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호균의 사찰문화재 바로알기 16> 화순 운주사지(사적 제312호) ⑦ 운주사 천불천탑은 미완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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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균의 사찰문화재 바로알기
황호균의 사찰문화재 바로알기 16> 화순 운주사지(사적 제312호) ⑦ 운주사 천불천탑은 미완성이다.
  • 입력 : 2020. 08.13(목) 17:08
  • 편집에디터

1. 운주사 '가' 석불군과 동냥치 탑이 어우러진 모습(사진 황호균)

전남 화순군 도암면 용강리 '중장터'가 '승시僧市'로 거론된 것은 '불교' 65·66 잡지에 실린 백양사 승려 안진호(필명 晩悟生)의 사찰 참배기인 '천불천탑을 참배하고서' 기사(1929년 11월 12월)에서 비롯되었다. 구체적으로 지역은 거론하진 않았지만 "조선시대에 사원寺院이 전성全聲할 때는 능주의 쌍봉사·운주사·개천사·팔랑사·석천사, 남평의 불회사·일봉암, 나주의 모모사某某寺가 합동하여 따로 승시僧市를 열고 장을 보았다 하며"라는 문장 구조로 보아 '중장터'와 관련된 이야기를 전해들은 것으로 여겨진다. 이 기록은 우리나라 역사상 '승시僧市' 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이후 강동원의 '화순의 전설'(광일문화사, 1982년)에서는 좀 더 다양한 내용이 등장한다. 하지만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고려와 조선 때 매월 보름 경상도는 상주에서, 전라도는 나주에서 장이 열렸으나 배불정책 영향으로 건달들의 행패가 막심하자 장터를 궁벽한 산골 도암 용강리로 옮겼다거나 주변사찰의 특산품들을 물물 교환하였다는 등의 일반적인 시장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중장中場'은 주민들의 전언에 의하면 1970년대까지만 해도 제법 번듯한 오일장 형태로 존속되었고 도로 교통의 발달과 주민들의 이주로 인해 1975년도에 폐장되었다고 한다. 그 후 중장터 위쪽(중촌) 다리 부근의 우시장은 인근에서 가장 큰 우시장으로 명성을 날리면서 시장의 명맥을 이어오다가 사라지고 말았다고 한다.

화순 중장터는 아직도 오일장 흔적이 보인다. 마을 중앙을 가로지르는 길 양편으로 저잣거리가 늘어서듯 자리해 그리운 오일장의 풍광이 남아 있다. 교통이 편리해지면서 중장의 오일장은 서서히 사라지고 말았다. 이러한 오일장이 없어지면서부터 이곳은 '중장터'로 불렸다.

'중장中場'과 같은 용례가 1872년에 펴낸 <황해도안악군지도>(규장각소장)에서도 발견된다. 위(上)와 가운데(中)에 위치하는 장시라는 지리적 개념의 '상장上場'과 '중장中場', 그리고 새로 개설한 장시라는 시간적 개념인 '신장新場'이 확인되었다.

조선시대 대부분의 장시는 거래 물건의 제한이 없는 만물시장이었다. 다만 곡물시장, 가축시장, 땔감을 공급하는 시탄시장柴炭市場이나 생선을 파는 파시波市, 약령시 등과 같은 특수시장도 더러 있었다.

운주사 중장터 구전설화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일반적인 장시에서 사찰용품을 파는 것을 설명할 뿐이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중장'이란 용어에서 그만 정신을 잃고 문학적 상상력을 더해 버렸다.

운주사 설화, 그 다양한 변이

운주사 설화는 조선 후기의 왕조 말 혼란한 시대 상황 속에서 촉발된 풍수도참설에 기인한 설화들이 그 원형이고 그러한 내용이 지역민들에게 전해지면서 다양한 변이 양상을 보인다. 이는 구전설화의 본질에 충실한 결과로 표면적 현상의 관찰을 통한 접근이나 현실 불만에서 오는 체제 변혁적인 소망을 피력하는 이야기들로 꾸며졌다.

