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부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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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석대
호부견자
  • 입력 : 2019. 08.18(일) 14:30
  • 박상지 기자
1909년 10월 서른 즈음의 젊은 여성이 하얼빈역을 서성이고 있었다. 그의 손과 등엔 어린 두 아들이 매달려 있었다. 하얼빈에 가는길, 이토 히로부미의 시신을 실은 기차와 마주쳤지만, 남편 안중근 의사의 의거는 생각하지 못했다 . 안중근 의사의 의거 이후 아내 김아려 여사와 두 아들 안분도와 안준생의 삶은 폭탄을 맞았다. 그들의 뒤엔 늘 어두운 그림자가 따라다녔다. 큰 아들 안분도가 어린나이에 일본 밀정에 의해 독살당했고, 남겨진 가족들은 유랑과 도피생활로 빈사지경에 이르렀다. 30년간 이어진 죽음같은 가난을 끊을 수 있었던 것은 안준생의 변절 때문이었다. 일제는 조선의 저항기운을 원천적으로 꺾기위해 안중근 가족을 타겟으로 삼았다. 일제의 회유와 포섭에 안준생은 결국 아버지와의 끈을 놓아버리게 된다. 안준생이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을만나 아버지의 의거를 사죄하는 모습에 독립운동가들은 분노했다. 백범 김구는 안준생을 민족 반역자로 지목하고, 광복 후 처단해야 할 변절자 1순위에 그의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그에게 '호부견자'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아버지는 호랑이였으나, 자식은 개 라는 의미다.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과 나란히 앉아있는 안준생의모습이 담긴 흑백사진 한장은 한민족 흑역사의 한페이지를 장식하며 보는이에게 분노와 안타까움을 안기고 있다.

변절한 안준생은 일본이 건넨 하사금으로 약국을 운영했던 것이 성공을 거두며 짧은영화를 누렸다. 해방 후 조국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았지만, 그의 자손들은 한국계 미국인으로 성공한 삶을 살고있다.

생전 안준생이 남겼던 말은 많은 생각을 하게한다.

"내 아들은 의사에요. 미국에서 제법 성공했고, 주위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며 잘 살고있어요. 내가 사람들의 경멸을 받으며 모은 돈으로 가족을 부양한 덕분에 사람답게 살게 된거죠. 우습지 않나요. 영웅의 아들은 개같은 삶을 살고, 변절자의 자식은 다시 성공했죠."

올해 발의된 독립유공자 처우 개선을 위한 법안은 14건. 이 중 국회에서 처리된 법안은 한건도 없다고 한다. 연일 언론에선 쪽방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현실이 보도되고 있다. 일에도 순서가 있다. 일제 만행에 대한 끓어오르는 분노를 표출하기 앞서, 국가에 가장을 내주고 국가로부터 내팽개쳐진 삶을 살아온 이들에게 애국심이 주는 무게가 어느정도인지 한번쯤 생각해봐야 할 일이다.

박상지 기자 sangji.park@jnilbo.com