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 섬진강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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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이윤선의 남도인문학> 섬진강 이야기
  • 입력 : 2020. 05.20(수) 14:04
  • 편집에디터

곡성 섬진강 철쭉길

"나 찾다가/ 텃밭에/ 흙 묻은 호미만 있거든/ 예쁜 여자랑 손잡고/ 섬진강 봄물을 따라/ 매화꽃 보러 간줄 알그라." 섬진강 시인 김용택의 '봄날'이라는 시다. 코로나19 사태로 두문불출, 사회적 격리를 일상화하다보니 매화 나들이는 언감생심, 봄날을 통째로 잃어버린 듯하다. 오월 신록 아래 만사 제치고 섬진강변을 걷고 싶은 이유다. 섬진강 생태와 관련한 설화 한 토막 풀어낸다. 설화는 사람들이 그 공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수용하고 또 의미를 부여했는지 등에 대한 욕망을 담고 있다. 섬진(蟾津)이라는 지명 자체가 두꺼비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이야기다. 나도 여러 차례 이 지면을 통해 소개한 바 있다. 이 이야기는 광양시 다압면 도사리 섬진 마을 강물 속 바위가 두꺼비 모양을 하고 있어 두꺼비(蟾) 나루(津)라 했다는 설로부터 시작한다. 이 바위가 물에 완전히 잠기면 마을이 부유해진다나. 처녀에 대한 두꺼비의 보은 이야기도 널리 알려져 있다. 한 처녀가 홍수에 떠내려가는 두꺼비를 구해주었다. 두꺼비는 훗날 그 처녀가 어려움에 처하자 구해 언덕 밑에 숨겨주었다. 두꺼비의 선행을 기리는 뜻에서 두꺼비 '섬'자를 써서 섬진이라 하였다. 홍수나 물의 범람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을 지명에서도 관련 정보를 찾아볼 수 있다. 구례읍 '산촌'은 대홍수로 마을이 없어졌다가 새로 터전이 들어섰다는 설화에서 비롯된 지명이다. 구례군 문척면 '선창'은 강물이 범람하여 마을이 배처럼 뜨고 강배가 마을 안까지 들어와 감나무에 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배바우 전설'은 천지가 개벽할 때 배를 타고 산 높이 올라가 배를 맸다는 전설에서 비롯되었다. 홍수설화를 배경으로 섬진강변의 지명설화들이 생기고 결국 섬진이라는 이름이 생겼음을 말해준다.

홍수설화와 섬진(蟾津)의 내력, 두치강이 섬진강이 된 까닭

이야기는 세월을 거듭하며 민중들의 기호를 재구성한다. 임란관련설이 대표적이다. 왜군이 하동에서 광양으로 건너오려 하자 수많은 두꺼비들이 출현하여 왜병들을 막았다는 설화다. 왜병들이 쳐들어오는데 우리 군사들이 섬진나루에 도착하였으나 배가 없었다. 두꺼비 수백 마리가 몰려와 다리를 만들어 주어 건널 수 있었다. 왜병들도 몰려와 두꺼비가 만든 다리를 건너려 했다. 하지만 두꺼비는 왜군들을 등에 태운 채 강물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야기는 확대 재생산된다. 구례 토지면 '피내'는 임란 때 석주성 전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피와 관련지어 회자된다. 장수군 반암면 대론리 굴바위 이야기도 유사한 정보를 전해준다. 임란 때 김씨와 신씨라는 사람이 굴바위에서 창검술을 익혀 남원성 전투에서 전과를 거둔다. 이후 이곳을 떠나지 않고 터전을 이루어 살았다. 김씨는 굴바위 남쪽에 터전을 잡아 수자골 마을을 이루고 신씨는 동쪽에 터를 잡아 대론마을을 이루었다. 나는 한국민속문학사전의 '섬진강 두꺼비'설화를 집필하며 이렇게 풀어두었다. 물난리에서 아가씨를 구하기도 하고 왜구를 물리치기도 한 섬진강두꺼비에 관한 전설은, 섬진강의 생태 환경을 중심으로 한 지명유래담으로 전승되다가 왜구 출몰기의 역사적 사건과 합쳐지면서 확장된 설화다. 섬진강은 본래 다사강 혹은 모래내 두치강(豆恥江) 등으로 불렸다. 이 이름이 섬진강으로 바뀐 이유를 주로 왜적과 관련하여 해석한다. 임진란보다 앞선 이야기도 있다. 고려 말 섬진강 하구에 왜구가 쳐들어왔다. 그러자 광양시 진상면 '섬거(蟾居)마을'에 살던 수십만 마리 두꺼비가 섬진나루에 몰려와 울부짖어 왜구를 물리쳤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우왕이 1385년(우왕 11)에 섬진강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 이름이 사용되고 있다나. 사실 두꺼비 관련 설화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선덕여왕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난 칼럼에서 그 의미를 밝혀두었으니 참고 가능하다. 이처럼 이야기는 민중들의 욕망과 기호에 의해 변하기도 하고 새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섬진강에서 생성된 이야기들