이처럼 운주사 설화들은 기본적으로 조선 후기와 일제강점기의 문헌 자료에 등장한 설화적 관점 기록들을 본 지식인들이 20세기에 들어와서 운주사 주변 지역민들에게 알려줘서 전해지는 그야말로 '역구전逆口傳'인 이야기들이 대부분이다. 1980년대에 채록된 설화들은 이러한 '역구전'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육안적 접근과 현실 변혁적인 소망까지도 담아서 그럴듯하게 재생산된 내용이다. 그러므로 이를 문화사(역사학)나 문학에 활용할 때는 상황에 따른 적절한 재해석이 필요하다. 역사는 어떠한 사물이나 사실이 존재해 온 내력에 대한 사실 여부가 주안점이 되지만 설화는 있지 아니한 일에 대하여 사실처럼 재미있게 말하는 것이고 또 그러한 변이 양상을 해석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역사 상식이 깊어진 독자들의 감동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문학인들의 분발이 좀 더 필요하다. 운주사가 등장하는 여러 문학 작품들 가운데 시詩들은 이미 조선 후기 승려들로부터 최근의 시인들까지 천편일률적으로 작가 개인적인 감상만을 피력하는 수준에 그쳐 논의의 대상이 아니다. 여기서 시선을 끄는 것은 소설이다. 소설들은 문헌 자료가 전혀 없다 하여 조성 배경에 대해 기초적인 접근조차 하지 못하던 학계를 긴장시키고 많은 이들을 흥분과 감동 속으로 몰아넣었다.

하지만 지금 독자들의 지적 수준을 미루어 짐작해 볼 때 고증이 뒷받침되지 않은 그야말로 소설 같은 이야기는 감동을 반감시키고 만다. 사실 원로작가들이 활동하던 때와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요즘의 독자들은 자기 나라 역사를 시대별?왕조별로 구분하고 심지어는 세기별로 문화의 특성을 나누어서 이해하는 지식인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천불천탑을 다 완성했을까?

조선총독부에서 촬영한 191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의 128컷 사진 어디에도 지금까지 확인된 22기 이상의 탑이나 64구 이상의 불상이 촬영된 사진을 발견하지 못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의 기록 "석불석탑石佛石塔 각일천各一千" 이래로 운주사는 '천불천탑' 사찰로 유명해졌다. 하지만 근래에 상당수의 지식인들이 천불천탑이 다 만들어졌고 세월이 지나면서 훼손되어 지금은 얼마 남지 않았다면서 '박형진의 1941년 조사'의 결과로 제시한 213구의 석불을 그 근거로 들었다. 자세(좌상, 입상, 와상)와 완부完否(완전, 불완)로 나누어 통계를 내려다가 자세와 완부完否를 이중으로 합하고 이어 개체?數 수까지도 합해서 삼중으로 합산하는 착오를 범했다. 말하자면 71구를 3중으로 합해 213구라는 숫자가 나온 것이다.

다불신앙과 조탑신앙의 의미

'천千'이라는 글자는 단순히 '일천'이라는 수효에 한정된 의미라기보다는 '많다'라는 수량을 나타내는 것으로 불교에서는 '다불(천불)신앙'과 '조탑신앙'에서 그 유래가 찾아진다.

삼국시대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불교는 대승불교이다. 대승불교의 가장 큰 특징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지 누구나 수양을 열심히 하면 모두 다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철저한 평등주의 사상이다. 이러한 생각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 천불사상이다. 즉 과거에도 천불, 현재에도 천불, 미래에도 천불이 있다는 것으로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무한한 부처님이 존재한다는 것과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고 부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대승 불교의 근본 사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즉 혼자만 도를 닦아 부처의 경지에 이르러 유일한 부처가 되겠다는 소승 불교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대승 불교의 특징을 말해 주는 이러한 천불은 예부터 많이 만들어지고 또 예배의 대상이 되었다. 유명한 고구려의 연가 7년명 금동 여래 입상(539년)이나 계유명삼존천불비상(673년), 원오리사지 소조불사상군(고구려), 성주사의 소조삼천불군(통일신라) 등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불교에서 천이라고 하는 숫자는 무한한 여래(부처)를 나타낸다. 아마 천이라고 하는 숫자는 더 이상 채울 수 없는 가득한 개념으로 불교의 상징적 표현일 것이라 여겨진다. 부처란 '진리를 깨달은 자'를 의미하는데 그래서 깨달음을 얻으면 누구나 부처님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불상은 바로 이렇게 깨달은 부처의 모습을 눈에 보이는 조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대승 불교가 발전하면서 누구나 노력하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여 여러 종류의 부처가 등장하였다. 따라서 삼신불·삼세불·천불·삼천불과 같은 다불多佛 사상이 등장하게 되었다.

