, 천주교)을 버리고 다시 성리학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라고 하니, 천주학을 믿었던 정약전이 천주교와 단절을 결심한 것인지, 유배에 지친 정약전이 임금에게 쓴 반성문의 표현인지는 잘 모르겠다.

복성재 바로 밑에 조그마하지만 어여쁜 천주교 '사리 성당'이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긴 의자가 달랑 8개 뿐이다. 성당을 찾는 신도 수가 짐작된다. 그러나 이곳 사리 성당은 신도 수가 의미 있는 곳은 아닐 것이다. 정약전이 뿌린 천주교의 씨앗이 지금껏 살아 남아 있는 모습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돌로 쌓은 성당 입구의 문에 주소가 붙어 있다. '정약전 길 26', 정약전은 도로명이 되어 오늘도 흑산도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흑산도는 또한 한말 거유(巨儒)였던 면암 최익현의 유배지다. 그는 1876년 일본이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를 강요하자 도끼를 들고 광화문에 나아가 '왜적을 물리치지 않으려면 나의 목을 베라'고 외치며 일본과의 강화를 반대하는 상소인 '지부복궐척화의소(持斧伏闕斥和議疏)'를 올린다. 하지만 면암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흑산도 유배라는 중벌이 내려진다.

1876년 우이도를 거쳐 흑산도 진리 마을에 도착한 그는 '일신당(日新堂)'이라는 서당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천촌리로 거처를 옮긴다. 천촌리 지장암에는 면암이 직접 새긴 '기봉강산 홍무일월(箕封江山 洪武日月)'이 남아 있다. "이 나라의 금수강산은 고조선 시절부터 있어 왔고, 이 나라의 해와 달은 조선 500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는 뜻으로 읽히지만, 중국에 대한 사대의 정신이 녹아 있음은 부인할 수 없어 보인다. '기봉'은 중국 기자가 봉한 땅, '홍무'는 명나라 태조의 연호를 뜻하기 때문이다.

면암은 조선 500년을 대표하는 정통 보수주의자였고, 사대주의자였다. 면암의 한계는 미래 세상에 대한 비전 부재였지만, 이 땅과 이 나라가 영원히 살아남기를 바라는 충절과 일본에 당당했던 기개만큼은 기억해두어도 좋을 것 같다.

그 지장암 앞에 1924년 그의 문하생이었던 오준선이 짓고 임동선이 쓴 '면암최선생적려유허비(勉菴崔先生謫廬遺墟碑)'가 서 있다. 면암을 기리는 유허비 곁을 멋드러진 250년 된 해송이 지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