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욱의 도자이야기> 청자와 백자를 보완하다 옹기, 남도의 멋을 이루다
  • 페이스북
  • 유튜브
  • 네이버
  • 인스타그램
  • 카카오플러스
검색 입력폼
한성욱의 도자이야기
한성욱의 도자이야기> 청자와 백자를 보완하다 옹기, 남도의 멋을 이루다
  • 입력 : 2019. 09.17(화) 16:55
  • 편집에디터

현대 옹기 다도구

옹기는 신석기부터 꾸준히 발전해 온 도자의 일종으로 우리 민족의 정서와 조형미를 가장 잘 담고 있는 그릇 가운데 하나이다. 전통 도자문화 가운데 일상생활에서 가장 널리 쓰이고 흔히 볼 수 있었던 그릇으로 지역이나 장소, 계층을 불문하고 집집마다 적게는 열 개 내외에서 많게는 수십 개씩 갖추고 있어 가장 많이 생산되고 유통되었던 생활필수품이 옹기였다. 이들 옹기는 무엇보다 물과 간장, 된장, 고추장, 곡물 등을 운반 또는 저장하던 기능을 담당하였던 큰 그릇이 특징으로 작은 기종이 중심인 청자와 백자의 기능을 보완하면서 발전하였다. 또한, 전라도 지역 옹기는 독특한 제작기법인 "체바퀴타래" 기법을 사용하여 전라도 특유의 풍만한 곡선미를 갖추고 있어 남도 사람들의 넉넉하고 후덕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독특한 제작방법과 특징 등으로 인해 오래된 옹기는 오늘날 민속품이나 생활용품이 아닌 전통미를 갖춘 공예미술로 재인식되고 있다.

옹기는 날그릇에 잿물(유약)을 입히지 않고 구워 광택이 없는 질그릇과 잿물을 입혀 번조하여 광택이 나고 단단한 오지그릇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옹기는 고려시대까지 대부분 유약을 바르지 않은 경질도기 수준에 머물렀으나 유약 사용이 일반화되는 고려 말 조선 초에 매우 큰 기물에도 유약을 시유하면서 색다른 아름다움을 갖춘 생활필수품이 되었다. 그리고 근래 질그릇의 사용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현재는 오지그릇을 지칭하는 말로 바뀌게 되었다. 또한, 선사시대부터 꾸준하게 만들어졌던 대형 항아리를 이르는데, 제작 기술의 변화에 따라 점차 질적인 향상을 거듭하여 현재 옹기로 정착되었다.

옹기는 일찍부터 일상생활에서 널리 사용되었는데, 신라는 와기전(瓦器典)이라는 관청을 설치하여 그릇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전하며, 고려시대는 송나라 사신으로 1123년(인종 1) 고려에 왔던 서긍(1091~1153)이 기록한 <고려도경>에 물을 담았던 옹기인 수옹(水甕)에 대한 내용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는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에 104명의 옹장(瓮匠)을 두어 왕실과 중앙 정부에서 사용할 그릇을 생산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또한, 성현(1439∼1504)이 1525년(중종 20) 간행한 <용재총화>에 의하면 질그릇을 매우 요긴하게 사용하였음을 밝히고 있으며, 1834년 간행된 서유구(1764~1845)의 <임원경제지>에는 일상생활의 필수품으로 도기 그릇 가운데 가장 큰 것이며, 주로 곡식을 비롯하여 간장과 된장 등의 장류를 담아두기 위해 사용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 나라는 전통적으로 발효 식품인 김치를 비롯하여 간장과 된장, 고추장, 젓갈 등의 음식을 선호하였으며, 이들 발효 식품의 저장에는 반드시 옹기를 사용하였다. 따라서 모든 가정의 뒤뜰과 정원에는 소담하게 자리한 장독대가 필수적으로 집안의 음식 맛뿐만 아니라 조상들의 멋을 느끼게 하는 전통의 숨결을 지니고 있다. 또한, 옹기는 항아리 이외에도 병·단지·옴박지·투가리·자배기·종지 등 일상 음식용기와 소주고리․소주독․술독 등 술을 만드는 도구, 목욕통․연탄 아궁이․베게․요강 등 주거에 필요한 용구, 기와․굴뚝․우물 등 건축 용기, 장군․귀댕이․물병 등 생업용구, 연적․붓꽂이 등의 문방용구, 무덤의 관 등에서 확인되어 청자와 백자보다 훨씬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옹기는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우리 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용기였다. 특히, 농경을 생업 수단으로 한 정착사회에서는 음식과 주거 등 일상생활뿐만 아니라 생업수단으로 필수적인 용기이며 도구라고 할 수 있다.

