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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균의 사찰문화재 바로알기 21>【괘불탱·괘불지주】 ④ 괘불탱보다 두 배나 많은 괘불지주의 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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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균의 사찰문화재 바로알기 21>【괘불탱·괘불지주】 ④ 괘불탱보다 두 배나 많은 괘불지주의 의문?

게재 2020-10-29 12:23:29

1. 미황사 괘불탱 게시 원경(1727년, 사진 문화재청)
1. 미황사 괘불탱 게시 원경(1727년, 사진 문화재청)

괘불탱과 괘불지주의 개수 불일치

지금까지 전해져온 괘불탱과 괘불지주의 조성된 개수가 서로 일치하지 않고 엄청난 차이가 발생한다. 이상하게도 이러한 현상에 대해 그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현재 사찰이나 박물관 등에 전하는 괘불탱은 1945년 이전을 대상으로 하여 그 이전에 조성된 것이 2015년 12월 기준으로 117점으로 조사 되었다. 또한 현재는 전하지 않으나 문헌기록과 관련 유물, 괘불지주, 괘불궤, 복장 원문 등을 통해 괘불탱의 조성 사례도 20건을 확인하였다. 이러한 수치로 볼 때 괘불탱은 총 137점 이상이 조성된 것으로 파악된다. 하지만 괘불지주는 86조(괘불지주는 좌우 각 2점을 한 조로 계산) 296점이 조사되었다. 물론 괘불탱은 있지만 괘불지주가 파괴되어 제구실을 못하는 경우도 있으니 숫자상으로는 큰 문제가 없게 보인다.

전남지역 괘불 관련 유물 개수 불일치(괘불, 괘불지주, 괘불궤)

하지만 전남지역에서는 괘불탱과 괘불지주의 숫자의 전국적인 현상과 다른 상황이 발생한다. 전남지역 괘불지주는 27조로 파악되었다. 이는 전국 88건의 33%에 해당되어 전국에서 가장 많은 수량이다. 하지만 전국은 괘불탱 117점 대비 괘불지주는 86조로 그 숫자가 적지만 전남지역에서는 괘불지주의 숫자가 괘불탱을 압도한다. 전남지역은 괘불탱 13점보다 괘불지주가 27조로 두 배 가까이나 더 많다. 괘불지주는 훼손되어 파괴되기도 하니 적어지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다. 하지만 전국은 31점이 적은데 비해 전남지역은 14점이나 더 많아지는 기형적인 현상은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러한 의문을 풀기 위해 괘불 화기와 괘불지주 명문, 괘불궤 묵서명, 사지寺誌에서 괘불 관련 제작 연대가 등장하는 기록을 세심하게 살펴보았다. 전남지역 괘불궤 2점 가운데 나주 불회사의 괘불궤(1693년)의 명문과 괘불지주(조선후기)는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더라도 여수 흥국사의 경우는 괘불지주(1677년)와 괘불궤(1688년), 괘불화기(1759년)가 각각 연대가 달라 조심스럽다. 다만 괘불지주(1677년)와 괘불궤(1688년)의 연대가 인접하여 1677년의 또 다른 괘불이 있고 그 괘불을 담을 괘불궤를 1688년에 만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되면 1677년과 1759년의 괘불이 2점 조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사지'에 언급된 괘불조성 기록도 2건이 등장하는데 '송광사지'에 언급된 괘불조성(1677년) 기록과 괘불지주(조선후기)는 동시대로 보더라도 ??선암사지??에 언급된 괘불조성(1653년) 기록과 괘불화기(1753년), 괘불지주(조선후기)가 서로 연대가 차이가 난다. 괘불지주가 '선암사지'에 언급된 괘불조성(1653년) 시기에 만들어져서 그 뒤에 조성된 괘불(1753년)에도 사용된 것으로 봐서 괘불이 2점 조성된 것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지금은 보조지주로 쓰이는 괘불지주는 정상적인 괘불지주의 형태를 갖추고 있어 '선암사지'에 언급된 1653년 괘불의 괘불지주로 판단된다.

