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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균의 사찰문화재 바로알기 6> 강진 무위사 아미타여래삼존좌상(보물 제13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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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균의 사찰문화재 바로알기 6> 강진 무위사 아미타여래삼존좌상(보물 제1312호) 

후불벽화와 삼존불상의 완벽한 조화, 입체 조형 예술의 극치

게재 2020-04-05 16:15:01

1. 무위사 극락보전 아미타여래삼존좌상(사진 황호균)
1. 무위사 극락보전 아미타여래삼존좌상(사진 황호균)

극락보전 최고의 문화재적 가치, 입체와 평면의 예술적 완성

무위사 극락보전 내부에는 놓치기 쉬운 국보급 문화재가 있다. 그동안 건물 자체나 화려한 벽화들의 명성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은 극락보전의 실질적인 주인공으로 극락보전이나 후불벽화도 사실상 이 '아미타여래삼존좌상'을 위한 건물과 배경화에 지나지 않는다. 무위사 극락보전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문화재적 가치도 후불벽화와의 조화 속에서 일구어낸 입체와 평면의 예술적 완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조각과 회화의 절묘한 앙상블

극락보전 안에 들어와 불단 위의 삼존불상과 후불벽화를 함께 바라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벅차오른다. 삼존불상이 후불벽화를 압도하지 않고 주존불화 무릎 높이 아래에 배치된 공간 구성의 조화로움에서 밀려온 진한 감동 때문이다. 삼존불상은 건물 내부 공간의 규모에 비해 약간 작고 아담한 듯 보이지만 후불벽화를 부담스럽게 가리지 않을 정도의 딱 적당한 크기이다. 불단과 불상, 후불벽화가 서로 공간적 부피감까지 고려하여 함께 설계 제작되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무위사 극락보전의 경우는 불단의 삼존불상이 후불벽화(후불탱화)를 주존불상 무릎 위까지 가리는 조선 후기 사례들과는 그 예술적인 품격이 다르다. 후불벽화의 중앙 아래에 주존상의 머리가 위치하면서 후불벽화에 그려진 아미타불의 무릎과 대좌 부분만 주존상에 의해 가려지는 크기이다. 이는 예배상과 배경화의 주된 의미를 충실히 설계에 반영한 결과이다. 마루에서 엎드려 절하다가 바닥 높이에서 바라다본 삼존불과 후불벽화는 예배자의 눈높이까지 고려한 조각과 회화의 절묘한 앙상블이다. 세계 불교문화권 어느 사찰에서도 보지 못한 삼존불상과 후불벽화의 완벽한 조화를 이룬 입체 조형 예술의 극치이다.

불단의 변화 - 공양물 진설과 내부 공간 확보, 협시보살 등장의 배경

고려시대 불전의 불단과 불상은 조선시대에 비해 그렇게 크지 않다. 불단과 닫집이 일체형인 목가구 구조물 위에 단독불 위주로 봉안되어 특권 계층의 예배 대상으로 그치고 말았다. 하지만 조선시대 불전은 불단과 닫집이 분리된 채 내부에 마루와 불단을 가설하고 그 위에 기둥을 세워 벽체를 설치하여 후불벽화를 그리거나 후불탱화를 거는 오늘날과 같은 구조로 변화되었다. 아울러 불단의 위치도 뒤쪽으로 옮겨 앞 공간이 넓어지게 하는 이주법(移柱法)을 사용하여 많은 예불자의 참여가 가능해지는 공간 확장성도 노렸다. 무엇보다도 높고 넓은 불단은 공양물을 진설하기 위한 공양대와 대좌 밑바닥의 기능을 더해 주존불상 좌우에 협시상인 지장과 관음보살상을 등장시켜 신앙적 다양성을 더했다.

수륙사 지정 후 내부 개조, 그 정점에 자리한 삼존불상

무위사가 언제부터 수륙사로 지정되었는지 그 정확한 연대는 밝혀지지 않았다. 대체로 극락보전(1430년) 건립 후 46년이 지난 후인 1476년에 내부를 대대적으로 개조하는 것으로 보아 1476년으로 추정된다. 극락보전 대들보 상면에 '修設水陸'이라는 세 군데의 낙서 같은 먹글씨가 쓰여있다. 이러한 낙서는 어쩌면 문구의 내용으로만 보자면 '水陸社'로 지정된 후 '설단(設壇)'을 위해 극락보전 내부를 개조할 때의 고단한 과정을 어떻게라도 기록하려는 '화공과 목공'의 재치인지도 모르겠다.

