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호균의 사찰문화재 바로알기 8> 강진 사문안 석조상(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8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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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균의 사찰문화재 바로알기
황호균의 사찰문화재 바로알기 8> 강진 사문안 석조상(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87호) 
국내 유일 도깨비 조각상, 사찰 장승 시원 호법 수호신
  • 입력 : 2020. 04.30(목) 14:22
  • 편집에디터

1. 강진 사문안석조상 전경(1990년대 촬영, 사진 문화재청)

국내 최초 도깨비 조각상의 출현

월출산 천왕봉 아래 남쪽 산기슭 1만여 평의 광활한 대지에 펼쳐진 월남사의 옛터. 거기에는 덩그러니 놓인 삼층석탑과 진각국사 혜심의 탑비만이 지난 역사를 웅변하는 듯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안타까운 마음을 뒤로하고 고개를 조금만 돌려보면 삼층석탑에서 약 3.6㎞의 거리에 '사문안(寺門안)'이란 곳에 있었던 입석 모양의 직육면체 돌기둥에 도깨비 같은 것들을 가득 새겨놓은 또 하나의 놀라운 초국보급 문화재를 만날 수 있게 된다.

도깨비 조각상의 원 위치 및 이전・회수 과정

도깨비 조각상은 퇴동마을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 길가에 위쪽 끝부분만 지상으로 돌출되어 있었다고 한다. 마을회관에서 서남쪽에서 500미터 떨어진 거리이다. 광복(1945년)되기 2~3년 전에 월남사지가 위치하는 월남리의 주민들이 옮겨갔다가 다시 그 밑의 대좌를 파러 온 것을 퇴동 마을 사람들이 발견하고 월남리로 간 조각상을 회수하였고 그 시기는 광복되기 바로 전이며 그때 분실을 우려해 지금의 위치로 옮겨 놓은 것이라고 한다.

도깨비 조각상의 형상 특징

원반형 대좌 한 가운데에 촉 구멍을 만들고 그 위에 직육면체의 돌기둥을 꽂아 세웠다. 돌기둥 3면에 새겨진 13구의 조각상 가운데 앞면의 3구 조각상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앞면이라는 위치에서도 그렇고 압도적인 크기에서도 그렇다.

3구 조각상은 모두 도깨비가 분명하며 중앙에 가장 큰 조각상은 허약한 왼 다리를 감추고 금방이라도 씨름하자고 덤벼들 것 같은 전형적인 도깨비 형상이다. 머리에는 도깨비 감투를 쓰고 얼굴에는 날카로운 송곳니가 밖으로 뻗어 나왔으며 발가벗은 상체와 오른손은 연꽃봉우리를 들고 왼 다리를 허약하게 표현한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이러한 송곳니는 유몽인의 '어우야담(於于野譚)'(17세기 초반)에서 "도깨비의 형상은 머리가 두 개 눈이 네 개에 높은 뿔이 나고 아가리는 벌리고 이빨을 드러내며 눈동자와 아가리가 시뻘겋다."라고 기록해 놓은 것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이것은 불교 설화와 민담에서 비롯된 우리의 전통적인 관념 속에 존재해 온 도깨비를 유형의 형상물로 조각한 것으로 판단된다. 일반적으로 도깨비들의 신통력은 방망이로 대표되고 있으며 허리 윗부분은 안 보이고 아랫부분만 보인다는 전래의 관념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더구나 이들 조각상 가운데 왼쪽 다리를 허약하게 표현하고 힘없이 구부려진 채 오른쪽 다리에 붙인 것은 도깨비가 왼쪽 다리가 허약하다는 통념을 반영한 것이다. 이러한 다리 형상은 '용재총화(慵齋叢話)'(중종 20년, 1525년)에서 "도깨비는 허리 위는 보이지 않고 아래만 보이는데 종이 옷을 둘렀고 다리는 고수무육(枯瘦無肉)으로 마치 흑칠을 한 것 같다"라며 도깨비의 형상을 상세히 묘사한 것을 연상시킨다. 키가 너무 커서 옷을 못 해 입고 백지로 가릴 곳만 가린다는 도깨비의 고사처럼 중요한 부분만 가리고 맨살을 드러냈다.