이러한 내용을 모두 반영하여 괘불궤 2점과 사지에 언급된 괘불조성 기록 2건을 재구성해보니 괘불 조성 건수는 실질적으로 2점(흥국사, 선암사)이 더 늘어나게 되어 이를 추가해서 15점의 괘불이 제작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괘불지주 27조와 비교해서 단순히 괘불 12점이 부족하고 괘불지주는 15조 남을 것으로 계산된다.[괘불탱 13점+괘불조성 기록(괘불궤, 사지) 2점 추가=총 조성 괘불 15점-괘불지주 27조=괘불 12점 부족 / 괘불지주 15조 남음]

하지만 특이하게도 괘불지주는 없고 괘불만 있는 사찰이 5개소이고 괘불은 없고 괘불지주만 있는 사찰도 18개소에 이른다. 그동안 괘불의 존재가 확인이 안 되고 괘불지주만 전하는 전남지역 사찰은 25건으로 조사되었다. 하지만 나주 운흥사에 괘불지주가 한 조 더 있고 선암사의 보조 괘불지주도 정상적인 괘불지주로 판단되어 27건으로 바로 잡았다. 괘불 실물과 괘불지주나 괘불궤?사지기록 등과 일치하지 않은 것은 어쩌면 동종銅鐘의 사례처럼 괘불도 폐사廢寺된 사찰의 괘불을 옮겨 온 결과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검토해 본 결과 조성처와 봉안처가 다른 경우는 나주 다보사 괘불(1745년, 錦城山 普興寺)과 나주 죽림사 괘불(1622년, ▨▨寺, 먹 덧칠)이 2곳이 여기에 해당된다.

나주 죽림사와 다보사에는 지금도 괘불지주가 없어 괘불탱을 이전해 온 특별한 사정이 발생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괘불지주만 있는 18개소도 모두 괘불이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앞서 계산한 실물과 조성기록을 합한 최대 조성 괘불 15점에다가 대흥사와 미황사는 괘불지주 2조는 서로 공유가 가능해서 각 1조로 환산하여 괘불지주만 있는 사찰 16개소를 포함하면 결과론적으로 31점에 이르는 괘불이 조성되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괘불지주 없이 괘불만 있는 사찰 5개소는 괘불지주만 있는 사찰 18개소 중에서 원 봉안처를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31점에 이르는 괘불 조성 가능 수치는 현전하는 괘불탱 13점과 비교해 볼 때 18점(괘불 조성기록인 괘불궤, 사지 2점 추가해도 16점) 정도로 그 격차가 너무 크다. 18점이 모두 유실되었다고 단언하기도 그렇고 괘불의 무게와 부피가 상당해 필요할 때 빌려 쓰고 가져다줄 정도의 성질의 것도 아니고 그러한 기록도 보지 못했다. 앞으로 유의미한 결론의 도출을 기대해 본다. 괘불지주의 너비와 괘불 크기를 비교해 보거나 불전 좌·우측면에 마련된 괘불 출입시설과 괘불지주 유무에 대한 연구 등에서 의외의 실마리가 풀릴 가능성이 크다.

괘불탱 문화재 지정 현황

현전하는 괘불 117점 가운데 지정문화재는 80점이다. 국가지정문화재 54점(국보 7, 보물 47), 시도유형문화재 16점, 시도문화재자료 2점, 등록문화재 8점, 비지정문화재가 37점이다.

전남에는 괘불탱이 13점(국보 1, 보물 10, 비지정 2)이 있다.구체적으로는 화기가 확인된 괘불 7점과 화기부분이 훼손된 1점(강진 정수사), 괘불지주는 없고 괘불만 있는 경우도 5점이다. 같은 시대의 괘불지주가 없이 괘불만 전하는 사찰은 나주 죽림사괘불탱(1622년), 구례 화엄사영산회괘불탱(1653년), 구례 천은사괘불탱(1673년), 나주 다보사괘불탱(1745년), 고흥 금탑사괘불탱(1778년)이다. 이 가운데 죽림사와 다보사는 괘불 원 봉안처도 아니고 괘불지주도 없다. 화엄사의 괘불지주는 최근에 만들었으며 천은사 괘불지주도 제작 시기가 그리 오래되어 보이지 않는다. 금탑사는 괘불지주는 어디로 갔는지 파편조차도 발견할 수 없었다.