1476년의 내부 개조는 수륙재의 특성상 예불자용 공간을 많이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가장 큰 목적이었다. 1430년에 완공한 건물에 설치된 일체형 목가구 구조물인 불단과 닫집, 그리고 전돌바닥은 불법 강설 참여자 동참 공간 확보 및 좌식 생활 환경을 위해서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다. 우선 일체형인 불단과 닫집을 제거하고 분리형으로 불단을 배치하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먼저 일정한 높이로 마루와 불단을 가설하였다. 불단을 멀찍이 뒤쪽으로 밀치고 그 위에 거대한 후불벽을 세우고 아미타신앙을 모티브로 하는 그림까지 그려 웅장하고 드라마틱한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넓은 불단의 주존불상 좌우에 협시상인 지장과 관음보살상을 새롭게 모시기 위한 조각상의 제작에도 들어갔다. 사실상 1478년에 들어와서야 지장보살 및 관음보살을 추가로 조성 봉안하여 아미타여래삼존좌상을 성립시켰다. 이때부터 '수륙사'로서의 '수륙재'와 같은 '재'를 지낼 수 있는 특별한 환경이 비로소 완성되었다.

조형적 완성도 높은 걸작품, 후불벽화 배경으로 예술성 극대화

삼존불상은 불전에 모시는 소조불이나 목불 가운데 제작 시기가 빠른 편에 속할 뿐만 아니라 조형적 완성도가 매우 높은 걸작품이다. 아미타불이 서방정토 극락세계에서 무량한 설법을 하는 장면을 묘사한 아미타극락회상도인 후불벽화를 배경으로 같은 주제와 설계를 통해 삼존불상을 제작 봉안하여 예술성을 극대화하였다.

넓은 불단 위에 팔각대좌와 연화좌대를 놓고 그 위에 삼존불상을 모셨다. 주존상인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왼편에 관음보살과 오른편에 지장보살이 협시한 아미타여래삼존좌상이다.

아미타불상은 앙련(올림꽃)과 복련(내림꽃)이 합쳐진 겹꽃 연화좌대 위에 앉았다. 건장한 체구에 무릎이 넓어 안정감 있는 신체비례를 지녔다. 양어깨를 모두 감싼 옷을 입고 있다. 엄지와 중지를 맞댄 손 모양은 아미타구품인 중 하품중생인을 맺고 있어 아미타불임을 증명한다. 옷은 두껍고 왼쪽 어깨의 옷깃이 'N'자 모양이다. 하의의 치맛자락은 평행이며 띠 매듭은 규격화되었다.

관음보살상은 아미타불상과 거의 같은 양식으로 왼 다리를 대좌 아래로 내려놓은 유희좌이다. 지장보살상의 연화좌대와 같은 여러 겹으로 포개진 올림 꽃의 겹꽃 연화좌대 위에 앉았다. 반대쪽에 자리한 지장보살상과 발 방향은 대칭되고 모양도 상당 부분 유사하다. 밑으로 내린 유난히 크고 통통한 왼 다리와 무릎 위의 좌우로 뿔처럼 혹이 솟아나 있는 모습은 대체로 형태는 비슷하지만 옷 주름이나 옷자락 등의 세부 모습에서는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머리에는 화려한 꽃장식을 오려 덧붙인 묵중한 보관을 쓰고 가슴에는 간단한 모양의 가슴 장식이 있으며 양어깨에 곱슬한 머리칼이 흘러내린 모습이다. 두 손은 선정인처럼 앞으로 모아서 버드나무를 꽂은 보병을 받쳐 들었다. 버드나무 꼭대기에는 후불벽화 설화에서 날아가 버렸다는 파랑새가 아미타불상을 향해 고개를 돌려 바라보며 앉았다.

지장보살상은 관음보살상과는 반대로 대칭되게 오른 다리를 대좌 아래로 내려놓은 유희좌이다. 비교적 작고 갸름한 얼굴이고 머리에는 두건을 썼다. 오른손으로 지팡이를 짚고 오른쪽 다리를 대좌 아래로 내려뜨렸다.

지장보살과 관음보살의 연화좌대 앞면 한가운데에는 흘러내린 옷자락을 표현하였다. 보살상과는 분리되었지만 포개진 다리에서 흘러내린 옷자락을 묘사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옷 주름은 서로 대칭을 이루었지만 세부적으로는 조금씩 다른 표현이 눈에 띈다.