순창군 동계면 신흥리 할미성, 비흥재 할미성, 아미산의 대모산성, 순창면 홀어머니 산성 등은 오누이장수전설 유형의 스토리다. 남자는 나막신을 신고 서울에 다녀오기로 하고 여자는 성을 쌓는 내기를 했는데 여자가 억울하게 져서 죽게 되었다는 등의 구성을 취한다. 남원 운봉의 용계(龍鷄)마을은 닭들이 한밤중에 울어 병사들을 깨워준 덕에 이성계가 아지발도를 격파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기 위해 산제를 지내고 다니는데 지리산 산신은 우투리를 신임했다. 소금장수가 괴목나무 속 목신들의 대화를 엿듣고 이 사실을 이성계에게 알려주었다. 우투리가 투구를 들고 일어서면 이성계가 등극을 못하게 되는데 다행히 지리산신이 왕으로 내정했던 우투리를 죽이고 왕이 될 수 있었다. 무등산이 이성계를 반대했기 때문에 등급이 없는 무등(無等)이 되었다는 이야기와 맥을 같이 하는 우투리 이야기다. 광양 태인도에는 전우치가 도술을 부려 수령의 탐학을 징계하고 백성을 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그래서 전우치를 대인(大人), 태인(太人)이라 하다가 태인도가 되었다. 태인동 장터재에는 전우치가 도술을 부려 소금배를 유인하여 장터재의 연못에 쏟아 부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전우치가 수탈당하는 세곡을 빼앗고 탐관오리를 징치했다는 내용이 광범위하게 분포한다.

무엇보다 섬진강 설화는 왜적과의 관련설이 많다. 두꺼비가 도와주어 왜적을 물리쳤다는 내용이 주류다. 이것을 단지 임란 때의 왜구와 관련지어 해석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더 광범위한 생태적 맥락과 의미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단의 맥락은 설화를 통해서 보는 경상도와 전라도의 대립이나 교류를 생각해볼 수 있다. 섬진강을 매개로 한 유통과 교류의 흔적들을 통해서 이를 추적해보면 흥미로울 것이다. 구례군 문척면 오산사의 뜀바위 전설은 섬진강에서 나무를 운반하던 도사공 이야기다. 뗏목으로 나무를 운반하던 남편이 일을 떠난 후 부인이 오산사 뜀바위에 오르다 신발 한 짝을 떨어뜨렸다. 남편의 신상에 불길한 일이 있을까 조바심하다 부인이 죽고 말았다. 섬진강 하구에서 부인의 신발을 발견한 도사공은 아내를 잃은 설움에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뜀바위에서 신발을 떨어뜨리면 하동 앞바다에서 찾는다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 섬진강의 생태적인 노동현장을 보고하는 설화이기도 하지만 전라도와 경상도를 아우르는 섬진강의 문화적 내력을 또한 보여주는 설화이기도 하다. 아내를 구하러 저승까지 간 사나이라는 설화도 있다. 남사당패 일원이었던 '천국'이라는 청년과 '화분'이라는 마을 처녀와 사랑을 나눈 이야기다. 섬진강의 문화가 전국과 관련되어 소통되었음을 보여준다. 광양시 다압면 금천리 '염창'은 섬진강으로 소금을 실어와 보관하던 곳이다. 바다와 관련되어 있으니 전라도와 경상도 남해에서 유입되거나 반출되는 물류에 대한 생태적 물증 혹은 교류의 흔적들이다. 광양시 진월면 선소리는 배를 만들던 곳이다. 선소리의 미적도는 군량미를 쌓아두던 곳이다. 확장하면 가야나 신라 마한과 왜의 교류상들을 추측해볼 수 있다. 섬진이란 지명을 고려의 우왕이 하사했다고는 하지만 설화가 존재하기까지의 맥락들을 더 추적하는 지혜가 요구된다. 보다 중요한 것은 설화에 나오는 두꺼비, 거북이, 혹은 우투리나 전우치 등이 생태적인 환경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나아가 섬진강의 주세력과 상대세력간의 전쟁이나 갈등, 교류, 상관관계를 보여주는 매개물들임을 알 수 있다.