괘불에도 배채법 등장

일부 괘불(충북 청주 보살사 영산회 괘불탱)에서는 조선시대 초상화에 주로 사용한 '배채법背彩法'이 적용되기도 한다. 종이 뒷면에 색을 칠해 앞쪽 화면에 피부색의 은은한 느낌이 배어 나오게 하는 배채법은 얼굴과 살 부분의 풍부한 질감을 표현하는 회화의 한 기법이다.

괘불 반출입 시설

고흥 금탑사에서는 괘불탱의 경우 보관 장소인 극락전 후불벽 뒤쪽에서 건물 측면 밖으로 통하는 괘불 반출입搬出入 시설이 발견되었다.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시설로 조선후기 괘불탱 반출입 시설과 이동 방법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그동안 괘불이 조성된 사찰에서는 불전 측면 벽에 괘불 반출입문을 별도로 마련한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금탑사의 경우 왜 이러한 괘불 반출입문을 미리 만들지 않고 사용할 때마다 불편하게 판자를 뜯어내고 좁은 문으로 옹색하게 무거운 괘불궤를 꺼내고 들여 넣었는지는 지금도 이해되지 않는다. 목조건축물에서 괘불 반출입문을 추가로 만들어 달아내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닌데도 말이다.

2. 미황사 괘불재(2018년, 사진 현대불교)
2. 미황사 괘불재(2018년, 사진 현대불교)
3. 미황사 괘불탱 전면(1727년, 사진 문화재청)
3. 미황사 괘불탱 전면(1727년, 사진 문화재청)
4. 미황사 괘불탱 용왕(1727년, 사진 문화재청)
4. 미황사 괘불탱 용왕(1727년, 사진 문화재청)
5. 미황사 괘불탱 시녀(1727년, 사진 문화재청)
5. 미황사 괘불탱 시녀(1727년, 사진 문화재청)
6. 미황사 괘불탱 화기 조성기(1727년, 사진 문화재청)
6. 미황사 괘불탱 화기 조성기(1727년, 사진 문화재청)
7. 미황사 괘불탱 화기 연화질(1727년, 사진 문화재청)
7. 미황사 괘불탱 화기 연화질(1727년, 사진 문화재청)
8. 금탑사 괘불탱(1778년, 사진 문화재청)
8. 금탑사 괘불탱(1778년, 사진 문화재청)
9. 금탑사 괘불탱 화기 조성기(1778년, 사진 문화재청)
9. 금탑사 괘불탱 화기 조성기(1778년, 사진 문화재청)
10. 금탑사 괘불탱 화기 연화질(1778년, 사진 문화재청)
10. 금탑사 괘불탱 화기 연화질(1778년, 사진 문화재청)
11. 금탑사 괘불궤(사진 황호균)
11. 금탑사 괘불궤(사진 황호균)
12. 금탑사 극락전 내부 괘불궤 반출입용 굴림대 장치 및 위치도(사진 문화재청)
12. 금탑사 극락전 내부 괘불궤 반출입용 굴림대 장치 및 위치도(사진 문화재청)
13. 금탑사 극락전 내부 괘불궤 반출입용 굴림대 장치 세부 1(사진 문화재청)
13. 금탑사 극락전 내부 괘불궤 반출입용 굴림대 장치 세부 1(사진 문화재청)
14. 금탑사 극락전 내부 괘불궤 반출입용 굴림대 장치 세부 2(사진 문화재청)
14. 금탑사 극락전 내부 괘불궤 반출입용 굴림대 장치 세부 2(사진 문화재청)
15. 금탑사 극락전 내부 괘불궤 반출입 모습(사진 문화재청)
15. 금탑사 극락전 내부 괘불궤 반출입 모습(사진 문화재청)
16. 금탑사 극락전 외부벽 괘불궤 반출입 시설(사진 황호균)
16. 금탑사 극락전 외부벽 괘불궤 반출입 시설(사진 황호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