옹기는 지역별로 기후와 풍토, 음식, 생활 관습 등의 차이에 따라 각기 다른 형태와 이름으로 발전하였는데, 전라도는 햇빛이 많고 기후가 따뜻하여 어깨가 넓고 입과 밑이 좁은 형태로 만들어 자외선을 많이 차단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특징은 풍만한 곡선미를 갖추고 있어 전라도 사람들의 넉넉하고 후덕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기후적으로 습도와 온도의 차이가 심해 독을 땅에 묻어 저장하는 사례가 많아 벌레와 이물질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뚜껑을 깊게 만들어 주둥이에 꼭 맞게 제작하였다. 그리고 간장과 고추장, 젓갈 등 음식문화가 발달하여 이에 맞는 다양한 옹기를 만들었다.

이처럼 옹기는 모든 계층에서 다종다양하게 애용되었으며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갖고 계승하여온 우리 민족의 소중한 전승 공예품임 알 수 있다. 또한, 청자와 백자를 비롯한 여러 자기들과 함께 도자문화 발전을 이끌어 왔다. 옹기는 일찍부터 생산되었으나 가장 왕성하게 운영되었던 시기는 현대화된 일본의 대형 상업 가마에서 대량의 상업도자가 유입되어 전통 백자의 생산이 대부분 쇠퇴한 시기이다. 일본 산업도자의 유입으로 대부분의 백자 공방이 해체되는 등 전통 도자산업이 쇠퇴하는 19세기 이후 가장 많이 설치되어 1990년대까지 왕성하게 운영되었던 것이다. 특히, 조선 후기 옹기 생산은 천주교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데, 이들은 정치적인 탄압을 피해 인적이 드문 산간오지에 정착하여 옹기를 만들어 팔면서 신앙생활을 유지하였다.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으로 현재 활동하고 있는 장인들 가운데 천주교와 관련된 사람이 많으며, 우리에게 잘 알려진 김수환(1922~ 2009) 추기경의 호가 '옹기'인 것도 이와 연관되어 있다.

옹기를 만들던 곳을 보통 옹기점 또는 옹점이라 부르고 있다. 옹기점 시설은 크게 그릇을 성형하는 공방과 이를 굽는 가마로 나눌 수 있다. 공방은 주로 날그릇을 다루는 곳으로 생질(生土)를 저장하고 다루는 연토장, 작업장인 움, 건조장인 송침, 날그릇을 건조하는 찬간(헛동막, 동막), 잿물을 만들고 바르는 시설 등이 있다. 가마는 그릇을 완성하는 최종 시설로 대체로 구릉 경사면을 이용하여 반지하식으로 만든다. 형태에 따라 조대불통가마와 뺄불통가마, 설창가마, 칸가마(뫼통가마) 등이 있는데 전라남도 지역은 뺄불통가마를 주로 사용하였다.

옹기의 제작기법은 원형의 점토띠를 한 단씩 쌓아올려 만드는 똬리기법, 가래떡처럼 길게 뽑아 나선형으로 쌓아 올라가는 타래기법, 넓고 납작한 판장(타래미)을 물레에 올려 붙여 만드는 체바퀴타래기법 등이 있다. 특히, 전라도 지역은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체바퀴타래(쳇바퀴타림, 타래미, 판뜨기, 판장질쌓기) 기법을 이용하여 크고 작은 모든 그릇을 만들고 있다. 작업과정은 생질작업을 시작으로 건아꾼작업(製粘, 製土)→대장작업(成形)→잿물작업(施釉)→건조작업→가마작업(燔造)을 거쳐 마지막으로 그릇이 구워진 상태를 보고 선별하는 순서로 진행한다. 물론 이 작업이 모두 끝나면 지게와 수레, 뱃길 등을 통해 수요자에게 전달된다. 생질은 생토를 다루는 작업으로 옹기를 만드는 처음 과정이며 생질꾼이 담당한다. 건아꾼은 생질꾼이 만들어 놓은 질배늘(고작태미, 고작더미)을 다시 가공하는 것으로 매통질이나 옆매질 등으로 생질작업 때 가려내지 못한 돌이나 잡물 등을 골라내며 건조시키는 작업이다. 대장은 그릇 모양을 만드는 성형 작업과 한 가마 분량의 날그릇이 모이면 가마 속에 서려 넣는 일, 가마에서 그릇을 구워내는 모든 일을 직접 담당하거나 관리 감독한다.

