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항일의 땅 소안도 독립운동 큰 별, 송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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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샘의 남도역사 이야기
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항일의 땅 소안도 독립운동 큰 별, 송내호
일제, 소안도 토지소유권 이전 면민 법정투쟁 벌여 승소||면민, 학교설립 독립혼 교육…일제, 소안학교 강제 폐교||소안도 독립운동 큰 별 송내호 교육과 군자금 모금 주도||수의위친계·살자회·일심단 등 조직 가열찬 독립투쟁 벌여 ||고문과 수감생활 반복으로 폐결핵 악화 34세 나이로 숨져 ||소안도, 독립운동가 20명 포함해 89명의 독립운동가 배출
  • 입력 : 2020. 11.10(화) 17:01
  • 최도철 기자

소안항일운동기념탑. 완도군 제공

태극기의 섬 소안도

항일의 땅 해방의 섬, 소안도

독립운동가 20명을 포함해 89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완도 소안도는 항일의 땅, 해방의 섬이다. 소안도가 항일의 땅이라 불리게 된 본격적인 투쟁은 토지반환소송에서 시작된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 일제는 조선 왕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소안면민들이 경작해오던 토지를 사도세자 5대손인 이기용에게 자작(子爵)이란 작위와 함께 소유권을 이전한다. 당시 이기용은 수조권만 갖고 있었고, 경작권은 주민에게 있었다. 소안도 토지의 소유권 이전은, 주민들에게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이에, 소안도 면민들은 최성태 등 4명의 면민 대표를 뽑아 토지소유권 반환 소송을 벌인다. 13년간의 법정 투쟁 결과 1921년 2월, 소안도 6천여 면민이 승소한다. 당시 조선일보는 5월 17일자에 "소안은 집요한 토지계쟁사건에 귀가 익은 곳이다. 13년 동안 다투어 얻은 토지는 이미 민유지로 해결됐다"는 기사를 싣기도 했다.

소송에서 이긴 주민들은 이 일을 기념하여 1923년 사립 소안학교를 세운다. 소안도에는 1913년 설립된 소안 중화학원이 있었다. 소안도 면민들은 토지를 지켜내자 그 기념으로 중화학원을 정식 학교로 승격시키기 위한 자금 1만 454원을 모금하였는데, 지금 가치로는 1억이 훨씬 넘는 금액이다. 따라서 사립 소안학교에는 '배움만이 살길이고, 항일의 길'이라는 소안면민들의 열망이 묻어 있다. 사립 소안학교가 다른 사립학교와는 다른 특별한 이유다.

사립 소안학교는 일제의 통제하에 있는 공립학교와는 달리 민족의식을 깨우치기 위해, 한국의 역사와 국어를 중심으로 독립군가, 독립가, 청년가 등의 노래를 가르쳤다. 일제의 축제일에 휴교하지 않고 일본 국기도 게양하지 않았으며 일본의 국상(國喪) 기간에도 상장(喪章)을 붙이지 않았다. 사립 소안학교는 일제에게 눈엣가시였다. 이에 일제는 1927년 5월 사립 소안학교를 강제 폐쇄했다.

이에 소안면민은 거세게 항거했다. 당시 중외일보는 '군수와 시장이 출동하여 돌연 학교 폐쇄(중외일보 5월 16일자)', '호별 방문하여 의견 청취 결과 소안교 폐지 반대 절대다수(중외일보 6월 15일자)'. '사립 소안학교 복교동맹 조직, 동맹원 700여 명(중외일보 7월 6일자)' 등의 제목을 달아 보도했다. 그러나 1927년 11월 배달청년회 사건으로 소안도의 민족운동가들이 대량 구속되면서, 사립 소안학교 복교 운동은 좌절되고 만다.

소안도 독립운동의 큰 별, 송내호

항일의 땅 소안도 독립운동의 큰 별은 누가 뭐래도 송내호(宋乃浩, 1895~1928)다. 그는 1895년 완도군 소안면 비자리에서 태어난다. 송내호가 태어난 비자리 항구는 제주도, 목포, 부산 등과 일본 오사카를 연결하는 배가 다니는 선박의 주요 통로였다. 비자리 항구에서 여각을 차려 돈을 번 부친은 세 아들을 서울, 광주, 일본에 유학 보낸다. 1911년 보통학교 과정을 마친 송내호가 서울의 중앙학교에 다녔던 이유다. 중앙학교 졸업 후 그는 고향에서 국권 회복 운동에 뛰어든다. 먼저 한 일은 교육활동이었다. 그는 사립 중화학원과 완도군 노화도의 사립 영흥학교 교사가 되어, 학생들에게 독립의 혼을 불어넣었다.

1919년 완도읍 3·1만세운동 시위를 주도한 것도 그였다. 1920년 11월에는 만주에서 결성된 무장투쟁단체인 대한독립단의 전라도 지단(支團) 책임자가 되어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어 1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른다.

1922년, 출옥 후 고향 동지들과 더불어 비밀결사인 수의위친계를 조직했다. 이 조직은 명칭만으로 보면 상부상조하는 전통적 계처럼 생각되지만, 이는 일제의 눈을 속이기 위한 전략이었다. 그는 이 조직을 통해 독립자금을 걷고 계원을 파견하여 중국의 독립군에게 전달하였다.

1923년, 송내호는 소안도의 청년 100여 명을 모아 청년조직인 배달청년회를 재조직했다. 송내호가 회장, 정남국이 부회장이었다. 배달청년회는 1924년 조직된 노농대성회와 1926년 조직된 살자회, 여성회와 소년단 등의 조직을 지원한 후 그들과 연대하여 투쟁했다. 1924년 3월 노농운동의 조직화를 위해 소안노농대성회를 개최하였는데, 임석 경관을 배척한 사건으로 또 체포되어 1년 이상을 감옥에서 보낸다.