천불이란 이와 같은 다불 사상에 근거하여 과거·현재·미래로 연결되는 영원한 시간 속에서 각기 이 세상에 출현하는 부처님이며 단순히 천불이라 할 때는 현재에 나타나는 천불을 말한다. 즉 이 세상 어느 때나 무한한 부처가 존재하며 어느 곳에서 누구나 다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 천불의 표현이다. 이러한 다불 사상에 근거한 천불 신앙의 결과로 만들어진 사찰의 건물이 '천불전' 혹은 '불조전'이라 부르는 것이다. 따라서 천불전은 누구든지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대승 불교의 근본 사상을 상징하는 건물이다.

역사적으로 부처는 석가모니 혼자이지만 교리적으로 진리를 깨달은 자는 얼마든지 존배한다. 따라서 과거 칠불과 함께 현재불?미래불 등 1,000명의 부처가 나타나 중생을 구제한다는 사상이 발전하였으며 이러한 사상은 우리나라에 들어온 대승 불교의 사상적 출발이 되기도 한다. 결론적으로 다불 사상에 근거한 천불 신앙이란 과거 천불?현세 천불?미래 천불을 합한 삼세 천불을 공양하면 가장 큰 복을 받는다는 불교 신앙을 의미하는 것이다.

석불은 최대 80구

지금까지 운주사의 석불은 중외일보 능주지국의 한 기자가 작성한 1928년 신문 기사에서 71구로 파악된 이래 박형진의 1941년 조사에서도 비록 3중으로 잘 못 계산한 착오로 213구인 것처럼 보였지만 여전히 71구이다. 이후 1984년 성춘경의 조사나 1989년 황호균의 조사와 별반 다르지 않다. 황호균은 이 모든 내용을 종합하고 파손석불까지 자세히 조사하였다.

운주사 불상 101구 가운데 제작시기가 통일신라에 해당되는 금동불?보살입상과 재료상의 차이를 보인 소조불 3구를 제외하면 석불은 총 98구이다. 이 가운데 3구(석불군 가-7, 석불군 나-9, 마-6)는 유실되었다. 운주사 불상 가운데 모양이 완전한 부처는 62구(3구 유실)에 불과하며 나머지는 불두(18개체)와 불신(16개체)으로 나누어진 체 파손되었다. 지금까지 조사된 석불은 총 98개체이나 파손된 불두로만 한정해도 최대 80구이다.

석탑은 최대 30여 기

운주사 석탑은 중외일보 능주지국의 한 기자 작성한 1928년 신문기사와 박형진의 1941년 조사에서 22기(불명 8기)의 석탑이 있던 것으로 기록되었으나 성춘경의 1984년 조사에서는 18기로 파악되었다. 천득염의 1991년의 조사에서는 석탑형식을 갖춘 것이 18기, 석주형으로 1층 탑신만 남은 것이 3기로 모두 21기 석탑의 존재를 알렸고 1989년 4차 발굴조사에서 원반형 폐탑재 1기가 새로 추가되어 모두 22기로 파악되었다. 하지만 100여 개에 이르는 무너진 탑재들의 존재로 미루어 적어도 10여기 이상의 석탑 복원이 가능해 30여 기 이상의 석탑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천불천탑 미완성 흔적

천불천탑 불사의 미완성 흔적은 유독 석불에서만 나타난다. 와불을 암반에서 분리 못 한 점이나 '가' 석불군의 좌측에 협시불이 없고 암벽도 다듬지 않은 점에서 비추어 볼 때 그러하다. 이러한 미완성 흔적은 '닭이 울어서' 중단되었다는 설화를 지어낼 만한 정황을 보여준다.

2. 운주사 탑 무리(사진 이암)

3. 운주사 '바' 석불군 전경(사진 황호균)

4. 운주사 '마' 석불군 전경(사진 장선필)

5. 운주사 '가' 석불군과 동냥치 탑이 어우러진 모습(사진 황호균)

6. 운주사 마애여래좌상(사진 황호균)

7. 운주사 광배있는 석불좌상(사진 황호균)

8. 운주사 '바' 석불군 석불입상(사진 황호균)

9. 운주사 금동불·보살입상(사진 유남해)

【 사진 】

1. 운주사 '가' 석불군과 동냥치 탑이 어우러진 모습(사진 황호균)

2. 운주사 탑 무리(사진 이암)

3. 운주사 '바' 석불군 전경(사진 황호균)

4. 운주사 '마' 석불군 전경(사진 장선필)

5. 운주사 '가' 석불군과 동냥치 탑이 어우러진 모습(사진 황호균)

6. 운주사 마애여래좌상(사진 황호균)

7. 운주사 광배있는 석불좌상(사진 황호균)

8. 운주사 '바' 석불군 석불입상(사진 황호균)

9. 운주사 금동불·보살입상(사진 유남해)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