불상 과학적 정밀조사

주존불상은 소조(점토로 빚은 조각상)이고 협시보살상은 목조로 제작된 조선전기의 유일한 소조와 목조상의 조합을 이룬 삼존상이다. 아미타상은 몸체부터 연화좌대까지 연결된 목심 위에 점토를 두텁게 붙여 만든 소조상이다. 좌우 보살상들은 여러 조각의 나무를 잇대어 못으로 고정한 접목조 기법의 목조상이고 일부 굴곡진 부분은 필요에 따라 흙으로 마무리하는 방법을 활용하였다. 소조아미타여래상은 목심 외면을 거칠게 쪼아서 흙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하였고 점토에는 면섬유를 보강해서 접착력을 높였다.

아미타여래삼존상의 제작 시기에 대한 여러 학설

그동안 삼존불상 조성 발원문이 발견되지 않아 막연히 건물 완공연대(1430년)나 후불벽화 완성시기(1476년)로 추정해 왔다. 다행히 2000년대에 들어와서 전남 장흥 보림사 북삼층석탑(국보 제44호)의 납석제 탑지의 기록(成化十年四戊戌四月十七日……無爲寺造主佛設大會安居)을 근거로 '1478년설'이 제기되었다.(최선일, 이분희) 하지만 2014년에 아미타여래삼존좌상을 보존처리한 직후에 발표된 논문에서 형식과 양식 및 제작기법상 아미타불상과 협시보살상이 서로 일정한 차이를 보인 점에 착안하여 아미타상은 1430년에, 협시보살상은 1478년에 시차를 두고 각기 따로 조성되었다는 획기적인 주장이 등장하였다.(김광희)

아미타여래삼존좌상의 별도 제작설의 합리적 추론

삼존불상의 제작 시기 차이를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조각상의 재료와 제작방식에서 찾을 수 있다. 삼존불상의 삼단 팔각대좌와 좌우협시 보살상의 연화좌대는 그 제작방식이 서로 같은 점에서 비추어 볼 때 1478년에 함께 제작된 증거이다. 결정적으로는 주존불상과 보살상의 재료가 소조와 목조(적송류)로 서로 다를 뿐만 아니라 주존불상의 연화좌대는 주존불상과 같은 소조이면서도 일체형이지만 협시보살상은 분리형으로 목조인 점에서도 매우 분명한 시간적인 차이가 느껴진다.

불상과 보살상의 연화좌대 모습이 현저히 다르다는 데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주존불상은 올림꽃과 내림꽃의 연판형 꽃잎이 돌아가는 형태이고 좌우 협시보살상은 다섯 겹의 올림꽃 연꽃잎이 겹겹이 표현된 형태로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연꽃의 꽃잎 표현은 두 협시보살의 경우 꽃잎 끝이 날카롭고 서로 겹쳐진 같은 방식이지만 주존불상은 꽃잎 끝 가운데가 들어간 좀 더 부드럽고 단정한 솜씨를 보여 양 협시보살상과는 그 차이가 확연하다.

삼존불상의 형상 비교

아미타여래삼존좌상은 큰 틀에서 서로 많이 닮았지만 세부적인 부분에서는 다른 점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얼굴 형태와 이목구비 표현도 같은 듯 하면서도 다르다. 주존상의 경우 여러 차례 보수되기는 하였으나 1932년 유리건판 사진과 비교해 보면 그 차이가 확연하다. 삼존상은 모두 방형 얼굴이지만 주존불상의 양 볼과 턱이 전체적으로 볼륨이 풍만한데 비해 보살상은 턱 부분만 부풀어 오른듯하다. 특히 아미타상의 눈은 눈두덩이가 선명하며 비스듬히 눈꼬리가 올라가지만 보살상들은 눈 시선이 아래를 향하는 반달형이다. 승각기를 묶은 띠 주변의 옷 주름도 아미타상의 부피감이 훨씬 두드러진다. 뒷면의 대의 자락은 주존상의 경우 비스듬히 뻗어 내려가는 각도와 모양이 다르다. 이처럼 닮은 점보다 다른 점이 많다는 것은 제작 시기의 차이에서 오는 결과로 해석된다.