도깨비상들은 모두 돋을새김 방식으로 크게 조각되었지만 좌우 옆면의 좌상과 입상・얼굴상 등 승려상 같은 형상은 선각으로 자그마하게 새겼다. 도깨비상은 대체로 헐벗은 상체, 밖으로 뻗어 나온 날카로운 송곳니, 허리끈, 바지주름, 대님, 버선발, 연꽃잎 든 오른손, 근육질 상체, 허약한 왼다리, 네 손가락, 도깨비 감투 착모, 주름치마, 짧은 반바지 등의 특징들이 묘사되었다. 반면 선각상에는 육계나 삼도 같은 부처상의 특징적인 모습이 보이지 않아 모두 승려상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각상이 놓인 원래의 위치와 외형적 관찰을 통해 몇 가지 기능적 요소들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첫째 조각상이 있는 곳 주변을 '사문안'이란 지명으로 부르는 것으로 보아 절 입구의 경계 표시로 건립되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사문(寺門)'에서 의미하는 절은 지리적으로 가깝고 지형적으로 연결된 월남사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둘째 조각상에 새겨진 형상들로 미루어 단순히 경계 표시에만 그치지 않고 재앙을 막아 주고 벽사 기능을 한 사찰수호 호법선신 같은 종교적인 의미도 함께 담아 세웠을 것이다. 우리나라 불교에서 도깨비는 불법을 수호하는 수문장으로 등장하는 것으로 미루어 사찰장승이 또 하나의 새로운 형태인 도깨비 조각상으로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등장했다.

도깨비의 유래와 불교에서의 수용

도깨비는 동물이나 사람의 형상을 한 귀신으로 도채비・독각귀(獨脚鬼)・독갑이[狐魅]・허주(虛主)・허체(虛體)・망량(魍魎)・영감(제주도) 등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삼국유사'1281년 편찬) 등 여러 문헌에도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때 삼국시대도 이미 도깨비 신앙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추측된다. 특히 '고려대장경' 간행을 계기로 인도와 중국의 도깨비 설화들이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했다. 조선전기에 수양대군에 의해 간행된 '석보상절'(1447년)에는 '돗가비'로 기록하였다.

우리나라의 도깨비는 인간에게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의 양면성을 보이지만 중국이나 일본의 도깨비들과는 달리 인간을 살해할 만큼 악독하지 않고 인간의 꾀에 넘어가 초자연적 힘을 이용당하는 미련함을 보이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은현자재 하는 괴력을 지녔으면서도 인간에게 친근한 존재라고 여겨 우리의 실생활에 병이나 질병, 액운을 막는 수호신의 의미로 주로 귀면 문양을 사용해왔다. 우리의 옛 전설이나 민담 속에 살아 숨 쉬면서 전해져 한국인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도깨비는 인간의 무절제와 부주의를 경계시켜 우리 민족의 생활과 마음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서 또는 천재지변으로부터 인간을 지켜주는 벽사신앙으로 자리 잡아 왔다.

우리나라 문헌이나 전래동화・민담 등에서 널리 유포된 도깨비 이야기에 비해 조형적인 유물로 등장한 것은 대부분 귀면문(鬼面文)이나 고려불화와 민화 정도에 그친다. 기와나 고구려 고분벽화, 건축물이나 각종 가구, 주술적인 제기(祭器)의 장식 의장 등에서 나타나는 귀면문양과 고려불화나 민화에 그려진 쌍뿔 도깨비를 제외하고는 '강진 사문안도깨비 조각상'이 도깨비 조각상으로는 유일하다.

불교 설화에서도 도깨비들이 나타난다. 불교 설화와 관련된 도깨비들의 이미지는 절간의 대문을 지키고 있는 사천왕상이나 신장상들과 관련이 깊다. 야차와 나찰은 쿠베라(kubera)와 함께 B.C 15세기에서부터 B.C 5세기에 걸쳐 베다 경전과 서사시 마하바르따, 라마야나 등에 수용되어 베다 시대, 브라흐만 시대, 힌두 시대를 거쳐 불교 시대의 신격으로 수용되었다. 쿠베라・야차・나찰의 캐릭터 중 사람을 부자가 되게 하는 능력과 자유자재로 이동하고 변신하며 선신과 악신의 기능을 가진 남성으로서 방망이를 가진 점들이 불교에 그대로 승계되어 온 것이다. 말하자면 도깨비에 해당하는 쿠베라・야차와 나찰의 캐릭터는 인도 고유의 정령 사상과 자연현상을 의인화하면서 생겨난 것이다.

10세기 중국에서 간행된 '개보장(開寶藏)'에는 인도 불경과 중국 불경이 섞여 있고 이를 바탕으로 고려 시대에 세 차례 간행된 '고려대장경'에는 옛 두 나라의 도깨비 문화가 공존하고 있다. 이런 도깨비를 먼저 수용한 것은 주로 지식층이었으며 이어 생산자 계층에도 널리 유포되었다. 특히 불경에 나타난 도깨비 캐릭터는 우리나라 고유의 도깨비 신앙과 함께 또 다른 외래 도깨비를 수용하는 실마리가 되었다. 우리나라 불교에서 도깨비는 사찰을 지키는 수호신이며 재앙이나 귀신・질병 등 사람을 해치는 나쁜 기운을 물리치는 친근한 존재이다.

