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호균의 사찰문화재 바로알기 1>(1)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국보 제13호)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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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균의 사찰문화재 바로알기
황호균의 사찰문화재 바로알기 1>(1)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국보 제13호) ①
왜구의 침략과 기근에 억울하게 희생된 혼령들을 위로하기 위해 강설과 음식을 베푸는 수륙재 전문 특화 불전  
  • 입력 : 2020. 01.09(목) 12:58
  • 편집에디터

어려운 한자 투성이의 상투적인 문화재 해설에서 벗어나 역사적인 배경과 문화사적 의미를 알기 쉽고 명쾌하게 풀어낸 '황호균의 사찰문화재 바로알기'가 격주로 여러분 곁을 찾아갑니다. 필자는 전남대학교 박물관에서 불교문화재 전문가로 일하면서 다양한 활동을 해왔습니다. 절터 발굴뿐만 아니라 사찰 연혁 및 불교 문화재 연구와 교육에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있으며 왕성한 저술활동으로 지역 문화계를 이끌어가고 있습니다.〈편집자주〉

1. 1958년 무위사 전경('무위사 극락전 수리공사보고서', 1958, 국립박물관.)

○월출산 남서쪽 자락에 자리한 명찰, 무위사

1980년대 초 무위사 극락보전 내부에서 받은 충격과 환희는 아직도 생생하다. 지난 40여 년 동안 국내는 물론 해외 불교문화권 답사를 다녀 보아도 그 가치가 전혀 퇴색되지 않았고 오히려 더 소중해져 갔다. 요즘에는 불전 내·외부에서 발견되는 여러 현상에 담긴 의미들이 하나둘씩 새롭게 다가오기까지 한다.

강진 월출산 무위사는 조선전기에 국가로부터 수륙사(水陸社)로 지정된 이후 이미 건립되었던 극락보전의 내부를 수륙재(水陸齋)를 지내기 편리한 구조로 개조한 사정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뿐만 아니라 후불벽과 불단·내부 사면 벽에 벽화와 불상을 그리고 조성하는 의미도 예사롭지 않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동안 무위사 극락보전에 대해 벽화와 단청이 아름답다거나 고려 시대 양식이 고스란히 담긴 조선 초기에 건립된 불전이란 정도로만 알려졌을 뿐 그 가치가 일반인들에 제대로 소개되지 못했다. 이는 건축사적인 의미와 미술사적인 평가가 서로 분산되어 종합적인 접근이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위사 극락보전, 조선시대를 여는 기념비적인 고건축물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은 광주 전남지역의 고건축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그 가치가 인정되어 일찍부터 국보 제13호(1962. 12. 20.)로 지정될 정도이다. 무위사 극락보전은 1430년에 만들어져 고려 후기의 불전인 봉정사 극락전(12∼13세기)이나 수덕사 대웅전(1308년), 부석사 무량수전(1376년)보다는 조금은 뒤늦은 시기이지만 조선전기의 불전 가운데 봉정사 대웅전(1435년)이나 개심사 대웅전(1484년)보다는 가장 이른 시기의 건축물이다.

용마루의 선을 쭉 뻗게 하지 않고 슬쩍 공그려 처지게 하여 주변 산등성이의 곡선과 어울리게 편안함을 주는 점이라든지 지붕을 맞배 형식으로 한 것이나 공포를 여러 개 얹지 않은 주심포식 집으로 단정하고 엄숙한 맛을 지니게 하는 안목 또한 빼놓을 수 없다. 특히 건물의 외형적인 부분에서는 적당한 높이의 기단부 위로 기둥부와 지붕부가 1대1의 비율을 보여 가장 이상적인 편안함을 느끼는 심리적인 시선의 안정감을 설계에 반영하여 구현해 낸 점도 인상적이다.

나아가 수륙제를 지내기 위한 용도로 불단을 고려시대에 유행한 일체형 목가구식 (寶殿形)이 아닌 불단과 후불벽이나 닫집이 각각 분리(佛卓形)되게 개조한 역사상 가장 이른 시기의 불전이라는 점에서도 그 가치가 돋보인다. 주존불상의 불탁 앞에 넓은 보조단을 마련한 점뿐만 아니라 불단의 위치도 앞 공간이 넓어지게 하는 이주법(移柱法)을 사용하여 공양물의 진설이나 많은 예불자 참여를 쉽게 하기 위한 장치로 가장 이른 시기의 실용성을 강조한 변화상이라는 데에도 가장 큰 의미가 담겼다.

○자복사(資福寺)로 살아남고 수륙사(水陸社)로 거듭나다.

고려시대의 비보사(裨補寺)를 조선 초기에는 자복사(資福寺)라 불렀다. 태종대에는 11개 종파의 242개 사찰을 공식화한 뒤 다시 7개 종파로 축소 통합할 때 88개의 자복사를 산간에 위치한 명찰로 대체하였다. 이는 조선시대의 지역 질서 개편에 따라 고려시대의 유산인 자복사는 세종대에 선교양종 체제가 구축되면서 혁파되었다. 조선 왕조는 기본적으로 숭유억불를 표방하였으며 특히 태종과 세종대에는 불교 종파를 축소하고 비대해진 사찰의 경제 기반 상당수를 환수하는 억불 정책이 단행되었다.