1430년 극락보전 완공 당시 아미타불상 조성으로 예불 기능 수행

무엇보다도 무위사는 신축 사찰이 아니고 이미 존재하던 사찰의 전각을 중창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극락보전이 건립(1430년)되고 이후 아미타여래삼존벽화가 그려지거나(1476년) 삼존불상이 조성(1478년)되던 46년~48년 동안 중심 불전에 주존불상이 없었다는 것은 불전 의례가 중지된 것을 의미하여 합리적인 해석이 아니다. 더 확실한 근거로는 1430년에 불전 완공 때 내부 바닥에 전돌이 깔린 구조라는 데에 있다. 이는 고려시대에 유행한 불단과 닫집이 일체형으로 이루어진 목가구 구조물 위에 단독불상 형태의 아미타불상이 1430년에 조성 봉안되어 정상적인 불전 기능을 수행했을 가능성을 짙게 시사한 것이다. 1476년에 마루와 불단을 미리 가설하고 후불벽체를 불단 위에 설치한 것은 후불벽화 작업 기간에도 정상적인 예불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최선의 장치로도 이해된다. 극락보전 내부 크기보다 아미타불상이 조금 작게 느껴지는 것도 어쩌면 불단과 닫집이 일체형일 때 조성했기 때문으로도 해석된다.

망자 추선 및 천도를 위한 지장 관음보살 위주의 아미타삼존 도상 유행

아미타불과 관음·지장보살로 구성된 아미타삼존 도상은 망자 추선 및 천도를 위해 대세지보살 대신 지장보살이 위치하게 되었고 여말선초에 유행하였다. 참회를 통해 업을 해소하는 '자비도량참법'은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아미타신앙과 중생을 지옥이나 현세의 고통에서 구제하는 지장보살과 관음보살의 성격과 결합된 것이다. 이러한 지장신앙의 등장은 고려 말과 조선 초의 인근 강진 영암 해남 해안가의 잦은 왜구의 출몰과 기근에서 조선 초기에 수륙제를 지내야만 하는 사회적인 배경 속에서 탄생하게 되었다.

국보가 되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 하고서

후불벽화와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조형적으로 예술적 완성도가 극치인 걸작품이 어떤 이유에서 '보물'로 그치고 말았는지 무척 아쉽다. 엄밀히 따지자면 극락보전이나 각종 벽화도 아미타여래삼존좌상을 모시기 위한 조연에 불과할 뿐인데도 말이다. 하루빨리 '국보'로 대접받을 날이 오기를 학수고대하며 후불벽 뒷면으로 돌아가 그 유명한 '무위사 극락보전 백의관음도' 앞에 섰다.

2. 무위사 극락보전 아미타여래삼존좌상 옛 사진(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박물관 유리건판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934년 이전 촬영)
2. 무위사 극락보전 아미타여래삼존좌상 옛 사진(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박물관 유리건판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934년 이전 촬영)
3. 무위사 극락보전 주존 아미타여래좌상(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박물관 유리건판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932년 촬영)
3. 무위사 극락보전 주존 아미타여래좌상(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박물관 유리건판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932년 촬영)
4. 무위사 극락보전 주존 아미타여래좌상(사진 황호균)
4. 무위사 극락보전 주존 아미타여래좌상(사진 황호균)
5. 무위사 극락보전 우협시 지장보살상(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박물관 유리건판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932년 촬영)
5. 무위사 극락보전 우협시 지장보살상(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박물관 유리건판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932년 촬영)
6. 무위사 극락보전 우협시 지장보살상(사진 황호균)
6. 무위사 극락보전 우협시 지장보살상(사진 황호균)
7. 무위사 극락보전 좌협시 관음보살상(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박물관 유리건판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932년 촬영)
7. 무위사 극락보전 좌협시 관음보살상(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박물관 유리건판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932년 촬영)
8. 무위사 극락보전 좌협시 관음보살상(사진 황호균)
8. 무위사 극락보전 좌협시 관음보살상(사진 황호균)
9. 무위사 극락보전 불단(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박물관 유리건판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934년 이전 촬영)
9. 무위사 극락보전 불단(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박물관 유리건판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934년 이전 촬영)
10. 장흥 보림사 북삼층석탑 탑지 사진(1478년, 사진 국립광주박물관)
10. 장흥 보림사 북삼층석탑 탑지 사진(1478년, 사진 국립광주박물관)

11. 장흥 보림사 북삼층석탑 탑지 탁본(1478년, 탁본 남도불교문화연구회)
11. 장흥 보림사 북삼층석탑 탑지 탁본(1478년, 탁본 남도불교문화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