그의 항일투쟁은 끝이 없었다. 1926년 6월 소안도에서 사상단체인 살자회를 조직했고, 7월에는 서울파 공산주의 그룹의 전진회(前進會)와 조선물산장려회 등이 결합한 조선민흥회의 발기모임에서 사회를 맡는다. 1927년 1월에는 청년 비밀결사체인 일심단(一心團)을 조직했다. 1927년 2월, 신간회 창립대회에서는 상무간사로 선출된다.

1928년 11월, 배달청년회가 조선청년총동맹의 1군 1동맹 원칙에 따라 완도청년동맹 소안지부로 개편 당시 만든 '선언'이란 문건으로 다시 검거되어 징역 10월을 선고받는다. 세 번째 구속이었다.

송내호는 목포형무소에 복역 중 연이은 구속과 고문으로 지병인 폐결핵이 악화된다. 병보석으로 석방되었지만, 1928년 12월 20일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서 사망한다. 소안도 독립운동의 큰 별이 떨어진 것이다. 그의 나이 34세였다.

사립 소안학교

소안도, 현장을 찾다

완도에서 남쪽으로 17.8㎞ 떨어진 곳에 소안도(所安島)가 있다. 험난한 항해를 하다 비로소 닿은 '안전한 곳'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소안도는 노화, 보길, 횡간, 당사도 등의 섬들과 함께 소안군도를 이루고 있다.

소안도는 고려 현종 9년(1018)이래 영암현에 속해 있었고 '달목도'라 불렸다. 조선 명종(1546~1567) 대에 처음 김해 김씨와 동복 오씨가 월항리에 들어와 마을을 형성했다. 1896년 완도군이 만들어지면서 소안면이 된다. 여의도의 3배 정도이니 비교적 작은 섬이다. 오늘 소안도에는 15개 마을에 2,700여 명이 살고 있다.

조그마한 섬 소안도는 보통 섬이 아니다. 소안항에 내리면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이 '항일의 땅, 해방의 섬 소안도'라는 표지석이다. '항일의 땅', '해방의 섬'이라는 호칭부터 예사롭지 않다. 호칭은 그냥 붙여지는 것은 아니다. 1920년대 6천여 주민 중 800명 이상이 불령선인(不逞鮮人, 불온하고 불량한 조선사람)으로 낙인찍혀 일제의 감시와 통제를 받았다고 한다. 항일독립운동가 89명이 배출되었고, 그중 20명은 독립유공자 표창을 받는다. 전국 면 단위 중 최고다. 조그마한 섬 소안도에 '항일의 땅, 해방의 섬'이라는 표지석이 자랑스럽게 서 있는 이유다.

소안항에서 소안항일독립운동 기념관으로 가는 길에 만나는 것은 엄청난 태극기다. 태극기는 국가기념일에만 다는데, 항일의 땅 소안도는 연중무휴로 휘날린다. 이는 완도군이 365일 태극기를 게양할 수 있도록 조례를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오늘 소안도가 태극기의 섬이 된 이유다.

남쪽과 북쪽 섬 사이를 연결하는 부근인 소안면 가학리에 2003년 문을 연 소안 항일운동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소안항일운동기념탑과 복원된 사립소안학교도 함께 있다. 원래 기념탑은 1990년 주민들이 성금을 모아 소안면 비자리에 건립했다. 2003년 기념관이 건립되자, 2005년 비자리 기념탑과 거의 비슷한 기념탑이 또 세워진다. 비자리에 처음 세워진 기념탑은 검은 돌과 하얀 돌로 이루어진 높이 8미터 폭 4미터의 크기다. 검은 돌은 일제 탄압을, 하얀 돌은 백의민족을 상징한다. 세 갈래로 솟아오른 탑은 일제에 대한 강렬한 저항을 상징한다.

기념관에서는 소안도의 항일운동을 한눈에 볼 수 있게 정리되어 있다. 영상실에서는 소안도의 항일운동 역사를, 전시관에서는 송내호·송기호 형제를 비롯, 정남국 등 독립유공자로 추서된 20분의 얼굴 조각상을 만날 수 있다.

당사도 등대 습격사건을 형상화한 디오라마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1909년 1월, 일본은 먼 바다로 나가는 일본 상선의 안전을 위해 당사도에 등대를 세운다. 불을 밝힌 지 2개월 만에, 소안도 출신 동학군 이준화 등이 해안을 기어올라 일본인 등대원 4명을 죽이고, 등대를 파괴했다. 당사도 등대 사건의 현장, 당사도는 소안도에서 4㎞ 쯤 떨어진 곳에 있다. 일제는 1910년 '등대 간수가 1909년 적의 흉탄에 쓰러졌기에 이를 후세에 알리고자 1910년 이 비를 세운다'라고 쓴 '조난기념비'를 세운다. 조난기념비마저도 소안도민은 용납할 수 없었다. 해방이후 가장 먼저 조난기념비를 박살낸다. 그리고 1997년, 당사도 등대 사건을 기리는 '항일전적비'를 건립한 후 박살된 조난기념비를 다시 일으켜 옆에 세운다. 어울리지 않는 두 개의 기념비가 함께 서 있는 모습은 한국 현대사의 아픔이 아닐 수 없다.

소안면 이월리 산496번지에는 소안도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송내호·송기호 형제가 묻힌 조촐한 무덤이 있다.

최도철 기자 docheol.choi@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