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가 의심 받는 유일 범죄 '성폭력 범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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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가 의심 받는 유일 범죄 '성폭력 범죄'
2016년 퓰리처상 수상작… 언론인 저자들의 치밀한 취재
  • 입력 : 2019. 09.05(목) 15:54
  • 최황지 기자
믿을 수 없는 강간 이야기
믿을 수 없는 강간 이야기 | T.크리스천 밀러·켄 암스트롱 | 반비 | 1만8000원

지난 2008년 워싱턴주 시애틀에서 임대 아파트에 홀로 사는 18세 여성 마리는 침입자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신고했다. 경찰은 즉시 수사에 착수했다. 그러나 일주일 후 마리는 신고가 허위였다고 진술을 철회했다. 결국 마리는 허위 신고죄로 기소돼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마리는 거짓말쟁이가 아니었다. 약 3년 후 타 지역에서 진범이 잡혔다. 마리는 잘못된 성폭력 수사 관행의 피해자였다. 경찰은 사건 당시 성폭력 범죄의 특수성을 알지 못한 채 피해자에게 여러 번의 진술을 강요한다. 반복된 진술에서 나온 사소한 모순을 의심했다. 또한 증거가 뒷받침되지 않는 진술에는 가해자를 취조하듯 신문했다. 결국 어린 소녀는 협박에 가까운 경찰들의 말에 겁에 질려 진술을 번복했던 것이다.

이런 일은 전혀 드물지 않다. 성폭력 범죄는 피해자가 거짓말한 것일 수도 있다는 의심을 받는 유일한 범죄다. 성폭력을 당했다고 말하는 순간, 수사 기관부터 주변 지인에 이르기까지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한 번쯤 피해자의 말을 의심한다. 성폭력은 강력 범죄 중 신고율이 가장 낮은 범죄다. 그래서 성폭력은 오랫동안 '피해자 없는 범죄'로 불려 왔다. 설령 피해자가 신고를 했다 해도 형사 입건까지 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재판까지 가더라도 피해자는 기소의 모든 과정에서 회의와 의심이 따라다니는 것을 견뎌야 한다. 낯선 사람들이 가득한 법정에서 자신이 당한 성폭력의 세부 사항을 공개해야 하며 자신과 멀지 않은 곳에 앉아 있는 범인을 보며 증언해야 한다.

책은 여성 혐오적 생각이 만연한 사회에서 수사 재판 기관이 얼마나 성폭력 피해자에게 회의적이며 적대적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그 역사가 얼마나 유구한지도 알려준다. 저널리스트인 저자들은 방대한 서면 자료와 인터뷰 내용을 바탕으로 사건을 재구성해 독자들에게 사건의 전말을 전한다.

미국에서 일어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책이지만 한국 사회에 시사하는 바도 적지 않다. 저자들은 이 책을 통해 "강간 피해자가 자주 마주치는 의심의 역사를 따라가보고 싶었고", "형사들을 잘못된 수사로 빠지게 하는 편견과 가정에 대해서도 탐구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2016년 이후 한국에 선 해시태그 운동, 안희정 지사 사건 등 성폭력 경험을 고발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하지만 곧바로 피해자에 대한 의심과 회의적인 시선, 2차 가해가 이어졌다. 수사 기관이나 법정 에서도 이런 의심의 시스템이 정교하게 작동하고 있다. 2014년, 회식 자리에서 정직원 남성에게 성추행당한 KBS 파견직 여사원이 고소를 했다. 그러나 검찰은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했다. 피해자는 상대방으로부터 곧바로 무고 혐의로 역고소를 당했다. 2016년에 시작한 싸움은 2019년 7월이 돼서야 대법원으로부터 '직장 내 성희롱이 인정된다'며 무죄 판결을 받으며 끝났다. 이처럼 피해자들은 엄격한 '증명'에 대한 부담감과 '피해자다움'의 잣대에서 고통받고 무고죄로 기소당할 위험까지 감수해야 한다.

다행히 최근 한국 사회의 전반적인 성 인지 감수성이 높아지면서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자를 옥죄어온 '피해자다움'과 '2차 가해'에 대한 논의도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수사기관, 사법기관 그리고 언론 등이 성폭력 사건을 다룰 때에도 이전보다 개선된 태도를 강력하게 요구받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 책은 한국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최황지 기자 orchid@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