뿔 달린 도깨비는 일본 도깨비라는 주장의 허구

한국 도깨비에 뿔과 방망이가 등장하는 것은 일제강점기 교과서에 기술된 '혹부리영감(일본 전래민담 '고부도리지이'의 각색)'에 등장한 도깨비[일본 '오니(鬼)']의 영향이라는 주장이 한때 매스컴을 달군 적이 있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치 그것이 사실인 양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뿔 달린 도깨비는 이미 우리나라에서 신라 귀면와(삼신사출토)와 통일신라 귀면와(안압지 출토, 녹유귀면와)에서부터 광범위하게 표현되어왔다. 특히 고려 불화에서는 '양각야차(兩角夜叉)' 즉 '쌍뿔 도깨비'로 등장하기도 하고 조선후기 민화인 지옥도(뿔달리 조선 양각요괴, 해외옥션문화재 출품 매각, 18세기말~19세기초)와 해상명부도팔폭병풍(12지 동물과 각종 바다 요괴들의 사후세계, 조선후기 민화) 그리고 당사주(당사쥬, 조선)에서도 흔히 발견된다. '도깨비 방망이'는 양각야차(고려 불화), 지옥도(조선후기 민화), 조선 시대 문집[加資와 兼帶한 홍문관 제학을 사직하는 소, 박세당의 '西溪集' 권 6 疏箚, 기묘년(1699년, 숙종 25) 등] 등에서 그 사례가 찾아진다.

도깨비 조각상의 조성연대

월남사는 최근의 발굴결과 창건기(6세기 후반~10세기)와 중창기(13세기~14세기), 쇠퇴기(14세기 후반~16세기)에 이르는 역사를 간직했음이 밝혀졌다. 폐사 시기에 대해서도 고문헌・지리지・고지도를 통해 늦어도 16세기 후반에는 폐사에 이르렀음이 확인되었다. 반계 유형원이 1656년에 편찬한 '동국여지지'에서부터 모든 지리지・고지도에서는 월남사가 폐사된 것으로 기록하였다. 구체적으로는 백호 임재(1549~1587년)의 '過月南寺遺址'란 시에서 알 수 있듯이 이미 16세기 후반경에는 폐허에 이르렀음이 분명하다. 이는 16세기 후반경에 이미 폐사된 것으로 보는 발굴결과와 상당히 일치한다.

강진 사문안 도깨비상은 이러한 지리적 위치나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적어도 월남사가 폐사되기 전인 조선 중기인 16세기 말 이전에 조성된 유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에서 도깨비 설화가 가장 왕성하게 유포되던 '고려대장경' 간행 시기인 13세기는 고려 무인정권과 밀착된 진각국사 혜심이 월남사를 중창하던 시기와 맞물려 있다. 어쩌면 중국불화나 고려불화에 등장한 쌍뿔 도깨비와 형태적 유사성에 비추어 볼 때 빠르면 월남사의 중창기(13세기~14세기)까지도 조성 시기를 올려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도깨비를 형상화한 국내 유일의 유형 가공물

강진 사문안 도깨비상은 불교 설화와 민담에서 유래된 도깨비를 형상화한 유형의 가공물로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도깨비 조각상으로는 유일하다. 우리나라 전역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도깨비 관련 민담에 비해 구체적인 형상의 유물로서 귀면기와와 고구려 고분의 귀면벽화・고려불화・조선 민화를 제외하고는 전혀 발견되지 않은 상황에서 도깨비를 조각상으로 형상화한 진귀한 사례이다. 이는 우리나라 도깨비의 원형을 가장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획기적인 유물이다.

우리나라 도깨비의 원형이 가장 충실히 담긴 자료로서 지금까지의 문화재들에 비해 상당히 이례적이고 독특한 형상을 보여준다. 예술적인 측면에서 우수한 표현력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신앙적으로도 특수한 불교의 세계관과 민속 신앙적 성격이 강한 전통적인 관념의 세계를 잘 드러낸 상징성을 지닌 조형물이다. 사찰 장승의 시원인 초국보급 문화재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사문안 입구 길가 땅속에 파묻혀 지낸 체 몇백 년이란 세월을 감내했고 여기저기 옮겨 다니다가 이제는 퇴동마을 당산나무 아래에서 잠들어 있는 사찰 도깨비 수호신이여! 부디 깨어나시라!

2. 강진 사문안석조상 전경(1995년 촬영, 답사여행의 길잡이 5-전남)

3. 강진 사문안석조상 앞면 도깨비상(사진 황호균)

4. 강진 사문안석조상 향우측 경사면 도깨비상(사진 황호균)

5. 강진 사문안석조상 향우측면 전경(사진 황호균)

6. 강진 사문안석조상 향우측면 도깨비상(사진 황호균)

7. 강진 사문안석조상 앞면과 향좌측면 도깨비상(1990년대 촬영, 사진 문화재청)

8. 강진 사문안석조상 향좌측면 승려 얼굴상(사진 황호균)

9. 강진 사문안석조상 원반형 여의두문 대좌(사진 두산백과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