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오이 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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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이윤선의 남도인문학>오이 따기
  • 입력 : 2020. 07.22(수) 12:48
  • 편집에디터

신사임당 초충도 8폭병풍 중 오이와 개구리

"금침 같은 손가락과 실 같은 머리카락/ 머리 나란히 하고 손잡으니 한껏 기뻐/ 바늘과 실을 가지고 회문금을 짜듯이/ 밤새 내내 끊일 때 없이 돌고 도는구나/ 파과할 때가 되어 오이 따는 것 희롱하니/ 어지럽게 꼭지 떨어짐에 꽃잎 떨어진 듯해/ 그 어떤 사람이 풍류의 모범을 허여했던가/ 벼슬은 첨지라 하고 성은 차씨라 한다네" 눈을 감아도 선명하게 그려지는 그림들, 나란한 머리, 서로 잡은 손, 밤새 끊일 때 없이 돌고 도는 놀이, 그렇다, 강강술래의 한 장면이다. 정만조의 <은파유필>(1896~1999년의 기록) 중 '추석잡절'이라는 제목의 시인데, 소개한 대목은 현행 강강술래놀이의 '바늘귀 뀌기'와 '꼬리 따기'놀이에 해당한다. 후자를 '쥔쥐새끼놀이' 혹은 '외따기놀이' 등으로도 부른다. 졸고, '강강술래의 역사와 놀이구성에 관한 고찰'(한국민속학, 2004)에서 이들 부대놀이를 분석해두었으니 참고 가능하다. 텃밭에서 오이를 딸 때마다 이 놀이를 떠올렸던 것은 오이의 상징과 기원에 대한 상고(詳考)의 열망 탓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내 고향에서는 오이(胡瓜)를 '물외'라 한다. '참외'에 대응하여 생긴 이름일까? 조선시대에는 황과, 월과, 첨과, 왕과, 사과(수세미), 적전과, 적과 등 부르는 이름이 다양했다. 강강술래 놀이에 오이따기 놀이가 들어가 있는 것도 오이가 가진 깊은 역사와 광범위한 이미지 때문 아닐까? 은파유필에는 지금의 기와밟기놀이를 유장희(踰墻戱) 즉 담넘기놀이로, 청어엮기놀이를 침사희(針絲戱)로, 꼬리따기 놀이를 '적과희(摘瓜戱)'로 소개하고 있다. 후자를 '외따기놀이', '왜때기놀이', '외쌈놀이', '외땀놀이' 등으로 부르는 것은 모두 외(오이)를 따는 놀이라는 뜻이다.

진도지방의 외따기, 차첨지놀이

전 진도문화원장 박병훈이 1991년 '예향진도 22호'에 소개하여 남도문화제 등에 출연했던 놀이 이름은 '차첨지놀이'다. 무정이 은파유필에서 기록한 차첨지라는 캐릭터와 '외쌈놀이'를 원형에 가깝게 복원했다고나 할까. 하지만 각색하거나 새로 연출한 부분도 많기 때문에, 세세한 내용을 여기 다 소개할 필요는 없다. 다만 오이에 대한 상징, 풍자와 해학 등으로 코믹하게 꾸민 놀이라는 점 확인해둘 필요가 있다. 오이밭의 주인공은 차첨지다. 차첨지 마누라가 소매(소변)동이를 이고 나와 강강술래 하는 사람들 머리위에 붓는 장면이 연출된다. 차첨지의 대사는 노골적이다. 몸집 큰 여인네 엉덩이를 감싸보며 '할멈, 이 수박 좀 보게, 꼭 윤부자집 며느리 소쿠리만 하네, 또가리(또아리) 좀 받치세'한다. 차첨지 마누라는 여인들 젖가슴을 주무르는 시늉을 하면서 '그놈만 크요? 이 수박 좀 보시오, 주렁주렁 셀 수도 없이 열렸소'라고 응수한다. 한 발 더 나아가 여인들의 어깨를 들어 보이며 '워매 이 물외는 꼭 영감 그것만치나 하요, 안 그라요 영감'하며 희롱한다. 이후 심술보 영감과의 놀이, 구렁이나 뱀을 상징하는 밧줄 토막을 던지며 놀이를 끝낸다. 무정이 기록했던 시기만으로도 지금으로부터 120년 이전의 장면들이다. 내가 이 놀이에서 주목했던 것은 오이에 대한 상징이다. 성희롱 혹은 성폭력적 풍경들은 탈춤이나 다시래기 등 민속놀이에서 일반적으로 채택되었던 방식들이다. 여기서의 오이는 남근(男根)이다. 순화하면 남성성(男性性)이다. 은파유필을 역해한 박명희는 이 시의 파과(破瓜)를 '나이 64세'로 풀이했다. 백낙천의 시 '나이 예순넷이니 어찌 노쇠하지 않을 수 있겠나'라는 대목과 조선후기 윤기의 문집 <무명자집>을 인용해두었다. 외따기놀이를 노쇠한 차첨지의 남성성에 대한 희화화로 풀이했다. 남도지역 대개의 마을 앞에 서있는 입석(立石)으로부터 종교적, 문화적 혹은 예술적으로 포장된 남근의 은유들은 거론하기 힘들만큼 광범위하다. 기자(祈子, 아들을 낳게 해달라는 기원), 기풍(祈豊, 풍요에 대한 기원)의례의 원초적인 형국으로 해석한다. 물론 오이가 모두 남근 메타포에 포획된 것만은 아니다. 문화권에 따라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포장되고 각색되며 변화해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도선국사에서 반쪽이 설화까지