옹기 요장 한 곳은 가마 한 기를 중심으로 보통 4~7개의 공방이 체제를 갖추고 운영되었다. 공방 한 곳은 대체로 2~3인이 작업하며 3인이 1개월 정도 작업하면 한 가마 분량의 그릇을 제작할 수 있었다. 또한, 1가구(공방)는 1년에 5~8회 그릇을 구웠다. 그리고 그릇을 만드는 모든 공정은 청자와 백자처럼 전문화 분업화되어 실시되었다. 또한, 옹기를 운반하고 판매하였던 옹기 운반선도 사공과 웃동무, 하장 등으로 전문화되어 운영되었다. 그러나 현재는 공방 조직 체제가 무너져 대부분 한 두 사람이 모든 공정을 담당하고 있으며, 옹기 운반선은 1970년대 이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한편, 가마에 그릇을 적재하고 불을 지필 때는 풍향과 풍속, 습도의 변화가 성공률과 직결되어 장인들은 대체로 자연에 대한 경외심이 매우 높았으며, 완성된 옹기는 지게나 수레로 운반하기도 하였으나 대부분 바다나 강을 이용하여 대량 운송하는 때가 많아 반드시 무사 항해를 위한 의례를 실시하고 있다. 이는 좋은 원료와 숙련된 기술도 필요하지만 자연의 조화가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임을 알려주고 있다. 여기에 더하여 만드는 과정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정성과 혼이 깃들어 있어야 아름답고 단단하며 사용하기에 좋은 옹기가 탄생하는 것이다.

근래에 이르기까지 일상생활의 필수품으로 사랑받았던 옹기는 서구문명의 유입과 과학기술의 발달, 중산층의 증가 등으로 새로운 음식문화와 주택공간이 등장하면서 수요가 줄고 생산이 격감하게 되었다. 또한,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옹기 생산에 필수적인 땔감의 부족과 생산비 절감을 위한 대체연료 개발 등으로 전통적인 제작기법이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즉, 산업사회로 전환되면서 수요층이 줄면서 우리 주변에서 옹기가 점차 사라지고, 제작 기술이 단절될 위기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제작 기술의 퇴보와 함께 장인 집단의 해체가 더욱 촉진되고 있다. 정부에서도 옹기장을 문화재로 지정하여 보호 육성하고 있으나 수요가 없는 옹기장은 그야말로 문화재 역할에 그치고 있어 전통이 단절될 위험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수요의 급감과 새로운 장인들의 부재를 극복하고 전통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한 대책이 필요한 실정이다. 즉, 현대에 맞는 창조적 전통 계승에 대한 모두의 고민이 요구된다. 옹기를 미래에 전수하고 발전시킬 수 방법은 다양한 조사와 계획보다 이를 전담할 수 있는 체계적인 전승교육이다. 도제식의 소수에 의한 교육도 중요하지만 많은 젊은이들이 옹기를 배울 수 있도록 교육환경을 개방하고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교육을 통해 다음 세대들이 전통을 바탕으로 새로운 옹기 문화를 창조하고 계승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또한, 현재의 가족문화와 주거조건 등에 맞는 시대가 요구하는 옹기를 만들어야 하겠다. 그러나 수요층에 맞춘 제작도 중요하지만 전라도만의 독창성을 간직한 지역적 정체성을 잊지 않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전통을 바탕으로 현대에 맞는 창조적 계승이 있어야 하겠다. 이러한 보존과 전승, 활용 등 모든 내용은 정부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시민들을 중심으로 자생적이면서 자율적인 노력으로 이루어져야 그 의미가 깊고 오래도록 전통이 숨 쉴 수 있을 것이다.

전라남도 지역에서는 1980년대까지 나주시 봉황면 신동리와 장흥군 부산면 구룡리, 영암군 신북면 양계리, 고흥군 동강면 장월리, 광주시 광산구 삼소동 등 많은 곳에서 옹기를 제작하였으나, 현재 고유한 전통을 계승하여 요장을 운영하고 있는 곳은 세 곳만 남아 있다. 이들 요장은 각각의 특징을 지니고 있는데, 강진군 칠량면 봉황리 요장(봉황옹기)은 해안을 끼고 있으며, 무안군 몽탄면 몽강리 요장(무안옹기)은 영산강변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보성 미력면 도개리 요장(미력옹기)은 내륙에 위치하여 입지요건이 확연히 구분된다. 따라서 이들 요장의 입지조건을 살려 마을을 정비하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갖춘 전통 옹기 마을로 꾸밀 필요가 있다. 즉, 전승의 핵심인 기능도 중요하지만 마을 환경도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데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또한, 공방과 가마를 비롯한 요장 전체에 대한 문화재 지정이 시급하다. 문화재 지정은 현재의 가치도 중요하지만 미래의 문화유산이 멸실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도 크기 때문이다. 끝으로 남도 특유의 멋과 독창성을 지니고 있는 옹기를 보고 느끼고 아낄 수 있는 교육의 장으로 옹기 자료관(박물관)이 건립되었으면 희망한다.

무안 몽강리 옹기 우물

장독대(국가민속문화재 제161호 장흥 존재 고택)

강진 봉황리 요장 옹기 운반선(1969년 국립민속박물관)

타래미 올리기(이학수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37호)

타래미 만들기(정윤석 중요무형문화재 제96호)

광주 고룡동 옹기 요장(영해문화재연구원)

보성 도개리(내륙) 옹기 요장

강진 봉황리(해상) 옹기 요장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