'조선왕조실록' 태종 7년(1407년) '명찰로서 여러 고을의 자복사(資福寺)를 대신하다.'의 기사에 의하면 이때 무위사는 천태종 17사 중의 하나가 되었다. 무위사의 사찰 성격의 변동은 고려 후기의 천태종 백련결사의 활발한 활동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인근 강진 만덕산 중심의 백련결사는 천태종의 법화신앙에 입각한 불교 결사 운동으로 무위사의 사찰 성격의 변동에 어느 정도의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러다가 조선 초기에 사찰의 통·폐합의 2차 정리 시기인 태종 7년(1407)에 천태종 소속의 자복사로 남게 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37권 전라도 강진현 불우조(1530년)에 "無爲寺 在月出山開運三年僧道詵所創歲久頹毁今重營因爲水陸社(무위사 월출산에 있다. 개운 3년에 승려 도선이 처음 세웠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퇴락하였으므로 이제 중수하였고 인하여 수륙사로 하였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신증편이 아니니 사실상 '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된 1481년 이전의 사정을 기록한 것으로 이해된다. 조선 초기에 전국적으로 수륙사가 지정 시기는 극락보전 건립연대인 1430년보다는 늦고 '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된 1481년 이전 시기 가운데 후불벽화의 제작연대인 1476년보다는 앞선 시기로 추정된다.

○수륙사(水陸社) 특화 공간 용도로 불전 내부를 개조하다

무위사는 조선전기인 1476년 즈음에 국가로부터 수륙사(水陸社)로 지정된 이후 이미 1430년에 건립되었던 극락보전의 내부를 수륙재(水陸齋)를 지내기 편리한 구조로 1476년에 개조하기에 이르렀다. 거대한 후불벽을 불전 한가운데 뒤쪽에 세우고 그 앞에 넓은 불단을 설치하였다. 서까래가 훤히 드러나는 연등천장 중에서 불단 윗부분을 우물천장으로 덮고 불상의 머리 위에는 보개형닫집을 가설하였다. 그리고 바닥에 전돌을 걷어내고 마루를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말하자면 수륙재(水陸齋)를 지내기 위한 특화된 용도의 공간으로 개조한 것이다.

그렇다면 무위사 극락보전(1430년)은 1476년에 그려진 후불벽화와 46년이라는 시간 차이가 존재하여 극락보전 최초의 불단의 형태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그동안 종교적 행위를 하지 않은 체 방치하고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개조되기 이전의 무위사 극락보전의 불단의 초기 모습으로는 불단과 닫집이 목가구 구조물처럼 일체형으로 연결되어 측면에 봉안하는 형태(寶殿形)인 봉정사 극락전(12∼13세기)과 부석사 무량수전(1376년)의 모습과 같았을 것이다.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주관하시는 아미타 부처님을 모시는 극락보전의 건립은 극락세계를 그린 다양한 벽화, 그리고 아미타삼존상을 제작한 것이 수륙재 특화 사찰의 이상적인 신앙공간으로 불교도의 이상향인 불국토인 극락세계를 구현하기 위해 마련된 건축구조물인 것이다.

○수륙재는 적의 망령까지도 환생케 하는 재생의식으로 산자의 애도와 복수심까지 포용하려는 천도재

수륙재(水陸齋)는 지상에 떠도는 망령(亡靈: 죽은 사람의 영혼)을 불력(佛力)으로 환생하게 하는 재생의식으로서 적까지도 포용한 모든 전망자를 위로하는 불교의식이다. 죽은 영혼을 달래려는 수동적인 자세에 그치지 않고 살아 있는 자들의 애도와 복수심까지도 포용하려는 차원에서 거행된 천도재와 같은 성격이다.

무위사가 수륙사(水陸社)로 지정된 것은 극락보전의 개조와 후불벽화인 아미타삼존도의 제작에 따른 신앙 배경에서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다. 수륙사로 지정된 무위사에 아미타삼존불상과 아미타삼존 벽화가 조성된 것은 이와 같은 신앙 구조 속에서 가능한 것이다.

무위사 극락보전은 수륙제를 지내기 위한 정심한 배려 속에서 마련된 예배 공간으로 손색없는 단아한 불전의 기풍이 돋보인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나 극심한 가뭄으로 싸우다 죽거나 굶어 죽은 이들로 고을마다 통곡 소리가 그치지 않을 때 죽은 자의 영혼을 달래려는 재생의식의 공간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수륙제는 아미타 부처님을 모신 극락보전이 제격이다. 불전 내부를 벽화로 장엄하여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주관하시는 아미타 부처님을 모셨다. 더구나 아미타삼존도의 경우 건장하고 당당한 아미타불의 협시보살로 대세지보살 대신 지장보살을 배치한 것은 고려 후기 이래 유행되었던 지장 신앙의 영향뿐만 아니라 죽은 뒤의 육도윤회나 지옥에 떨어지는 고통을 구제해 주기를 기원하는 사후세계에 대한 간절한 염원이 반영된 결과로도 이해된다. 그것은 고려 말과 조선 초의 인근 강진 영암 해남 해안가의 잦은 왜구의 출몰과 기근에서 조선 초기에 수륙제를 지내야만 하는 사회적인 배경 속에서 등장한 것이다.

황호균 〈광주시 문화재위원 ·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

황호균 약력

△광주광역시 문화재위원(2분과 위원장)

△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

△전 전남대박물관 학예연구관

△전 문화재청 감정위원

△남도불교문화연구회 회장 및 무각사 불교대학 교수 역임

2. 1962년 무위사 전경(성전중학교 졸업기념 앨범 제14회, 1962년)

3. 1978년 무위사 전경(국가기록원 성남 나라기록관, 1978. 1. 30.)

4. 1983년 무위사 전경(국가기록원 대전 행정기록관, 1983년)

5. 2019년 드론 촬영 무위사 전경('마동욱 사진집 하늘에서 본 강진-드론으로 담은 강진군 마을', 시와 사람, 2019. 3.)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