대표적인 것이 영암 도갑사의 도선국사 설화다. 최씨 처녀가 오이를 먹고 잉태를 한다. 아이를 낳자 상서롭지 않다고 내다버린다. 하지만 비둘기 등 동물들이 보호하여 양육한다. 다시 데려다 키웠더니 승려가 된다. 중국에 들어가 풍수를 배워온 후 전국을 돌아다니며 비보사탑을 세운다. 고려건국을 예언하고 조력한다. 천년 후에 내려온다고 예언한 후 입적한다. 이 설화는 고구려 주몽탄생과 같은 구성을 취하고 있다. 부여 하백의 딸 유화부인이 햇빛에 의해 임신이 된다. 알에서 태어난 주몽을 버린다. 하지만 개, 돼지, 새 등 동물들이 보호한다. 다시 거두어 기른다. 활을 잘 쏴서 주몽이라 한다. 이후 고구려를 건국한다. 두 개의 이야기 중, 도선국사는 최씨 처녀는 오이(구슬을 먹는 버전도 있다)를 먹어서 잉태를 하고 주몽은 유화부인이 방안에 들어온 햇살을 받아 임신하는 풍경이 다를 뿐 거의 같은 구성을 취하고 있다. 여기서의 오이와 한 줄기 햇살이 남성성이다. 고려 전기 최응(898~932)의 탄생도 유사하다. 어머니가 임신했을 때 그 집 오이 줄기에 갑자기 참외가 맺혔다. 이웃사람이 궁예에게 고했다. 궁예가 점을 쳤다. 아들을 낳으면 나라에 불리하니 기르지 말라했다. 부모가 숨겨서 길렀다. 장성하여 왕건의 고려 건국을 도와 각종 벼슬을 역임했다. 참외가 열리지 않고 본래대로 오이가 열렸으면 고려건국이 되지 않았을까? 여기서의 오이와 참외도 남성성 혹은 잉태를 함의한다. '외쪼기'라는 동화도 있다. 본래 반쪽 사람이라는 설화를 토대로 한 이야기다. 할머니가 태몽을 꾸었는데 빨래터에서 오이 세 개를 건져먹다가 쥐가 반쪽을 먹어버린다. 할머니는 아들 둘을 낳고 이듬해에 눈, 코, 귀, 다리, 손이 하나인 반쪽 아들을 낳게 된다. 쥐가 먹어버린 반쪽 오이와 반쪽 아이가 대칭을 이루고 있다. 이후 스토리를 다 다룰 필요는 없지만 내가 주목하는 것은 할머니의 태몽과 오이다. 이외에도 오이와 관련된 출생설화는 전국에 분포한다.

기다림, 정과정곡(鄭瓜亭曲)에서 초충도(草蟲圖)까지

"내 님 그리워 울고 있으니/ 산접동새와 내신세가 비슷하외다/ 아니며 거짓인줄 잔월효성만이 아시리다/ 넋이라도 임과 함께 하고 싶어요 아~/ 우기는 이 누구입니까/ 과실도 허물도 전혀 없습니다/ 모함에 지나지 않는 것을/ 서럽구나 아~/ 임께서 저를 벌써 잊으셨나요/ 아소 임아, 다시 들으시어 사랑해주소서" 저 유명한 정과정곡이다. 우리말로 전하는 고려가요 가운데 작자가 가장 확실한 노래, <고려사>와 <악학궤범>에 전하는 노래로 고려 후기 정서(鄭敍)가 지은 가요다. 참소를 받고 고향 동래로 유배되었는데, 오이정자를 짓고 오이를 재배하면서 부른 노래라 한다. 여기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오이정자(瓜亭)다. 가요의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오이는 임금의 부름에 대한 기다림의 정서를 대변한다. 왜 기다림이 오이일까? 벼슬아치의 임기로 상징되었던 중국의 고사로 거슬러 올라가면 궁금증이 풀린다. 중국 춘추시대에 제나라 양공이 관리를 임지로 보내면서 다음해 오이가 익을 무렵에 돌아오게 하겠다는 말에서 유래했다. 여자가 혼인할 나이가 되는 열대여섯 살 혹은 기한이 다 된 시기를 뜻하기도 한다. 오이 과(瓜)자를 쓴 과기(瓜期), 과한(瓜限) 혹은 과만(瓜滿) 등이 벼슬아치의 임기를 나타내는 말이 된 이유다.