두꺼비에서 거북이까지, 섬진강의 이야기 생태

두꺼비는 재복(財福)을 의미하는 민속 상징을 가지고 있다. '떡두꺼비 같은' 등의 표형방식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 섬진강변 문화권의 두꺼비는 거북이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구례 문척면 구성(九城)마을은 본래 구성(龜城)마을이다. 금거북이가 진흙에 빠진 형국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구례군 간전면 복구(伏龜)마을은 거북이가 엎드려 있는 형국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광양시 진월면 오사리 돈탁마을은 돌터미, 돔태기 등으로 불렸는데, '영구(靈龜)등이' '거북등'으로 부른 내력이 있다. 비 오는 여름날 거북이가 섬진강변으로 나와 어슬렁거리는데 한 처녀가 놀라 '산이 움직인다'라고 소리치자 그 자리에 우뚝 서버렸다는 스토리다. 순창군 귀미(龜尾)마을의 전설은 명당터에 양씨 일가가 자리 잡게 된 내력의 이야기다. 산신령이 현몽하여 매를 활로 쏘아 떨어진 자리와 돌거북이 묻힌 곳을 파서 텃자리를 잡으라 했다. 양씨 혹은 이씨 할머니가 산신령의 말을 좇아 돌거북의 꼬리를 마을 쪽으로 돌려놓았는데 인재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구미리의 지명전설은 임란 때의 '아지발도' 스토리와 사찰과의 관련 등이 복합되어 있다. 구례군 토지면 오미동은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살만한 곳으로 꼽았던 '구만들'이기도 하다. 이 또한 거북모양의 돌이 출토되었다는 '금구몰니(金龜沒泥)'설과 관련되어 있고 운조루가 바로 이 증거라고 얘기하기도 한다. 이를 보면 섬진강 지명 중에서 유형적인 것이 두꺼비이지만 이것이 거북의 형태로도 광범위하게 나타나기도 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두꺼비와 거북이가 유사한 맥락으로 콘텐츠화되었다는 뜻이다. 섬진강변을 걸으며 생각한다. 강변의 늪과 마을숲과 그 안에 깃든 이야기들에 대한 묵상이 깊어만 간다. 섬진강 시인 김용택의 봄날을 차운하여 나도 한 줄 읊어볼까. "나 찾다가/ 텃밭에/ 흙 묻은 호미만 있거든/두꺼비와 거북이 만나러/ 섬진강가로 간줄 알그라"

남도인문학팁

섬진강변 사람들은 왜 두꺼비를 보면 '고수레'를 할까

섬진강 유역 사람들은 마당에 두꺼비가 나타나면 "고수레"라고 말하며 두꺼비에게 음식물을 던져 준다. 왜 그럴까? 두꺼비들이 다리를 만들어 우리 군사를 옮겨주고 왜군은 물에 빠트려 죽였다는 이야기 때문일까? 자연과 공생하는 '고수레'전설과 풍속이 섬진강의 두꺼비 특히 왜구와 관련지어 회자되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사람과 두꺼비 간의 관계가 강이라는 생태 환경을 통해 서로 조응하고 상생하는 가운데 왜구의 침입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결합하여 다양한 변이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두꺼비 나루에 조성된 두꺼비처녀 이야기는 좀 더 구체적인 내용으로 전개되었다. 섬진강 두치진 나루터에 마음 착한 아가씨가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장마가 진 어느 날 부엌으로 뛰어든 두꺼비가 가여워 보살펴 주었다. 겨울이 와 모든 두꺼비가 겨울잠을 자러 가도 이 두꺼비는 부엌 아궁이 옆을 떠나지 않았다. 삼 년 후 두꺼비는 큰 솥뚜껑만큼 커졌다. 어느 날 밤 섬진강 상류에 폭우가 쏟아져 물이 불어나 아가씨가 익사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다행히 아가씨는 두꺼비를 타고 강기슭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하지만 물살과 사투를 벌였던 두꺼비는 강기슭에 도착하자마자 죽어 버렸다. 섬진강변 동산에 두꺼비를 장사지내고 매년 제사지내는 근거로 이 설화가 제시된다. 대개의 당산제 설화가 이런 형식이다. 변이본의 내용은 두꺼비를 매개로 섬진강과 사람들 사이의 삶의 관계를 보여준다. 이런 유형의 보응 설화들이나 의례는 바다 쪽으로 나가면 거북이나 고래로 형상화되는 예가 많다. 늪에서 사는 두꺼비와 거북이, 고래와 공생하는 삶은 어떤 것일까?

전북 순창군 동계면 어치리 용궐산에서 바라본 섬진강 일원의 전경. 뉴시스

한국의 경관도로, 곡성 섬진강길. 뉴시스

섬진강기차마을 . 뉴시스

화개 장터로 향하는 전남 광양시 다압면 섬진강매화로가 만개한 벚꽃이 터널을 이루고 있다. 뉴시스

경남 하동군 악양면 인근 섬진강에서 한 낚시꾼이 강물을 따라 낚시대를 드리우고 한가로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 뉴시스

섬진강변에 자리잡은 옛 구례 농촌마을. 뉴시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