수묵화나 민화의 초충도(草蟲圖)에도 여타의 소재들과 함께 오이가 즐겨 다루어진다. 신사임당의 초충도 8폭 자수병풍 중 오이와 개구리 그림이 가장 대표적이다. 길쭉하고도 탐스럽게 수직으로 그려진 오이를 남성성과 아들로 해석하는 것은 불문가지다. 길게 뻗은 오이덩굴은 자손이 끊이지 않고 번창하기를 바라는 소망으로 해석한다. 개구리는 올챙이에서 변태하는 상징동물로 다산을 의미하며 고개 숙인 조(粟)는 겸손과 겸양을 나타낸다. 함의들이 이러해서인지 가지와 오이, 수박 등이 초충도의 배경으로 즐겨 다루어진다. 각각의 민화 상징과 함의들에 대해서는 면을 달리하여 다루어나가겠다. 의문이 든다. 초충도의 오이를 남근의 은유로만 해석해야할까? 보다 근원적인 투사, 시경 이래 담론화된 오이의 궁극적인 함의는 어쩌면 기다림일지도 모른다. 다산과 다복을 기원했던 길상화(吉祥畵)의 원초적 욕망이라고나 할까.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후대로 올수록 초충도의 의미는 강하고 부귀한 것들에 대응하는 저항기제로 인식되기도 한다. 풀과 벌레들의 그림을 비단 여자들만 그렸던 것은 아니지만 이름도 빛도 없고 아무짝에도 쓸모없이 여겨졌던 풀벌레들을 주목했던 여성들의 심성 혹은 가지지 못한 자들의 심상 얘기다. 현대민화에서도 여러 가지 풀벌레 그림들이 즐겨 창작되곤 한다. 현상에는 뜻이 숨어있다. 고려가요 정과정에서 강강술래의 외쌈놀이 등을 바라보는 내 시선의 향방이라고나 할까. 차첨지라는 캐릭터를 읽어내는 시대정신이라고나 할까. 남근의 은유를 다산이나 길상으로만 해독해서는 안 될 이유들을 상고해본다. 기울어진 남근 혹은 당치않은 남성 우위의 성희롱을 비판하는 것, 부귀공명의 화훼가 아닌 하찮은 풀벌레들 속에 자신들을 투사해내는 민화의 심상을 주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쩌면 이것은 남성들의 지배에 억눌려 온 여성들, 가진자들에 억눌려 온 못가진자들의 매우 오래된 기다림일지도 모른다.

남도인문학팁

오이는 언제부터 먹기 시작하였을까?

"밭 한가운데 농막이 있고 밭두둑에는 오이가 열렸네/ 껍질 벗기고 절여서 조상님께 바치네/ 자손들이 오래오래 살았으니 하늘의 보살핌을 받았음이라" 오이를 거론할 때마다 인용하는 <시경(詩經)>의 소아(小雅) 구절이다. 시경이 기원전 600년경에 쓰여 졌으니 이미 3천여 년 전에도 오이를 재배했다는 얘기 아닌가? 더군다나 껍질 벗긴 오이를 절여서 제사 음식으로 사용했으니 그 기원을 아무리 올려 잡아도 과하지 않을 듯하다. 음식연구가들은 여기서의 오이절임을 김치류의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삼아왔다. 제나라 위왕의 고사로부터 파생된 '오이 밭에서는 신발끈을 매지 말며 오얏밭에서는 갓끈을 매지 말라'는 속담을 통해서도 오이의 광범위한 재배 혹은 역사를 알 수 있다. 중국뿐만 아니라 우리의 옛 기록에도 호과(胡瓜)에 대한 정보들이 많다. 김치 전문가인 박채린의 연구에는, 서민음식으로 '오잇국'이, 궁중음식으로 '과제탕'이 등장한다. 과제탕은 각 재료를 길게 썰어 기름에 지지다가 장국을 붓고 양념을 첨가해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1600년대까지는 절인오이김치를 이용하다가 1700년대 이후에는 생오이를 활용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오늘날도 시큼한 식초를 넣은 오이냉국이 여름철 음식으로 대세인 것을 보면 오이야말로 고대로부터 이어온 원형질의 채소 아닐까싶다. 더군다나 설화 등 광범위한 장르에서 남근의 은유 혹은 잉태와 다산의 상징으로 기능해왔으니 그 맥락을 허투루 살필 수 있겠나. 지루한 장마가 계속되는 탓인지 소금에 절인 오이에 식초 듬뿍 넣고, 파, 설탕, 고춧가루 가미한 오이냉국을 마시고 싶은 마음, 어쩌면 가난한 내 뜨락을 오이정자(瓜亭) 삼아 상고하는 오래된 기다림의 정조일지 모르겠다.

정과정 비, 부산역사문화대전

싱싱한 오이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